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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별
2화
1.스타, 반짝반짝 빛나는 [2]


유림은 알이 굵은 안경을 손가락으로 살짝 들어 올려 콧등에 맺힌 땀방울을 걷어 냈다. 그러곤 안경을 고쳐 쓴 후 다시 뜨거운 햇빛 아래로 나섰다.
이제 오후에 있을 커피숍 아르바이트 시간까지는 수진과 함께 방에서 아이스크림이나 빨며 노닥거릴 생각이었다. 점심으로는 국수를 해 먹자고 할까, 제법 진지한 고민도 동반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고민은 몇 걸음 채 떼기도 전에 굉장한 방해물에 의해 막혀 버렸다. 유림은 모퉁이를 돌자마자 들려오는 수진의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몸을 반쯤 숨겼다.
“진짜 왜들 이러세요? 유림이는 몇 달 전에 딴 곳으로 떠났다니까요.”
붉은 벽돌집 담벼락 뒤에 숨은 유림은 고개만 빠끔 내밀었다. 안경 뒤에 감추어진 그녀의 커다란 다갈색 눈동자가 위험을 감지한 듯 출렁거렸다.
그녀의 월세방이 있는 주택의 대문 앞에 예의 그 사람들이 와 있었다. 검은 승용차의 번호판은 이제 그 숫자도 외울 지경이었다. 수진은 예전처럼 그들에 맞서서 열심히 유림을 못 본 척해 주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번만큼은 이곳에서 오래 머물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이 또 한 번 암초에 부딪힌 것이다. 유림은 입술이 아릴 정도로 사리물었다.
“저 이제 유림이랑 안 살아요.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으실 건데요? 걔 딴 데로 갔다구요.”
“그러니까 우리가 방 안을 좀 확인해 봤으면 하는데요. 조수진 양.”
문영그룹 회장의 비서인 전 실장이 수진의 앞에 나섰다. 말투는 점잖았지만 태도는 늘 그랬듯 강압적이었다.
“이거 가택침입죄인 거 아시죠? 자꾸 이러시면 저 경찰에 신고합니다. 거짓말 아니에요. 우리 주인집 할머니가 얼마나 까칠하신 분인지 직접 대면해 보실래요?”
수진이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곤 씩씩거리며 쪽문을 지켰지만, 전 실장이 고갯짓을 하자마자 달려든 두 명의 건장한 남자들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남자들이 집에 들어가기 위해 밀치는 바람에 수진은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아악! 이 사람들이 진짜! 날도 더운데 확 열받게 하네?”
넘어진 수진이 비명을 지르자, 유림의 두 발이 순간적으로 움찔거리다가 겨우 고정되었다. 지금 저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지난 일 년 동안 도망 다닌 노력이 무색해지고 말 것이다.
유림은 수진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는 것을 안타까운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자취방으로 올라간 남자 둘을 노려보다가 다시 전 실장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수진은, 멀리서 보아도 부아가 치민 듯해 보였다.
“약소하지만 상처 치료하십시오. 그리고 늘 하는 말이지만…….”
전 실장이 안주머니에서 꺼낸 하얀색 봉투를 내밀며 말하자, 수진이 그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유림이한테서 연락 오면 당장 연락 달라구요? 아서요, 아저씨. 몇 달 동안 겪어 보시고도 몰라요? 난 아저씨한테 유림이 연락처를 팔아넘길 만큼 지조 없는 사람이 아니랍니다.”
“그래도 연락을 기다리지요.”
“그만큼 하셨으면 된 거 아니에요? 싫다는 애를 왜 자꾸 데려가려 하시는 건데요. 그쪽 세계에선 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시나요?”
수진이 심각하게 물었지만 전 실장은 대답 없이 남자 둘이 내려오는 것을 쳐다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들 중 한 명이 전 실장을 향해 고개를 가로젓자, 그가 알겠다는 듯 잠시 참담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더니 수진의 손에 봉투를 쥐여 주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조수진 양. 오늘 죄송했습니다.”
