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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진위대 1권 (25화)
제5장 만남 (8)
일단 사금광은 인력이 많이 필요했다.
하루 종일 차가운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모래를 헹궈내야 하는 고된 작업.
그렇지만 귀중한 간도 주민들을 이런 일에 내몰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제안한 것이 노예 노동의 부활이었다.
당분간 죄수를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처벌을 겸해 앞으로 엄청나게 잡힐 마적과 매국노들을 동원해 사금을 채취하자는 것.
그들을 동원할 경우, 또 다른 이점도 있었다.
금광에서는 보통 노동자를 비인간적이라 느낄 정도로 엄중 감시한다.
채취한 금을 숨겨 달아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주민을 노동자로 채용할 경우, 이런 불편한 알력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물론 노동자들에게 일정 구역을 나눠 주고 채취 성과를 비율제로 나눠 갖는 방법도 있지만, 이주 초기의 자금 사정을 고려할 때 효율성이 떨어진다.
참으로 경제학자다운 발상이었다.
더구나 매국노들은 철저히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논리가 잘 먹혀들었다.
비인간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소수가 반대했지만, 그의 합리적 고집이 인권 논리를 꺾어 버렸다.
단, 가급적 좋은 노동환경을 제공한다는 전제하에.
“네, 알겠습니다.”
무전기를 내려놓은 무전병이 민정기 대장에게 보고했다.
“대장님, 본부에서 전언이 있습니다. 정찰기가 무산군과 경성군 경계 지점에서 군대 주둔지를 발견했답니다. 정확한 위치는 관모봉에서 정북 2㎞ 지점에 있는 계곡인데 자세한 확인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래? 서두수 지부에서 대기하고 있는 팀에게 바로 연락하도록.”
다음 날 아침.
민우 일행과 해병대원들이 숲을 빠져나오자 작은 하천이 나타났다.
준태에게 설득당해 다시 발걸음을 돌린 간도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이 물줄기가 해란강이며, 저 앞에 보이는 작은 마을이 청산리라고 했다.
아직 상류라서 그런지 해란강은 강이라기보다 개울에 가까웠다.
남쪽 홍기하 노선과 해란강을 따라 나란히 난 길이 맞닿은 지점, 이 삼거리 동네가 그 유명한 청산리였다.
청산리는 대여섯 가구 정도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일행은 강가에서 잠시 숨을 돌리기로 했다.
그사이, 민우는 주민 한 명을 앞세워 청산리에 들어가 마을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얘기를 주고받던 민우는 급히 지도를 들고 정민창 대장을 찾았다.
“대대장님, 이곳 청산리에서 일행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주민들에게 이야기를 들어 보니 마적들은 보통 여기 삼도구(화룡 중심지) 북서쪽 방향에서 내려온답니다. 안도의 명월구나 송강진 쪽에서 출발하면 자연스럽게 화룡 북서쪽에서 합류되는 길이 나오니까, 그 길이 마적의 출몰 통로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벌써 이 북쪽 골짜기 마을들이 습격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니 어쩌면 지금 화룡의 중심부인 삼도구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길 안내를 담당할 주민 몇 명과 1개 중대 병력을 먼저 보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빨리 이동할 수 있도록 다른 짐은 놔두고 무기만 챙겨서 말입니다.”
“그게 좋겠군요. 그러면 내가 본대를 이끌고 갈 테니까 고민우 씨가 문규민 대위의 1중대랑 동행하십시오.”
“네. 지도상으로는 십여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지만, 다행히 길이 좋아 보이니 빠르게 이동하는 게 가능할 것 같군요.”
윤희와 준태를 본대에 남겨 둔 채 민우는 해병대 1중대 병력과 더불어 출발했다.
민우는 처음 길 안내를 담당한 주민이 병력의 이동 속도를 못 따라올까 걱정했는데, 그것은 엄청난 기우였다.
늘 걷는 게 생활화됐던 우리 조상들은 정말 걷기의 달인이었다.
해란강이 만들어 낸 계곡 길을 따라 한참 가다 보니 어느새 탁 트인 평원이 나왔다.
이곳부터가 진짜 화룡인 셈이다.
