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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별
1화
프롤로그


비서실의 문을 열기 전, 한준은 미간에 골이 패도록 인상을 구기며 발치로 한숨을 쏟아 내었다. 자연스럽게 손에 악력이 가해져, 들고 있던 신문의 중간 부분이 구겨졌다.
그래도 분노가 조절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리자, 그는 한 번 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문을 노려보는 시선은 따갑기 그지없었다.
재완은 지금쯤 이 방 안에서 말단 여직원과 노닥거리고 있을 것이다.
퇴근 직후 30분. 그가 전무이사실에 남아 잔무를 처리하는 그 시간 동안, 비서인 재완은 평소 은밀하게 눈길을 주고받던 여직원을 불러와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다 마음이 맞으면, 보고도 하지 않고 퇴근을 하여 곧장 호텔로 가기도 한다. 한준이 멀리서 직접 목격한 것만 세 번이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얼마나 바람을 일으키고 다닐지 뻔했다.
물론 아무리 고등학생 때부터 단짝이었던 재완이라 해도, 비서의 사생활에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회사 내의 질서와 직원들의 정서에 직접적인 피해가 가지 않는 이상은, 들이대며 잔소리를 할 수 있는 도덕적 잣대도 없다. 그렇게 습관처럼 여직원들과 하룻밤을 보내면서도 어찌 된 일인지 회사 내에 소문 한 점 없던 탓이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한준의 분노를 살 만한 케이스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지시를 내린 사항에 대해 재완은 소홀했고, 그 여파가 지금 들고 있는 이 신문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어떤 일에서든 져 본 적이 없었고 실패해 본 적 없는 류한준의 자존심에, 얇지만 분명한 금이 간 순간인 것이다.
“우리 은채는 웃는 게 아주 예뻐.”
한준이 문손잡이를 비틀자 틈새로 재완의 목소리가 작게 건너왔다. 시선을 드니 의자에 앉은 재완이 제 무릎 위에 여자를 앉힌 채,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
재완의 와이셔츠 단추 세 개가 풀어져 있고 여직원의 민소매 블라우스도 아랫단이 삐죽 흘러나온 걸 보니, 벌써 진도가 반쯤 나간 모양이다.
한준이 아예 안쪽으로 몸을 들여 벽에 기대고 섰는데도, 두 사람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추태를 계속 이어 가고 있었다. 한준은 재완이 여직원의 불룩한 가슴선에 느끼한 시선을 꽂는 것을 싸늘하게 응시했다.
“정말요, 윤 비서님?”
“음. 마치 더운 여름 하늘에 시원하게 내리는 장마 같달까? 보고 있으면 시원해지고 아주 청량해져. 하하하. 이 오빠 오늘 제대로 센티해지네?”
“아잉. 윤 비서님은 어쩜 그렇게 감성적이세요? 보기와는 정말 달라요.”
“우리 은채 보기에 이 오빠가 어떤데?”
“소도둑같이 생겼잖아요. 호호호.”
“하하, 하하하. 우리 은채, 얼굴만 예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개그감도 뛰어나네?”
민소매 아래로 드러난 여자의 팔을 재완이 손가락으로 툭 치며 멋쩍게 웃어 댔다. 실소를 넘어서서 한숨이 터지려 했다. 이쯤 되니 한준은 이들의 추태를 좀 더 지켜보고 싶어졌다.
노닥거리는 재미가 절정에 달했을 때, 그 순간을 무참히 깨 버리는 것도 충분히 분노를 푸는 방법이 되리라.
“농담이에요. 그런데 있잖아요. 전무님과 윤 비서님은 동갑내기 친구 사이시잖아요? 전무님은 모든 여자들이 인정하는 최고의 남자거든요. 비주얼부터 시작해서 부족한 걸 찾는 게 힘들 정도로 완벽한데, 윤 비서님은 틈이 많아도 너무 많아 보인달까.”
