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그리고 이제 공작이 알게 된 거예요.”
레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페트론에게 복수할 방법을!”
백작은 왕성한 정력가답게 3남 3녀를 두었다. 그가 자식 중에서도 아름답고 영특한 막내딸 스칼렛을 가장 총애한다는 소문이 일대에 자자했다.
가문의 독자적인 향수를 개발하게끔 시킨 것도 스칼렛이었다. 하긴 아무리 부를 일구는 일환이라도 검을 휘두르는 백작의 머리에서 향수 사업이 나오기란 힘든 일이었다.
젊은 공작은 2년 동안 적의 소중한 보물이 곱게 자라길 기다렸다. 막내딸과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백작의 사랑도 깊어지길 빌었다.
더없이 귀한 존재가 되었을 때 낚아채어 가 철저히 짓밟아 줄 셈이었다.
죽은 연인이 당했던 고통 그 이상을 맛보여 주리라!
“백작이 이토록 승승장구하게 된 배경엔 스칼렛의 머리와 어머니의 점술이 있죠. 그는 둘 다 놓을 생각이 없어요. 그래서 역으로 꾀를 쓰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전 죽어요. 죽을 거예요. 겨우 스무 해밖에 살지 않았는데!”
“레나.”
흥분한 나머지 횡설수설하는 딸을 유벤타가 가로막았다. 그녀는 일단 딸에게 심호흡을 시킨 뒤 말을 이었다.
“요즘 내 기분이 꺼림칙하다고 말했었지. 좀처럼 드문 일이었단다. 난 미구엘과 이야기를 한 다음 점을 쳐 보았어. 우릴 위해서 점을 친 적은 정말 오랜만이었지.”
유벤타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는 아이를 달래는 자장가와도 같았다. 위급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덕분에 레나의 가쁜 숨이 차츰 가라앉았다.
“너의 미래에서 화염을 보았다. 환상 속 바람결에선 피비린내가 진동했어.”
유벤타는 그것 보라며 입을 열려는 딸에게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인지시켰다.
“흰 방패와 장미가 새겨진 감청색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고, 너는 그곳에 여신처럼 서 있었어.”
“……그건 아미티지의 문장이에요.”
유벤타의 점괘는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나는 거기서 죽는구나. 결국 전쟁의 불씨가 되어 공작의 성에서 불에 타 죽겠구나. 레나의 눈이 두려움으로 흐려졌다.
하지만 유벤타의 다음 말엔 기묘한 힘이 실려 있었다.
“그래, 그건 아미티지의 문장이지.”
그녀가 딸을 또렷이 응시했다.
“거기서 넌 살아 있었어.”
레나는 어머니가 왜 이처럼 힘을 주어 말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본 미래의 그 순간에는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을 기다리는 건 죽음이 아닐까.
다른 곳도 아닌 전쟁터다.
검을 휘두르긴커녕 방패도 제대로 못 드는 자신이 살아남을 리가 없지 않나.
그러나 유벤타는 확고했다.
“너는 거기 가서야 살아 있을 수 있었어.”
“……그럼 다른 선택을 하면 죽는다는 소린가요?”
아무리 유벤타라도 딸의 죽음을 입에 담기는 싫은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나도 겁이 나서 이런저런 경우를 점쳐 봤다. 당시엔 네가 왜 아미티지 공작가에 가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별별 경우를 짜내야 했어. 어딘가로 도망을 간다든가, 미리 결혼을 시킨다든가……. 결과는 다 같았다. 모두 검고 검은 어둠뿐이었지.”
레나의 손에서 단도가 떨어졌다. 낡은 마룻바닥에 딱딱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가 퍼졌다.
대역 신부가 되라는 명령만으로도 땅이 꺼질 것 같았는데, 이젠 그렇게 해야만 자신이 살 수가 있단다.
비틀거리던 레나가 간신히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건 사자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거나 다름없네요.”
이보다 알맞은 비유가 있을까.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슬픈 얼굴로 자리를 지키던 아버지가 나직하게 말했다.
