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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cm 선인장





1화

프롤로그





폰이 진동했다. 남자는 메시지를 확인한 뒤 짧은 답장을 보내고 손에 든 파일로 시선을 옮겼다. 지난밤에도, 지지난밤에도 몇 번이고 확인한 서류다.
그는 자신의 일에 대단히 진지했고 작은 실수 하나 나오지 않도록 치밀하게 행동했다.
바삐 움직이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파란 캐노피 지붕의 꽃집이 눈에 들어왔다. 이쪽 길은 지하철역으로 가긴 가되 좀 둘러 가는 길이다. 이 동네에서 한두 해 산 것도 아니고 실수로라도 둘러 가는 길을 택할 리 없다.
스스로가 원한 게 아닌 이상 말이다.
남자는 그제야 자신이 꽃집 안에 있을 사람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신경 쓴다 뿐인가. 힘들었던 지난 몇 주 동안 가장 많이 떠오른 사람이 ‘그 직원’이었다.
이름도 모르고 아직 저곳에서 일하는지조차 불확실하다. 당장 다음 날이라도 그만두곤 하는 아르바이트생이 많으니까.
그래도 한 번은 들러 볼까.
남자는 괜히 목이 메었다. 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지만 아직 떨어지지 않은 감기 기운 때문에 목소리가 형편없었다. 안 그래도 저음인데 지금은 완전히 동굴 안에서 울리는 소리 같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마스크를 꺼내 썼다.
너, 겁먹은 거야?
남자의 안에서 또 다른 그가 비웃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비슷한 생각 중이었다.
이건 마치…… 상대에게 마음을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남자애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런 건 일곱 살 때 졸업한 줄 알았는데.
차라랑, 유리문을 열자 풍경 소리가 그를 맞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인사말.
“어서 오세요.”
그녀였다. 지붕과 똑같은 파란색 앞치마를 두른 그녀가 환히 웃으며 다가왔다. 하얀 얼굴에 폭 패는 보조개가 귀여운 인상이었다.
“어떤 걸 찾으시나요, 손님?”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는데 기침이 터져 나왔다. 처음엔 잔기침인 줄 알았으나 하다 보니 기관지가 자극되었는지 결국 가슴이 울리도록 큰 기침을 하고 말았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 기침은 가라앉았지만 그는 이미 몸을 돌려 가게를 나가고픈 심정이었다. 잠깐 눈길을 돌리고 있던 그녀가 무척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요즘 부쩍 감기 환자가 늘어난 것 같아요. 저도 며칠 전에야 코맹맹이 소리를 면했어요.”
그러면서 로즈마리니 페퍼민트 따위의 허브를 권했다. 말려서 차로 우려도 좋고 생잎 그대로 써도 향긋함을 즐길 수 있다며 한동안 재잘재잘 설명했다.
얼마 전에야 감기가 떨어졌다는 말은 거짓일 것이다. 무안해하는 남자를 위로하려고 꺼낸 말이 분명했다.
여자의 목소리는 맑고 또렷해서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울린 풍경 소리 같았다. 듣기가 좋았다.
그래서 그는 여자가 조금 의아함을 느낄 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자신이 곧 비즈니스 미팅에 참석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 파트너를 만나는 자리에 허브 모종을 들고 가는 건 너무 뜬금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열심히 설명해 준 여자를 두고 빈손으로 나가긴 싫었다. 어쨌든 그는 여자에게 ‘빚진’ 입장이므로 가게 매상에 약간이나마 보탬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남자는 어정쩡한 손가락으로 장미 쪽을 가리켰다. 여자의 얼굴이 다른 의미로 밝아지더니 대번에 색깔을 물어 왔다.
자신은 수줍은 핑크빛 장미를 가리킨 모양이다. 여자가 작업대로 가져가 포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제야 자신이 고른 색깔이 눈에 들어왔다. 대낮에 핑크빛 장미 스무 송이라니.
아무리 얼떨결에 골랐다 해도 이건 좀 심하다. 모종을 들고 가는 것보다 훨씬 이상하게 되었으니 지하철역 가는 길에 적당히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여자 친구분께 드릴 건가 봐요. 점심시간에 잠깐 나오신 건가요?”
이 주변엔 여자에게 꽃다발 선물을 하기 위해 점심시간을 쪼개는 멍청이들이 제법 많은가 보다. 남자는 딱히 대답하지 않고 지갑을 꺼냈다.
“로맨틱해요.”
달콤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지갑을 열던 손이 멈췄다.
“솔직히 부끄러워하는 남자분들이 많으시잖아요. 특별한 시즌도 아닌데 남자가 꽃다발을 들고 다니면 아무래도 주위 시선이 모여들고. 저도 이해는 돼요.”
그래서 더 로맨틱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여자가 장식을 마친 꽃다발을 넘겨주었다. 요란하게 망사를 두른 시중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었으면 그녀에 대한 고마움과는 별개로 버리려 했는데 연갈색 영자 신문 포장이 깔끔했다.
이러면 마음이 좀 약해진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계산이 끝나자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미소 지었다. 지난번엔 보지 못한 미소가 참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더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을 애써 접으며 돌아서던 그는 여자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오늘은 그때와 달리 검은 슈트에 회색 반코트 차림이다. 여자가 그를 점심시간에 나온 직장인으로 오해한 것도 당연했다.
“……여자 친구 없습니다.”
충동적인 대꾸였다.
“점심시간에 잠깐 나온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찌 들으면 시비 거는 것 같기도 한 그의 말에 여자가 당황한 듯 입을 다물고 있더니 이내 생긋 웃어 보였다.
“네, 그렇다고 좋은 하루를 보내지 말란 법은 없잖아요?”
남자는 꽃다발을 든 채 문을 나섰다. 걷다 보니 어느 순간 답답해져 마스크를 벗었다. 185cm에 눈에 띌 만큼 수려한 외모의 그가 장미 꽃다발을 들고 걷는 모습은 모두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평소라면 힐끔거리는 시선이 신경 쓰였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그는 회사 건물에 다다르기 직전까지 그녀의 말을 되뇌느라 조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 목소리, 눈빛, 향기, 밤갈색 머리카락, 가지런한 치아, 그리고 미소.
그 미소를 마주한 순간 남자는 오랫동안 막혔던 숨길이 틔는 것만 같았다.
“작가님, 반갑습니다! 지난주보다 훨씬 좋아 보이시네요. 한데 이 꽃다발은…….”
“제 겁니다.”
남자는 행여 상대가 뺏어 가기라도 할까 차갑게 잘라 말했다. 그리고 속으로 다시 한 번 말해 보았다. 이건 내 거라고.
내 것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는 누군가의 상냥하던 미소까지 제 것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정말 너무도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누군가가 이토록 갖고 싶은 적은 처음이었다.