1중대 병력은 행군하는 동안 상당수의 피난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마적의 출몰 소식에 증봉산 골짜기로 잠시 피신할 생각이라고 했다.
점심 무렵이 되자, 삼도구 마을이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마적의 습격을 받지는 않은 것 같았다.
삼도구는 한국인만 오백여 호에 2∼3천 명이 밀집해 살고 있는, 제법 큰 정착촌이었다.
물론 이 당시 화룡 지역 전체의 인구가 수만 명을 헤아린다는 기록이 있지만 대부분의 마을들이 산골에 자리 잡고 있던 탓에 삼도구의 인구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았다.
이 또한 마적이나 청나라 관리의 횡포 때문에 발생한 현상일 수도 있었다.
이 시기에 청의 관리들은 간도 한인들의 땅의 빼앗아 등기를 한 후, 돈을 받고 한족이나 만주족(여진족)에게 넘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참나! 인간들 작명 센스하고는.”
민우는 지도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삼도구(三道溝)에서 서북쪽으로 올라가면 용정과 연길이 나온다.
당시 용정은 육도구(六道溝)라고도 불렀다.
그런 면에서 간도의 지명을 보면 어지간히 작명 센스가 없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이 지역 하천의 이름 대부분에 숫자가 붙어 있었다. 일 대신에 머리란 뜻의 두(頭)를 붙여 두도백하(頭道白河), 이도백하(二道白河), 삼도백하, 또 두도구, 이도구, 삼도구…….
이렇게 하는 것이 한 지역에서는 편리할 수 있지만, 문제는 다른 동네에서도 그렇게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민우가 들여다보는 지도에는 같은 지명과 하천 이름이 상당히 많았다.
화룡이란 이 지역의 이름만큼은 ‘산골짜기’란 뜻의 여진어라 했다.
그 외에 지명다운 지명들, 예를 들어 명동, 용정, 송하평, 천수평 등은 대개 한국인 이주민들이 붙인 이름이었다.
이 당시 이주민들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맑은 샘물이었다.
그래서 물이 맑은 곳을 만나면 앞에 샘 천(泉)자를 붙였고 산골 마을엔 ‘동(洞)’을 평야 지대에는 ‘평(坪)’자를 붙였다.
그러므로 이 글자들이 들어간 곳이라면 한국인들이 개척한 마을로 보면 된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열을 맞춰 삼도구로 들어가는 해병대원들.
처음 마을에 들어섰을 때, 마치 유령의 거리에 들어선 느낌이 들 정도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주민들 대부분이 피난하였거나 멀리서 마을로 들어오는 정체불명의 군인들을 발견하고 숨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조금 더 들어가니 호기심을 못 이긴 주민들이 하나둘 담 위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해병대원들을 살피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중 태극기를 발견하고 얼굴이 환해지는 한 남자가 골목으로 뛰쳐나오며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집 밖으로 나왔다.
“태, 태극기라오! 우리 편 군대랑꼬!”
“와아! 우린 살았오, 살았꾸마!”
“리 장군님이 보내신 고이 아니갔소! 마적들 오는 걸 알고!”
주민들은 민우와 해병대원들을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사실 그들은 피난을 가려고 한창 짐을 싸던 중이었다.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서 해병대원들은 장터로 보이는 마을 중앙의 광장으로 이동했다.
아직 피난 안 가고 집에 있던 사람만 나왔지만 공터가 금세 꽉 찼다.
“고런데 우리래 보던 고 군인들이가 아니지 안슴둥?”
“고러게. 다른 군대임둥? 옷차림도 울긋불긋하니…….”
“거, 입들 좀 다물기오! 대장이 무슨 얘기 하나 들어 봐야 안 갔어.”
그때, 주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문규민 중대장이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대한독립전선 소속의 군인들입니다. 마적 떼가 습격할 것이란 얘기를 듣고 급하게 왔습니다. 몇 시간 뒤면 다른 군인들도 도착할 테니 이젠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그 말에 주민들 중 성미 급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그럼 리범윤 장군의 부대가 아닌 것임둥?”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부대입니다. 다만 이곳 간도를 지키고 외적과 싸우는 군대라는 면에서는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께서는 안심하시고 지금부터 우리에게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서 달구지나 마차를 보유하고 계신 분 있습니까?”