“승리의 신은 종종 사자의 모습으로 현신하시지. 너의 사자가 그분이길 기도하자꾸나.”
* * *
레나는 언제나 어머니의 신비한 능력을 믿어 왔다. 어머니의 점괘는 빗나가는 법이 없었는데, 미래를 엿볼 수 있다고 해서 함부로 능력을 남용하지 않는다는 점도 왠지 믿음이 가는 부분이었다.
영지 사람들도 의식에 임하는 집시 여인을 돌팔이 점쟁이라 얕보지 않았다. 유벤타가 점술을 행할 때의 신중하고 엄숙한 모습을 보면 누구나 숨을 죽이게 되어 있었다.
보이는 대로 말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간의 지혜를 이용해 뜻을 풀이했다.
유벤타는 레나가 자랄 동안 그런 식으로 큰 사고를 막아 왔다. 어머니가 알려주지 않은 사건은 그녀가 예견하지 못했다기보다, 당시 점을 쳐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레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의심 없이 믿어 왔는데.
레나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정신없이 집안일을 하다가도 백작의 위협만 떠올리면 기분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점괘도 자꾸만 곱씹게 되었다.
점괘는 틀리지 않아. 적어도 지금까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잖아. 이번에도 어머니의 말이 맞을 거야.
“하아…….”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막상 닥쳤을 때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렇게나 다를 줄이야. 늘 어머니의 점을 믿고 의지해 왔는데 이번만큼은 정말 원망스러웠다.
레나는 썩은 밧줄에라도 매달리는 심정으로 자꾸 ‘만약’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만약 어머니가 작지만 중요한 무언가를 놓쳤다면, 혹은 어머니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뜻이 숨어 있다면.
계속 미련이 남았다.
하지만 두려움에 얽매여 있는 건 레나뿐인 듯, 부모님은 이미 마음의 평안을 찾은 상태였다. 이별의 날이 너무 빨리 찾아온 것에 대해선 당혹스러워했지만 그들의 흔들림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레나가 살 수 있다는 점괘에 크게 안심했다. 그 때문에 레나가 아무리 다른 방안을 제시해 보려 해도 잔잔히 웃을 뿐이었다.
당장 겁은 나겠지만 괜찮을 거다. 결국엔 괜찮아질 게야. 위로의 말을 건네며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 수양이 아직 부족한 걸까요. 결국엔 잘 풀린다고 하셔도 전 거기까지의 과정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는데.”
아, 이제 그만.
레나는 그쯤에서 번뇌를 멈췄다. 이러다간 망상과 한숨으로 남은 시간을 보낼 판이었다.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뺨을 두드렸다. 걱정과는 별개로, 또 다른 레나를 불러낼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레나의 머리를 물기 직전의 사자가 신이길 빌자고 하셨다. 좋은 말씀이었다. 정말 힘이 됐다. 하지만 레나는 그것보다 좀 더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사자보다 한 발 앞서 녀석의 목을 찔러 버리는 것이다.
미처 입을 다물 새가 없도록. 그래, 이왕이면 목을 통째로 잘라 내는 것도 좋겠지. 백작이 홀에 장식해 둔 징그러운 박제품처럼 말이야. 으으.
그러나 원통하게도 레나에겐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자신은 아미티지 공작처럼 전쟁의 신도 아니고, 페트론 백작처럼 부를 축적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쓸데없이 반반하기만 해서 버리는 패로 쓰이고 마는 집시의 딸.
그런 레나가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사자를 꾀어 보는 수밖에.”
대담하다면 참으로 대담한 방법이었다.
공작은 안 그래도 차가운 사람이 약혼녀를 잃으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바뀌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전에도, 그 이후로도 숱한 미녀들이 연인을 자처했으나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생의 이유를 잃은 사람이 얼마나 무서울지 레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이 복수의 칼을 꺼내 들었다니. 그건 더 생각하기 싫었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살고 싶어. 정말 살고 싶어. 이대로 가만히 기다리는 건 말도 안 돼.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살 권리를 고스란히 반납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어머니가 들었으면 행여 밖에서 입도 벙긋 말라 했을 위험한 사상이었다.
