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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저, 꽃이 필요하시다면 저쪽에 있구요. 지금 보고 계신 쪽은 다육식물이에요. 햇볕과 통풍만 챙겨 주면 비교적 쉽게 키울 수 있어서…….”
인기가 많습니다, 라고 하려 했다. 하지만 남자는 지우에게 말을 끝맺을 여유도 주지 않고 선인장 화분을 하나 들더니 계산대로 걸어갔다.
와, 나 방금 무시당했어.
평소 겪기 힘든 일에 지우의 표정이 멍해졌다.
반면 잽싸게 계산대로 달려간 아영은 눈을 빛내며 화분을 봉투에 담았다.
꽃집 아르바이트 4개월차. 언제쯤 분갈이해 주는 게 좋고, 물은 선인장 아래가 쪼글쪼글해질 때쯤 주는 게 적당하다, 같은 설명이 술술 나왔다.
참 다행이었다. 지우 대신 접객할 사람이 가게에 한 명 더 있다는 게. 왜냐하면 지우는 손님이 나갈 때까지 입도 벙긋하지 못했으니까.
“헐, 대박, 대박. 언니 완전 재수!”
스물두 살 아영이 또래 친구들과 쓰는 단어를 한껏 시전하며 지우에게 다다다 달려왔다. 두 볼이 흥분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이 동네에 저런 사람도 살았어요? 옷차림 보면 인근 주민인 것 같은데. 우씨, 왜 난 여태 한 번도 못 봤지?”
지우도 저런 손님은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저렇게 지우를 대놓고 무시하는 사람 말이다. 저건 단순히 내성적이라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아니, 저렇게 ‘보란 듯이’ 무시하는 사람도 있어?
그게 시작이었다. 좀처럼 말 붙이기 어려운 남자 손님은 이후로 일주일에 세 번씩 꽃집을 들러 그때마다 화분을 사 갔다.
식물을 선택하는 기준도 대중없었다. 초기엔 조그만 다육식물들을 꾸준히 사 가기에 그런 유를 추천했더니 다음번엔 뜬금없이 허브 모종을 택했다.
로즈마리, 애플민트, 레몬밤, 카모마일 등 ‘Song’에서 파는 모든 허브를 차례로 격파한 남자는 갑자기 레벨을 훌쩍 올려 지우의 가슴까지 오는 치자나무 화분을 구입하기도 했다.
도대체 남자의 정체가 뭘까? 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지우 하나뿐인 것 같았다.
아영은 그저 잘생긴 손님을 자주 볼 수 있어서 좋아했고, 남동생에게도 물어봤지만 ‘식물성애자?’ 같은 대답이나 들었을 뿐이다.
무슨 일을 하기에 그렇게 많은 식물들이 필요한 걸까? 차라리 화원 같은 데서 대량 주문하는 게 더 저렴할 텐데.
그렇게 찜찜한 기분이 쌓이고 쌓여 결국 오늘에 이르렀다. 곧 오후 2시가 된다. 언제나 ‘여기’, 한마디밖에 하지 않는 의문의 남자 손님은 시간 하나는 칼같이 지켰다.
“허브는 잘 자라고 있냐고 물어보는 게 좋겠어.”
바로 다음 순간, 맑은 풍경 소리와 함께 유리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점심용 샌드위치를 사러 나가던 아영이 몹시 아쉬운 눈을 하며 남자와 스쳐 지나갔다. 이로써 아군을 잃었다.
샌드위치를 파는 카페는 걸어서 10분 거리. 즉석에서 만드는 시간까지 합치면 아영이 돌아오기 전에 모든 일이 끝난다.
남자는 오늘도 아무 말 없이 가게 안을 슥 훑다가 구석에 곱게 자리한 난초 화분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으아악, 이번엔 난초인가요? 지우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린 채 남자가 계산대 쪽으로 오길 기다렸다.
“여기.”
남자가 계산대 위에 내려놓은 것은 연자줏빛 꽃을 피운 카틀레야였다. 난의 여왕이라 불리는 카틀레야는 빛깔과 모양이 다양해 많은 사랑을 받는 양란이다.