유림은 숨을 죽이고 전 실장이 그 말을 남긴 후 남자 둘과 함께 승용차에 올라타는 것을 응시했다. 죄송하다고 말했지만 저들이 언제 또 이곳을 찾아와 수진을 볶아 댈지 알 수 없었다.
차가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리던 유림은 차가 보이지 않자, 골목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바스락거리는 비닐 소리가 고막을 쟁쟁하게 울렸다.
“어? 왔니?”
하얀 봉투를 손에 쥐고 난감한 얼굴로 서 있던 수진은 다가온 유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끄덕인 유림은 수진의 팔에 생긴 흉터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수진의 팔을 들어 이리저리 살피는 안경 너머의 눈길이 세심했다.
“많이 다친 거야?”
“뭐야, 다 봤어? 너 또 숨어 있었겠네.”
“숨는 건 이제 프로야. 흠…… 흉터가 깊네. 나 커피숍 알바 가기 전에 병원 다녀오자.”
“병원에 갈 필요가 뭐가 있냐. 네가 의산데. 그리고 별로 다치지 않았어. 덕분에 이거 받았으니 퉁치면 돼.”
수진이 당당하게 봉투를 스윽 내밀자, 유림은 심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진은 지금까지 전 실장이 주는 돈 봉투를 꼬박꼬박 받아서 써 왔다.
유림의 행방을 알려 달라는 조건을 달고 받은 돈이지만 단 한 번도 유림을 그들에게 팔아넘긴 적은 없다. 단순하게는 십년지기의 깊은 우정이었으며, 복잡하게는 유림의 살아온 삶이 측은해서였다.
재벌가의 숨겨진 사생아.
뒤늦게야 극비리에 유림을 찾아 나선 문영그룹 집안의 불순한 의도.
그들을 피해 일 년째 도망 다니고 있는 그녀.
덕분에 유림은 얼마 전에 레지던트 생활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더운데 수고했어. 올라가서 아이스크림이나 먹자, 수진아.”
시력이 맞지도 않는 두꺼운 안경을 쓴 채로 자신을 가리고 살아가고 있는 유림이 불쌍해서, 수진은 그 사람들이 준 돈을 절대 마다하지 않았다.
유림과 고기를 사 먹기도 했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기도 했다. 그 집안 때문에 유림이 포기한 부분들에 대해서, 이렇게라도 보상을 받는 것이 현명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무당당했던 걸음은,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힘이 다 빠져 버렸다. 유림은 좁은 방과 주방이 살림 집기들과 옷가지들로 엉망이 된 것을 보며 아까보다 더 구겨진 기분이 되었다.
습관처럼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립글로스를 꺼내니 수진이 흘깃 돌아본다. 유림은 립글로스의 뚜껑을 열고 그것을 입술에 발랐다. 습기가 많은 계절에도 입술이 트는 이상한 체질을 가진 유림이, 긴장을 하거나 당황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회를 쳤네. 회를 쳤어.”
수진이 자조하며 털어 낸 한마디에, 유림의 멍한 머릿속이 그제야 현실과 맞물렸다. 그들이 어떤 짓을 저지르고 갔는지, 마치 생생한 범죄의 현장을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립글로스가 묻은 입술을 두어 번 뻑뻑 문지른 유림은 허리를 숙여 난장판이 된 바닥을 치우기 시작했다.
“진짜 질긴 놈들이지 않아? 나 같으면 포기해도 벌써 포기했겠구먼. 일 년째 징글징글하다 정말.”
“미안해, 수진아.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구나.”
“그렇게 말하지 마. 민폐는 나도 너한테 끼치고 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내 주제에 이런 자취방을 어떻게 구할 것이며, 마음 편히 알바나 하면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
수진이 어울리지 않게 보조개까지 패며 웃어 보였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틈틈이 하는 아르바이트로 강원도 산골에 혼자 계신 어머니를 돕는 효녀가, 그것으로도 모자라 친구에게 위로까지 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위로일 뿐, 그것이 유림을 향한 걱정과 염려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방을 대충 치우고 점심으로 국수까지 해 먹고 나서야, 두 사람은 방바닥에 등을 붙일 수가 있었다. 각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문 채로, 다리를 들어 올려 발바닥을 벽에 붙였다.