레나의 내면에는 두 가지가 공존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집시의 영혼과 여느 귀족 자녀 못지않은 독서에서 온 지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부모님은 딸에게 지식만이 몸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라고 가르쳤다.
덕분에 레나는 귀족 레이디 사이에서 유행하는 로맨스 소설부터 감히 여자에게 허락되지 않는 철학 사상, 윤리, 약제학, 넓게는 동방에서 건너온 지식까지 고스란히 접할 수 있었다.
나라에선 지방 귀족과 중급 신분을 위해 각 영지마다 도서관을 설립토록 권장했다. 국왕의 관심을 끌고 싶은 백작이 누구보다 호화로운 도서관을 지었음은 두말할 것 없었다.
“설마, 스칼렛인 척하고 책 빌렸던 죗값을 이렇게 치르는 건 아니겠지?”
레나는 순간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부르르 떨었다.
안 된다. 괴이하고 허튼 망상으로 정신을 흩트려선 곤란하다. 레나야, 더 이상의 잡생각은 금지라고 했지? 그녀는 다시금 주의를 일깨웠다. 공작의 대리인 일행이 예비 신부를 맞으러 오기까지 앞으로 보름.
주어진 짧은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이냐가 자신의 앞날을 좌우할 터였다.
마음을 단단히 먹자 잠시 억눌러졌던 그녀의 장점이 만개하는 꽃처럼 피어났다.
부모님도 인정하고, 빵집 아저씨도 인정하고, 깐깐하기 그지없는 푸줏간 할아버지마저 인정한 레나의 장점!
기민함! 대담함! 무한의 긍정!
레나는 우선 백작이 대역 신부 준비에 손톱만큼의 노력도 할 의사가 없음을 파악했다. 하다못해 레이디로서의 예절 정도는 가르쳐 주리라 기대했는데, 그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나마 해 준 거라곤 새 드레스를 두 벌 맞춰 준 것.
“두 벌이라니, 짜기도 하지.”
백작이 가진 재산이 얼만데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었다. 게다가 아무리 죽으러 가는 자리라고 해도 대놓고 ‘실수해서 죽으렴’ 하며 비는 티가 난단 말이다.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레나는 드레스를 벗는 척하면서 입고 온 낡은 망토 아래로 한 벌을 감췄다. 백작의 성을 빠져나오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레나는 망토 안에 아름다운 하늘빛 드레스를 입은 채로 홍등가의 문을 두드렸다.
소싯적 귀족 저택에서 일했다는 마담이 레나를 맞았다.
“이 드레스를 드리죠.”
레나는 망토를 홱 벗어젖히며 마담에게 제안했다.
“영주님이 주신 물건이니 얼른 팔아 치우는 게 좋아요. 오늘까지 딱 두 번 입었고요. 40골드는 넉넉히 받을 거예요. 그 이하로 주겠다고 하면 가랑이를 차 버리세요.”
“……개인적으로 아가씨가 거래 상품이었으면 더 흥미로웠을 텐데.”
입가에 애교점을 찍은 마담이 요염하게 웃었다. 역시 온갖 사람이 드나드는 가게 주인이라 그런지 영주의 물건이라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레나는 마담의 배짱이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그녀가 벌일 일은 말 그대로 엄청난 배짱을 필요로 하는 거니까.
“그래, 40골드에 상응하는 무엇을 원하나요?”
“레이디요.”
열의로 가득 찬 눈이 어둑한 실내에서 반짝거렸다.
“기간은 보름. 그동안 귀족 레이디가 웃는 법, 말하는 법, 걷는 법, 먹는 법을 모조리 가르쳐 주세요. 이유는 묻지 말고.”
“마지막 말은 필요 없을 뻔했네요. 우리 가게는 ‘질문’과 거리가 멀거든.”