향기 또한 은은해서 지우가 ‘연홍 아가씨’라고 따로 이름 지어 줄 만큼 그녀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이만 오천 원입니다.”
남자가 무신경하게 카드를 내밀었다. 단말기에 카드를 긁고 서명을 부탁하면서 지우는 카틀레야에게 눈길을 주었다.
무서워요, 언니. 이 사람 따라가기 싫어요.
훌쩍이며 우는 카틀레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지우의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이건 마치 어린 여동생을 음흉한 늙은이에게 시집보내는 기분이다.
아, 미치겠어. 너무너무 신경에 거슬려. 이 남자는 얘 이름이 뭔지나 알고 데려가는 걸까?
지우는 손잡이가 달린 비닐 가방에 카틀레야를 조심히 담으면서 당부하는 심정으로 설명했다.
“난의 여왕이라 불리는 카틀레야입니다. 건조에 강한 난초라 한 달간 물을 주지 않아도 살 수 있어요. 물을 너무 많이 주면 뿌리가 썩어 죽을 수도 있으니 매일 소량씩 분무해 주시면 됩니다. 또 햇빛을 좋아하지만 직사광선은 피해 주시구요.”
설명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는 게 빤히 보였다. 돌려받은 카드를 가죽 지갑에 넣고 아무 말 없이 가방까지 건네받았다. 이제 남은 건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뿐이다.
아아, 송지우 선수. 링 위에 오르나요?
“저기.”
다급한 마음에 지우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몸을 돌리려던 남자가 그대로 멈췄다. 날카로운 눈매가 지우를 향하자 ‘뭐야?’ 하는 짜증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냥 영수증 얘기나 할까.
“저.”
그런 지우가 용기를 내게 만든 건 가방에 담겨 팔려 가는 어린 아가씨, 아니, 카틀레야의 모습이었다. 기분 탓인지 벌써부터 꽃잎이 좀 시들해진 것 같다.
“허, 허브는 잘 자라고 있나요?”
좋아. 자연스러웠어. 말을 좀 더듬긴 했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엉뚱한 말이 아니라 미리 준비했던 문장이 나온 것에 지우는 소소한 만족감을 느꼈다.
“꾸준히 구입해 주셨는데 그간 한 번도 여쭤 보질 못했네요. 허브랑 다육식물들은 다 잘 지내는지, 혹시 키우시는 데 불편함은 없는지…….”
지우의 말이 다 끝났는데도 남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지우의 답답함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쯤 돼서야 한마디 툭 내뱉었다.
“이 집 식물들, 하나같이 변변치 못해.”
“네?”
지우가 얼떨결에 반문했다. 방금 뭔가 납득이 안 되는 소릴 들은 것 같은데.
“반은 죽었고 반은 죽어 가. 이 정도면 심각한 품질 불량 아닌가.”
“잠깐만요, 손님. 벌써 절반이 죽었다고요?”
남자가 첫 선인장을 사 간 게 한 달 반이 됐다. 물 주기에 실패했다고 해도 절반이나 죽어 버릴 기간은 아닌데! 혹시 이 사람, 마이너스의 손인가?
지우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손대는 것마다 죽이고 망쳐 버리는 비운의 주인공들이 가끔 있긴 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절반은 너무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심한 건 품질 불량이라며 이쪽에 뒤집어씌우는 남자의 태도였다.
품질 불량이라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젊은 아가씨가 하는 꽃집이 얼마나 가겠느냐는 주위의 우려를 1년 만에 잠재운 데엔 불철주야 정성을 쏟아부은 지우의 노력이 있었다.
눈이 충혈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고, 좋은 모종을 얻기 위해서라면 지방까지 달려갔다. 처음엔 웬 물정 모르는 아가씨가 기웃거리나 했던 농장주들도 이젠 지우를 위해 실한 모종을 따로 챙겨 놓을 정도였다.
정말 열심히 했고 그만한 자부심이 있었다. 비록 가게는 크지 않아도 근교 화원 부럽잖게 튼튼히 관리한 아이들이었다.