“하, 하하하. 그건 우리 은채가 아직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 거야. 우리 은채, 올해 스물여섯이라 했었나? 이 오빠는 서른셋이거든. 물론 전무님도 서른셋이지.”
재완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오빠의 서른셋 인생은 전무님의 서른셋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어. 사람은 진흙탕에서 뒹굴어야 비로소 세상을 보는 눈이 깊어지고 커지는 법이거든. 그런 의미에서 이 오빠는 세상을 아주 잘 안다고 할 수 있지.”
“세상이 어떤데요?”
“음. 요지경? 하하하하.”
“요지경 같은 소리 하네.”
한준의 모난 음성이 불쑥 끼어들자, 재완과 여자의 놀란 듯한 시선이 동시에 몰려왔다. 잠깐 비서실에 싸늘한 적막이 감돌았다.
문 앞에 선 이가 서승그룹의 전무이사임을 알아챈 여직원이 먼저 후다닥 재완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귀까지 붉어진 얼굴을 얼른 숙이며 참담함이 묻은 입술을 짓씹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재완이 야속한 표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준은 여직원을 지나 재완에게 눈길을 꽂았다.
“볼썽사납군. 셔츠 단추나 채우지 그래, 윤 비서?”
재완은 한준의 지적에 셔츠 단추를 만지는 둥 마는 둥 하며, 옆에 서 있는 여직원의 팔을 툭툭 쳤다. 어서 나가 보라는 의미임을 알아들었는지, 여직원이 손으로 옆얼굴을 가린 채 책상을 지나 폴짝폴짝 뛰쳐나갔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재완이 일그러진 얼굴을 들고 한준을 쳐다보았다.
“내가 이 회사를 당장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진짜.”
“그 말 벌써 5년째야. 이번엔 믿어도 돼? 사직서는 고딕체로 타이핑해. 지난번처럼 흘림체는 질색이야.”
“그래. 내가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때려치울 테니까 두고 봐. 부하직원의 사생활이나 엿보고 엿듣는 전무 놈한테 내 남은 인생을 바칠 수는 없지.”
“그러니까 고딕체로. 오케이?”
재완은 틈이 보이지 않는 한준과의 대화를 잠시 끊고는 허탈한 표정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회사 안에서 볼썽사나운 꼴을 연출한 건 자신이면서, 제 발 저린 탓에 괜히 막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사직서로 협박하는 것 역시 이제 습관이 되어 한준이 녀석에게 먹힐 리 없다.
그러니 이제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이 녀석의 뒤틀린 심사를 어루만져 주는 게 다음 순서였다. 그래야 이 녀석이 목격한 조금 전의 장면에 대해 최소한 변명할 여지라도 있으리라.
“아까 그 여직원은 봐줘. 내가 꼬드겨서 따라온 거야. 그 여잔 아무 잘못 없다고.”
재완의 기세는 한풀 꺾였지만 말의 뉘앙스가 어딘가 묘한 불편함을 느끼게 했다. 한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지금 여자를 두둔하는 건가? 여자라면 책상 위의 흔한 볼펜 취급도 하지 않는 네가?”
“마음껏 비아냥거려. 그런데 나, 여자를 볼펜 취급한 적은 없어, 이 자식아.”
잠시 발끈할 뿐 시선을 아래로 내리까는 모습이 확실히 지금까지와는 달라 보였다. 머릿속 기억을 뒤져 봐도, 여자와 노닥거린 후의 일반적인 재완의 모습이 아니었다. 재완은 지금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뭐야. 진짜 사랑이라도 하는 거야, 윤 비서?”
“그래! 이 자식아! 그렇다. 어쩔래?”
“내가 어쩌고 말고 할 게 있나. 그 귀찮은 걸 왜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네 사정이고, 내 사정은 달라. 내 눈에 띈 이상 책임을 물어야겠어. 너는 너대로, 여직원은 여직원대로.”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 친구가 이제 제대로 분 냄새도 좀 맡고 사랑도 좀 하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고깝지? 응?”