마담이 레나의 자질을 평가하듯 천천히 주변을 돌면서 아래위를 훑었다. 백작의 시선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레나의 속치마까지 들춰 볼 기세였던 그녀는 여전히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웃었다.
“보름이라고 설렁설렁 가르칠 마음은 없어요. 각오 단단히 해 두는 게 좋을 거예요, 아가씨.”
그리고 마담의 으름장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속성으로 진행되는 수업 도중에 새신랑 유혹하는 법까지 얼떨결에 배운 건 예상 밖이지만.
“그리고 이제 공작이 알게 된 거예요.”
레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페트론에게 복수할 방법을!”
백작은 왕성한 정력가답게 3남 3녀를 두었다. 그가 자식 중에서도 아름답고 영특한 막내딸 스칼렛을 가장 총애한다는 소문이 일대에 자자했다.
가문의 독자적인 향수를 개발하게끔 시킨 것도 스칼렛이었다. 하긴 아무리 부를 일구는 일환이라도 검을 휘두르는 백작의 머리에서 향수 사업이 나오기란 힘든 일이었다.
젊은 공작은 2년 동안 적의 소중한 보물이 곱게 자라길 기다렸다. 막내딸과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백작의 사랑도 깊어지길 빌었다.
더없이 귀한 존재가 되었을 때 낚아채어 가 철저히 짓밟아 줄 셈이었다.
죽은 연인이 당했던 고통 그 이상을 맛보여 주리라!
“백작이 이토록 승승장구하게 된 배경엔 스칼렛의 머리와 어머니의 점술이 있죠. 그는 둘 다 놓을 생각이 없어요. 그래서 역으로 꾀를 쓰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전 죽어요. 죽을 거예요. 겨우 스무 해밖에 살지 않았는데!”
“레나.”
흥분한 나머지 횡설수설하는 딸을 유벤타가 가로막았다. 그녀는 일단 딸에게 심호흡을 시킨 뒤 말을 이었다.
“요즘 내 기분이 꺼림칙하다고 말했었지. 좀처럼 드문 일이었단다. 난 미구엘과 이야기를 한 다음 점을 쳐 보았어. 우릴 위해서 점을 친 적은 정말 오랜만이었지.”
유벤타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는 아이를 달래는 자장가와도 같았다. 위급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덕분에 레나의 가쁜 숨이 차츰 가라앉았다.
“너의 미래에서 화염을 보았다. 환상 속 바람결에선 피비린내가 진동했어.”
유벤타는 그것 보라며 입을 열려는 딸에게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인지시켰다.
“흰 방패와 장미가 새겨진 감청색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고, 너는 그곳에 여신처럼 서 있었어.”
“……그건 아미티지의 문장이에요.”
유벤타의 점괘는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나는 거기서 죽는구나. 결국 전쟁의 불씨가 되어 공작의 성에서 불에 타 죽겠구나. 레나의 눈이 두려움으로 흐려졌다.
하지만 유벤타의 다음 말엔 기묘한 힘이 실려 있었다.
“그래, 그건 아미티지의 문장이지.”
그녀가 딸을 또렷이 응시했다.
“거기서 넌 살아 있었어.”
레나는 어머니가 왜 이처럼 힘을 주어 말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본 미래의 그 순간에는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을 기다리는 건 죽음이 아닐까.
다른 곳도 아닌 전쟁터다.
검을 휘두르긴커녕 방패도 제대로 못 드는 자신이 살아남을 리가 없지 않나.
그러나 유벤타는 확고했다.
“너는 거기 가서야 살아 있을 수 있었어.”
“……그럼 다른 선택을 하면 죽는다는 소린가요?”
아무리 유벤타라도 딸의 죽음을 입에 담기는 싫은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나도 겁이 나서 이런저런 경우를 점쳐 봤다. 당시엔 네가 왜 아미티지 공작가에 가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별별 경우를 짜내야 했어. 어딘가로 도망을 간다든가, 미리 결혼을 시킨다든가……. 결과는 다 같았다. 모두 검고 검은 어둠뿐이었지.”