문규민 중대장은 후속 부대가 빨리 이동할 수 있도록 달구지를 보낼 생각이었다.
다행히 주민들이 적극 협조해 주어서 수월하게 수십 대의 짐수레를 빌릴 수 있었다.
문규민 중대장은 같이 온 현지 안내인을 붙여 수레들을 출발시켰다.
또한 1개 분대 병력을 북서쪽 방향으로 정찰을 보냈다.
문규민 중대장이 마적 떼에 대한 조치를 취하는 사이, 민우는 마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사람들은 앞 다투어 자기가 겪거나 들은 소문을 이야기해 주었다.
민우는 그들의 이야기를 취합해 지도에 하나하나 표시해 나갔다.
“소대별로 모여 휴식을 취하도록! 소대장과 분대장들은 이쪽으로 모인다!”
소대장들이 모이자 민우가 지도를 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얘기를 종합해 보니까 얼마 안 남은 것 같습니다. 그저께는 여기, 어제저녁에는 이 마을이 털렸다고 하니까 거기서 하룻밤 묵었을 테고, 오늘 아침엔 이 마을이 털렸을 겁니다. 그다음엔 바로 이곳 삼도구이지요. 다들 말을 타고 달려서 그런지 이동 속도가 장난이 아닌데요?”
“말이라…… 흠.”
“중대장님도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것 같은데, 맞죠?”
“하하! 네. 가급적 말은 온전히 다 잡고 싶군요. 만날 걸어 다녔더니 기동력도 떨어지고 모양새도 안 나니 말이죠.”
“저도 아쉽긴 한데, 괜히 말에 욕심 부리다 사상자가 나올까 걱정입니다.”
“일단은 말을 고려하지 않고 작전을 세워 보죠. 뭐, 운이 좋으면 많이 포획할 수 있겠지요.”
말을 하다 멈춘 문규민 중대장은 소대장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이, 소대장들. 이번 전투에서 한 명이라도 부상자가 발생한 소대는 오늘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야. 심지어 긁힌 상처도 용납 못한다. 내 말, 알았나?”
문규민 중대장의 엄포에 소대장들이 설마 그럴 리가 하는 표정으로 웃으며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사실 이들의 밝은 표정과는 달리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 들이닥칠 마적은 규모가 꽤 크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대개 수십 명 전후로 구성되던 마적 집단이 이번엔 무려 300명 가까이 된다고 했다.
하기야 그 정도 모였으니 여기 삼도구 같은 큰 마을도 넘보는 것일 터.
민우는 마적의 규모가 왜 커졌는지 금방 유추해 냈다.
러일전쟁 때문이리라.
서쪽의 봉천에서 수십만의 군인들이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으니까 상당한 유민이 발생했을 것이고, 그들 대부분은 동쪽으로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이쪽에는 미개척지가 많으니까.
그리고 유민을 따라 마적 집단도 이동했을 것이다.
아니면 유민 자체가 무장해 마적으로 변신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300명 가까이 모이려면 여러 개의 한족 마을이 가담해야 가능할 테니.
문규민 중대장은 대원들을 이끌고 해란강을 건너 마을의 서북쪽으로 올라가서 부대를 배치했다.
마을 진입로에는 중화기소대의 기관총반과 다른 소대에서 기관총을 몇 정 더 차출해 가장 후미에 배치했다.
그리고 좌측 전방의 언덕에 박격포반과 정찰을 보낸 병력을 합쳐 1개 소대를 매복시켰고, 우측 전방의 해란강의 강둑 안쪽에 역시 1개 소대를 매복시켰는데, 그들의 위치는 다른 소대에 비해 다소 앞쪽이었다.
이로써 디귿 자 형태의 포위 진영이 만들어졌다.
민우는 카메라를 들고 박격포가 배치된 언덕에 올라갔다.
이 시대로 넘어와 처음으로 벌어지는 큰 전투, 또 앞으로 지긋지긋하게 간도 땅에서 싸워야 할 마적 집단과의 첫 조우.
총을 잡은 해병대원들과 마찬가지로 민우의 가슴도 긴장과 흥분으로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간도진위대』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