“그러게 시킨 일은 확실히 마무리를 했어야지. 내 화가 어디로 튈 줄 알고 게으름을 부리는 거지? 간도 커, 윤 비서.”
한준은 이죽거리며 쥐고 있던 신문을 책상 위에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재완의 시선이 그것을 따라갔다.
“운소의 [스타]. 그 그림을 찾으라고 분명히 지시를 내렸지, 지난주에. 그런데 우리보다 한발 앞선 곳이 있어. 어떻게 생각하지?”
재완은 한준의 야멸친 말을 들으며 구겨진 신문을 바르게 폈다. 몇 차례 눈을 굴리지 않아, 한준이 지금 화가 나 있는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부분을 발견했다.

『업계 1위 예담 갤러리. 운소 김미현 작가의 유작 [스타]의 행방에 한 발 다가서다.』

기사의 헤드라인 아래에서 예담 갤러리의 대표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기사의 내용은 현재 국내에서 주목받고 있는 작품인 고(故) 김미현 작가의 생전 마지막 그림 [스타]를 예담 갤러리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10년 전 작고한 운소 김미현 작가의 모든 작품들은 현재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고가에 거래되고 있었는데, 작고하기 직전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알려진 [스타]만은 현재 그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다.
살아생전 사생활이 완벽하게 베일에 감추어졌던 사람이라 그림을 찾을 수 있는 정보나 단서가 워낙 미미했다.
그 때문에 [스타]는 운소의 여타 작품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가치와 가격이 제시되고 있으며, 업계 전체가 이 그림을 찾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한 달 전에 오픈한 서승그룹 산하 류(流) 갤러리의 대표직을 겸임하게 된 한준에게 [스타]는 꼭 손에 넣어야 할 물건이었다. 그의 부친이자 서승그룹 회장인 창수가 어떤 마음으로 그에게 갤러리 대표직을 맡겼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로 그것을 재완에게 지시했건만, 정작 선수는 다른 곳에서 치고 말았다.
“회장님은 왜 하필 네 녀석한테 전무이사도 모자라 갤러리 대표직까지 하사하신 거냐, 대체. 이러니 내가 발이 네 개라도 모자라지. 안 그러냐?”
“인정에 호소해 봤자 달라질 건 없어. 넌 상사의 지시에 소홀했어.”
오만하기 짝이 없는 존재가 부드러운 음성과는 달리 야비한 미소를 입에 무는 것이 보였다. 재완은 그런 한준에게서 시선을 떼어 낸 후 고개를 위로 쳐들고는 후우, 한숨을 쏘아 올렸다.
말싸움은 포기다. 일에 지독히도 미쳐 있는 한준이지만, 이런 것이 이 녀석의 방식인 것을 이제는 안다. 몸으로 체득했고 머리로 학습했다.
한준은 당장 해결해야 하는 일 앞에선 물불 따위를 가리지 않았다. 스스로 장사꾼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한준에게 있어, 일이라는 건 곧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오늘 할 일을 절대 내일로 미루지 않는 것. 예를 들어 지시에 소홀한 비서를 나무라기 위해 사적인 애정 행각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불쑥 난입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한준의 스타일에 이제 재완도 완벽하게 익숙해졌다. 지금의 이 원망은 여직원을 향한 미안함에서 비롯된 것일 뿐, 재완은 사실 그 누구보다 한준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고 있었다.
재완은 한준의 불도저 같은 성격을 좋아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처음 몸담았던 서승호텔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는 옳다고 믿는 일이면 결정하는 것에도 신속했고, 결정을 했다면 주저하지 않고 밀고 나갔다. 그리고 대부분 그것은 백발백중 한준의 예상과 맞아 들어갔고, 회사에 큰돈을 벌어다 주었다.
그 결과 지금의 한준은 어디에서나 인정받는 그룹의 후계자가 되었다.