Chapter 1 수상한 손님과 인질극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해야겠어.
지우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통유리창을 내다보며 결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맞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오면, 화분을 계산대로 가져오길 기다렸다가 조용히 말을 건네는 거다.
지금 제 식물들 가지고 뭘 하시는 건가요?
“아니야, 그건 너무 공격적이잖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해선 안 된다고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이름도, 사는 곳도 모르는 그 손님은 첫눈에 ‘건드리면 죽는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좀 더 나긋나긋하게,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아르바이트생 아영이 이상한 눈으로 지우를 쳐다보았다. 아침부터 사장 언니의 태도가 영 수상하더니 이제는 혼잣말까지 하는구나, 싶을 거다.
보는 사람 눈이 다 상쾌해지는 파란 캐노피 지붕의 꽃집 ‘Song’, 그곳의 주인인 송지우가 이러는 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한 달하고도 보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차라랑, 하는 맑은 풍경 소리가 들리자 지우는 하던 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상냥한 인사말을 건넸다.
다른 가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지우는 손님들에게 몇 초간 여유를 주곤 했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득달같이 달려가지 않는다, 한숨 돌릴 여유를 드리고 편안하게 다가간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지우가 꼭 지켜 온 신조였다. 제 가게가 손님들에게 편안한 장소가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날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노트북으로 장부를 맞춰 보던 지우는 저장 버튼을 클릭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특별히 찾으시는 게…….”
있나요, 하는 뒷말은 목구멍 안으로 쑥 들어갔다. 꽃집을 오픈한 지 1년째. 그간 다양한 손님을 대했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올 블랙(All Black).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이었다.
나름 평균에 가깝다 자부해 온 지우를 유치원생처럼 느끼게 만드는 키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창백한 안색, 그늘진 눈가.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쌀쌀한 2월 말, 다소 얇아 보이는 검은색 야상이 눈길을 끌었다.
블랙진에 약간 낡은 듯한 검은색 워커까지 더하면 함부로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 완성이다. 아영은 커다래진 눈으로 연신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헐, 대박. 언니, 저 손님 완전 섹시해요. 미친 색기!
마지막 단어는 발음에 다소 유의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 지우도 멀쩡하게 눈이 달려 있으니까 손님이 잘생겼다는 것쯤은 파악했다.
문제는 온몸에서 ‘나 건드리지 말라’는 오라가 뿜어져 나온다는 거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간 한 대 맞을 것 같아.
지우는 손님을 향해 쭈뼛쭈뼛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