레나의 손에서 단도가 떨어졌다. 낡은 마룻바닥에 딱딱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가 퍼졌다.
대역 신부가 되라는 명령만으로도 땅이 꺼질 것 같았는데, 이젠 그렇게 해야만 자신이 살 수가 있단다.
비틀거리던 레나가 간신히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건 사자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거나 다름없네요.”
이보다 알맞은 비유가 있을까.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슬픈 얼굴로 자리를 지키던 아버지가 나직하게 말했다.
“승리의 신은 종종 사자의 모습으로 현신하시지. 너의 사자가 그분이길 기도하자꾸나.”
* * *
레나는 언제나 어머니의 신비한 능력을 믿어 왔다. 어머니의 점괘는 빗나가는 법이 없었는데, 미래를 엿볼 수 있다고 해서 함부로 능력을 남용하지 않는다는 점도 왠지 믿음이 가는 부분이었다.
영지 사람들도 의식에 임하는 집시 여인을 돌팔이 점쟁이라 얕보지 않았다. 유벤타가 점술을 행할 때의 신중하고 엄숙한 모습을 보면 누구나 숨을 죽이게 되어 있었다.
보이는 대로 말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간의 지혜를 이용해 뜻을 풀이했다.
유벤타는 레나가 자랄 동안 그런 식으로 큰 사고를 막아 왔다. 어머니가 알려주지 않은 사건은 그녀가 예견하지 못했다기보다, 당시 점을 쳐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레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의심 없이 믿어 왔는데.
레나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정신없이 집안일을 하다가도 백작의 위협만 떠올리면 기분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점괘도 자꾸만 곱씹게 되었다.
점괘는 틀리지 않아. 적어도 지금까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잖아. 이번에도 어머니의 말이 맞을 거야.
“하아…….”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막상 닥쳤을 때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렇게나 다를 줄이야. 늘 어머니의 점을 믿고 의지해 왔는데 이번만큼은 정말 원망스러웠다.
레나는 썩은 밧줄에라도 매달리는 심정으로 자꾸 ‘만약’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만약 어머니가 작지만 중요한 무언가를 놓쳤다면, 혹은 어머니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뜻이 숨어 있다면.
계속 미련이 남았다.
하지만 두려움에 얽매여 있는 건 레나뿐인 듯, 부모님은 이미 마음의 평안을 찾은 상태였다. 이별의 날이 너무 빨리 찾아온 것에 대해선 당혹스러워했지만 그들의 흔들림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레나가 살 수 있다는 점괘에 크게 안심했다. 그 때문에 레나가 아무리 다른 방안을 제시해 보려 해도 잔잔히 웃을 뿐이었다.
당장 겁은 나겠지만 괜찮을 거다. 결국엔 괜찮아질 게야. 위로의 말을 건네며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 수양이 아직 부족한 걸까요. 결국엔 잘 풀린다고 하셔도 전 거기까지의 과정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는데.”
아, 이제 그만.
레나는 그쯤에서 번뇌를 멈췄다. 이러다간 망상과 한숨으로 남은 시간을 보낼 판이었다.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뺨을 두드렸다. 걱정과는 별개로, 또 다른 레나를 불러낼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레나의 머리를 물기 직전의 사자가 신이길 빌자고 하셨다. 좋은 말씀이었다. 정말 힘이 됐다. 하지만 레나는 그것보다 좀 더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사자보다 한 발 앞서 녀석의 목을 찔러 버리는 것이다.
미처 입을 다물 새가 없도록. 그래, 이왕이면 목을 통째로 잘라 내는 것도 좋겠지. 백작이 홀에 장식해 둔 징그러운 박제품처럼 말이야. 으으.
그러나 원통하게도 레나에겐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자신은 아미티지 공작처럼 전쟁의 신도 아니고, 페트론 백작처럼 부를 축적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쓸데없이 반반하기만 해서 버리는 패로 쓰이고 마는 집시의 딸.
그런 레나가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사자를 꾀어 보는 수밖에.”