괴로울 땐 고함을 지르고, 눈물이 날 땐 울고, 힘이 없을 땐 쓰러지고 마는 자신과는 달리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갑고 건조하며 생각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 한준의 성격은 아주 가끔 밥맛 떨어지게 할 때가 있지만 말이다.
이 녀석의 피는 아마도 파란색일 것이다. 피의 온도 또한 빙점 이하일 것이다. 재완이 아는 한준은 그랬다.
“24시간 안에 [스타]를 찾아. 장물시장도 상관없어.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용인할 거다. 그러면 너의 은채, 모른 척해 주지.”
이것이 바로 류한준식 거래 매뉴얼이다.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는 것. 재완은 한준의 입가에 묻은 희미한 웃음기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한준이 자신을 잡아먹는 상상을 하고는 도리질을 치며 마지막 발악을 했다.
“야비한 놈. 사람 감정 가지고 협박이나 하다니. 네가 그러고도 전무냐? 그러고도 수많은 직원들을 거느리는 오너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넌 이런 방식이 아니면 분명히 게으름이나 피울 테니까. 안 그래? 그리고 장사란 원래 이런 거야, 윤재완.”
“그래, 이 장사꾼아. 평생 일만 하다 늙어 봐라. 그때 가서도 이렇게 잘난 척만 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워낙 사적인 자리에서 서로가 서로를 놀리고 면박을 주는 것에 익숙한지라, 한준은 재완의 악담을 흘려들으며 재차 확인만 받을 뿐이었다.
“24시간이야. 넘기면 재미없어.”
한준은 구시렁거리는 재완을 뒤로하고 그곳을 나왔다. 긴 복도를 걸어 나가는 동안 생각의 결은 자연스럽게 그림에 맞추어졌다.
조건을 내걸어야 빨리 움직이는 재완의 성격을 건드리긴 했지만, 그가 어떤 단서도 없이 그림을 24시간 안에 찾을 거라는 부분에 대해선 회의적이었다. 그러니 차선책을 생각해 두어야 하지만 이 역시도 안갯속이다. 한준은 걸음을 느리게 끌다가 멈추어 섰다.
복도의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7월 초의 끈적끈적한 열기가 도시를 적시고 있었다.
어둠과 빛의 경계에 서 있던 저녁이 열대야를 맞이할 채비를 끝냈다. 고단했던 하루가 식지 않은 땀과 함께 또 한 번 저물어 간다. 이렇게 반복되는 하루지만 매시간을, 매 순간을 기억하려 하고 의미를 두려 했다.
어쩌면 그가 영영 누리지 못했을지도 모를 시간들.
앞으로도 누릴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는 시간들.
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 하는 시간들.
하여 이 시간들을 선물해 준 부모님을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맡기신 일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무조건 성공시키는 것. 지금은 그것만이 중요했다.
더욱 뚜렷해진 어둠을 응시하던 한준은 잠시 후 발길을 이어 갔다.

1.스타, 반짝반짝 빛나는 [1]

7월을 맞이한 지 며칠이 지난 도로는 뜨겁게 이글거렸다. 발자국을 뗄 때마다 몰려드는 습한 기운 때문에 몸은 이미 땀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턱까지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 낸 유림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적당히 그늘진 곳을 찾아 햇빛으로부터 몸을 숨겼다. 편의점 오전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구입한 몇 개의 아이스크림은, 비닐 봉투 안에서 이미 다 녹아 버렸을 것이다.
“하아…….”
한 달 전에 이사 온 이곳은 다세대주택이 즐비한 골목이 미로처럼 엉겨 있었다. 텁텁한 바람마저 외면하는 후미진 데라 길을 익히는 데에 족히 일주일은 걸렸다.
얼기설기 연결된 전선이 파란 하늘을 가려 버리고 구석구석에 아무렇게나 쌓인 쓰레기가 신선한 공기의 유입을 방해하는 동네.
밤이면 어디서 나타난 건지 술주정꾼들의 고성방가가 잠을 깨우고, 반복되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절로 피곤을 느끼게 하는 동네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번만큼은 오래 머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