차르르르 돌아가는 선풍기가 머리칼이며 옷자락을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방 안은 그렇게 잠시 고요를 맞이했다.
“그 사람들 말이야. 수일 내로 또 올 것 같지?”
그러나 그 고요도 오래가지 못했다. 침묵을 견디지 못한 수진이 한숨을 쉬며 넋두리처럼 물어 오자, 유림은 먹었던 국수가 갑자기 소화가 덜 된 느낌이었다.
“그렇겠지.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까. 나는 또 도망을 다니겠지. 스펙터클하게.”
“저 사람들 정보력 끝내주지 않냐? 우리 구로동 월세방에 살 때 제일 처음 찾아왔었잖아. 내 이름까지 아는 거 보고 와아, 대단한 사람들이구나 싶더라.”
“그 사람들이야 주변 사람만 조종하면 알아내는 거야 어렵지 않을 테니까.”
“너 그러지 말고 아예 외국으로 나가지 그래? 2년 동안 레지던트 생활하면서 모아 둔 돈이랑 엄마 그림 팔아서 저축한 돈도 있잖아. 이렇게 눈에 맞지도 않는 안경까지 써 가면서 숨고 또 숨고, 도망치고 또 도망치고. 지겹지 않아? 언제까지 이럴래?”
“그 사람들이 포기할 때까지.”
안경 속 유림의 눈동자는 천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파리똥이 주근깨처럼 묻은 형광등 덮개를 의미 없이 쳐다보고 있으니, 옆에서 수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뭐? 너도 생각해 봐. 그 사람들이 너를 포기할 것 같아?”
“무슨 일이든 끝이란 건 있어. 내가 끝내지 않으면 그 사람들이 끝내겠지. 그리고 외국으로 나가는 건 싫어. 내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하지도 못하는 언어로, 내가 먹을 수도 없는 음식으로 살아간다는 거 끔찍해. 사람들 사이에서 이방인이 되는 건 지금까지로 족해. 어디에서든 이렇게밖에 살아갈 수 없다면 여기가 좋아.”
“그럼 차라리 대놓고 그 회장이라는 작자를 찾아가는 건 어때? 또 알아? 그 집에서 너를 찾는 이유가,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게 아닐 수도 있잖아. 진심으로 바람둥이로 날렸던 과거를 반성하고 혈육을 찾고 싶어 하는 거라면?”
“그런 사람이라면 엄마를 꼬드기지도 않았을 테고 나 같은 존재를 만들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 나를 찾았겠지.”
“대체 무슨 목적으로 너를 찾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그러니까 웃기는 거지. 마약 상습 복용으로 잡혀간 큰아들에, 미국에 있는 아방궁이 들켜 버린 큰사위에, 작은딸은 또 논문 표절이라지? 그룹 이미지가 말이 아니야.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나를 찾겠대. 그 목적이 뭘지 감히 짐작할 수도 없어서 겁이 나. 확실한 건 그들에게 잡히면 그때부턴 내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니게 된다는 거야. 엄마가 그랬으니까.”
평소와는 다르게 말이 많아진 건 조금 전의 상황 때문이리라.
그들에게 잡히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납득시키고, 문영그룹의 회장이 개자식이라는 사실도 한 번 더 인지하면서, 나아가 수일 내로 도망을 가야 한다는 당위성을 새기려는 것이다.
도망가야 한다. 또다시. 그리고 그건 어려운 게 아니다.
3년 동안 암 투병을 하던 엄마는 죽기 직전 유림에게 유품을 남겼다. 여류 화가로서의 엄마는 꽤 저명했고 능력이 있었던 것 같다.
엄마가 죽고 나서, 공부하고 살아 나가기 위해 장물시장에 내다 팔았던 그림 몇 점은 입에 풀칠만 할 정도의 값만 받았다. 엄마가 얼마나 유명한지, 엄마의 그림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알았다면 좀 더 머릴 굴려 흥정이라는 것도 했을 것이다.