내 꼬마들. 좋은 인연이 닿을 때까지 사랑으로 보듬어 줄게. 그때까지 우리 함께 잘 지내 보자. 매일 아침, 잎을 닦아 주고 물을 줄 때마다 지우는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런데 남자는 자신의 노력을 깡그리 무시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설명도 듣는 둥 마는 둥 마구잡이로 사 가 놓고선, 그 예쁜 아이들을 다 죽여 버렸다.
“여기 망하지 않는 게 신기하네.”
뭐라고, 이 살인마야?
지우는 머리끝까지 폭발하는 분노를 참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 때문에 발음이 좀 불분명하게 나왔다.
“아마 관리법이 좀 까다로운 부분도 있을 거예요. 저희 가게는 A/S까지 책임지니까 화분을 가져오시면…….”
“못 들었어, 아가씨? 죽어 가는 게 절반이라니까, 절반. 내가 사 간 화분이 몇 갠데 그걸 어떻게 다 들고 와?”
한 번 터진 입, 망발을 멈추지 않는구나.
지우는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을 용케 참으셨다고 깐죽거리고 싶은 걸 누르느라 애썼다. 이성을 되찾자, 송지우. 말썽 고객이 처음은 아니잖아.
“사실 이…… 카틀레얀지 뭔지도 좀 의심스럽군. 집에 가져가자마자 꽃이 떨어지는 건 아니겠지.”
“손님이 억지로 따시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두 쌍의 눈이 마주쳤다. 이제부턴 기 싸움이다. 하얗고 조그만 지우와 올 블랙 남의 팽팽한 접전이 이뤄졌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싸움은 아영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계속됐다.
“어, 아직 안 가셨어요?”
아영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우는 거기에 답하는 대신 벽시계를 힐끔 본 뒤 누군가 들으란 듯 말했다.
“아영아, 나 잠시 사후 관리 나갔다가 올게.”
“사후 관리요?”
우리 가게에 그런 것도 있었냐는 말투다. 지우는 개의치 않고 영양제며 모종삽, 비료, 장갑 등을 챙겼다. 의사에게 왕진 가방이, 기술자에게 공구함이 있다면 지우에겐 이것들이 외출용 준비물이었다.
“우리 가게에서 사 간 식물이 벌써 절반이나 죽었다지 않니. 아주 철저하게! 책임과 도리를 다해 드려야지. 그게 ‘Song’의 신조니까.”
지우가 고개를 홱 돌리며 남자에게 물었다.
“혹시 댁까지 거리가?”
“걸어서 15분.”
“가깝네요. 대충 한 시간쯤 자리 비운다고 생각하고 있어.”
“예에…….”
아영이 전혀 수긍이 가지 않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 많은 식물을 벌써 절반이나 죽였다는 사실이 놀라운 건지, 아니면 지우가 직접 남자 집까지 간다는 것이 당황스러운 것인지. 둘 중 어느 쪽인지는 지우도 단정 지을 수가 없었다.
“앞장서시죠.”
남자가 유리문을 열고 나갔다. 그는 바로 뒤에 지우가 따라 나오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문을 잡아 주는 배려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지우는 하마터면 이마를 박을 뻔했고 남자의 등을 잔뜩 째려보는 걸로 분풀이를 대신했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앞장서랬다고 정말 몇 발치 앞에 서서 정면만 보고 갔다. 모퉁이에서 배달 오토바이가 제법 빠른 속도로 튀어나왔을 때 예의상 할 법한 ‘조심해’ 같은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지우를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흙과 비료를 담은 가방 때문에 어깨가 뻐근해졌으나 지우는 앞에 걸어가는 남자가 괘씸해서라도 힘든 티를 내기 싫었다. 좀 천천히 가자는 말을 해 봤자 돌아오는 건 코웃음뿐일 텐데 누구 좋으라고 그럴까.
대신 지우는 이마에 살짝 배어 나온 땀을 손등으로 훔치고, 목에 두른 민트색 스카프를 끌러 한 손에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