엄마는 유림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각인시키려 했다. 문영그룹의 피가 몸속에 반쯤 흐르고 있다고 버릇처럼 말씀하셨다.
하지만 정작 그런 엄마는 그 집 사람들의 방문을 두려워했으며, 돈 봉투를 가지고 온 사람들이 다녀갈 때마다 고열로 쓰러지곤 했었다. 엄마는 쓰러져서도 유림을 낳게 해 준 남자가 단 한 번이라도 찾아와 주기만을 하염없이 바랐다.
그런 엄마가 죽은 후 모든 것을 잊고 사는 것만이 해답이었다. 문영그룹이니 뭐니 애초에 있지도 않은 일이었던 것처럼, 엄마가 암 확진을 받았던 순간에 되기로 결심한 의사라는 꿈만 좇으면서. 그렇게 평화롭게 살면 잘 사는 거다, 생각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정확하게 일 년 전부터 그 평화는 깨지기 시작했다. 문영그룹 쪽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접한 순간, 마음보다 몸이 먼저 도망을 쳤다.
현재 문영그룹이 사실상 역대 최대 위기라는 뉴스의 보도들은, 도망가는 발길에 더욱 힘을 실어 주었다.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다시 이 동네로. 도망의 동선은 넓고 다양했다. 그리고 며칠 내에 다시 그녀의 두 발은 다른 동선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림은 아이스크림을 문 채로 고개를 돌려 벽에 비스듬히 걸려 있는 그림을 보았다. 암 투병을 하던 엄마가 마지막으로 그린 작품이 허접한 싸구려 액자에 끼워져 있었다.
엄마의 유품 중 하나인 셈이다. 커다란 외눈박이 남자의 얼굴. 하나뿐인 동그란 눈 속에는 동공이 아니라 까만색 별이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별을 박은 그 눈은 웃고 있었다.
외눈박이인데도 웃고 있는 남자.
어딘가 기형적인 느낌이 물씬 났지만, 유림은 엄마가 이 그림을 유독 아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림의 시선이 그림의 하단으로 옮겨 갔다. 엄마의 투박한 글씨체가 남자의 턱 부근에 있다. 유림은 글씨를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운소. 스타.”

☆ ★ ☆

“우리 아들 얼굴을 회사에 와야 보는구나.”
서승그룹 회장실의 한편, 접견실에 회의 테이블이 아닌 식탁이 차려졌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가족 외식이 오늘은 한준의 형편에 맞추어 회장실에서 열린 것이다.
초빙된 요리사가 내어놓은 음식은 점심 식사로 즐기고 말기엔 지나치게 양질의 것이었고, 창수와 은희는 내내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죄송합니다. 대신 와인은 어머니가 좋아하실 만한 걸로 골라 봤어요. 드세요, 어머니.”
한준은 미리 준비해 온 와인을 은희의 잔에 채워 주었다. 아들의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한다는 투정이 와인 한 잔으로 무마될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은희의 표정은 금세 풀려 버렸다. 와인을 한 모금 머금은 은희가 슬쩍 한준을 보았다.
“넌 안 마실 거지?”
“네. 오후에 회의가 있습니다.”
“넌 어쩜 네 아버지 젊으셨을 때보다 더 독하게 일을 하니. 따로 나가서 사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죽겠는데 이젠 회사에 와야만 얼굴을 볼 수 있을 지경이라니. 여보, 한준이한테 갤러리까지 대체 왜 맡기신 거예요? 그룹 일만 해도 충분히 바쁘고 벅찬 애한테.”
표정이 풀렸다는 건 아무래도 오산인 것 같았다. 은희는 한술 더 떠 창수를 향해 투정의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난감해진 한준이 창수의 잔에도 와인을 채우자, 창수가 잔을 든다. 평생을 그룹을 위해 바친 손은 어느새 주름으로 굴곡져 있었다.
“갤러리는 단순히 사업적인 측면만 보고 시작한 게 아니야. 이제 문화생활에도 깊이 들어갈 준비를 해야지. 갤러리는 시작일 뿐이야. 그러니 가장 유능한 사람을 책임자로 앉히는 건 당연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