대담하다면 참으로 대담한 방법이었다.
공작은 안 그래도 차가운 사람이 약혼녀를 잃으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바뀌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전에도, 그 이후로도 숱한 미녀들이 연인을 자처했으나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생의 이유를 잃은 사람이 얼마나 무서울지 레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이 복수의 칼을 꺼내 들었다니. 그건 더 생각하기 싫었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살고 싶어. 정말 살고 싶어. 이대로 가만히 기다리는 건 말도 안 돼.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살 권리를 고스란히 반납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어머니가 들었으면 행여 밖에서 입도 벙긋 말라 했을 위험한 사상이었다.
레나의 내면에는 두 가지가 공존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집시의 영혼과 여느 귀족 자녀 못지않은 독서에서 온 지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부모님은 딸에게 지식만이 몸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라고 가르쳤다.
덕분에 레나는 귀족 레이디 사이에서 유행하는 로맨스 소설부터 감히 여자에게 허락되지 않는 철학 사상, 윤리, 약제학, 넓게는 동방에서 건너온 지식까지 고스란히 접할 수 있었다.
나라에선 지방 귀족과 중급 신분을 위해 각 영지마다 도서관을 설립토록 권장했다. 국왕의 관심을 끌고 싶은 백작이 누구보다 호화로운 도서관을 지었음은 두말할 것 없었다.
“설마, 스칼렛인 척하고 책 빌렸던 죗값을 이렇게 치르는 건 아니겠지?”
레나는 순간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부르르 떨었다.
안 된다. 괴이하고 허튼 망상으로 정신을 흩트려선 곤란하다. 레나야, 더 이상의 잡생각은 금지라고 했지? 그녀는 다시금 주의를 일깨웠다. 공작의 대리인 일행이 예비 신부를 맞으러 오기까지 앞으로 보름.
주어진 짧은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이냐가 자신의 앞날을 좌우할 터였다.
마음을 단단히 먹자 잠시 억눌러졌던 그녀의 장점이 만개하는 꽃처럼 피어났다.
부모님도 인정하고, 빵집 아저씨도 인정하고, 깐깐하기 그지없는 푸줏간 할아버지마저 인정한 레나의 장점!
기민함! 대담함! 무한의 긍정!
레나는 우선 백작이 대역 신부 준비에 손톱만큼의 노력도 할 의사가 없음을 파악했다. 하다못해 레이디로서의 예절 정도는 가르쳐 주리라 기대했는데, 그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나마 해 준 거라곤 새 드레스를 두 벌 맞춰 준 것.
“두 벌이라니, 짜기도 하지.”
백작이 가진 재산이 얼만데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었다. 게다가 아무리 죽으러 가는 자리라고 해도 대놓고 ‘실수해서 죽으렴’ 하며 비는 티가 난단 말이다.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레나는 드레스를 벗는 척하면서 입고 온 낡은 망토 아래로 한 벌을 감췄다. 백작의 성을 빠져나오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레나는 망토 안에 아름다운 하늘빛 드레스를 입은 채로 홍등가의 문을 두드렸다.
소싯적 귀족 저택에서 일했다는 마담이 레나를 맞았다.
“이 드레스를 드리죠.”
레나는 망토를 홱 벗어젖히며 마담에게 제안했다.
“영주님이 주신 물건이니 얼른 팔아 치우는 게 좋아요. 오늘까지 딱 두 번 입었고요. 40골드는 넉넉히 받을 거예요. 그 이하로 주겠다고 하면 가랑이를 차 버리세요.”
“……개인적으로 아가씨가 거래 상품이었으면 더 흥미로웠을 텐데.”
입가에 애교점을 찍은 마담이 요염하게 웃었다. 역시 온갖 사람이 드나드는 가게 주인이라 그런지 영주의 물건이라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레나는 마담의 배짱이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그녀가 벌일 일은 말 그대로 엄청난 배짱을 필요로 하는 거니까.
“그래, 40골드에 상응하는 무엇을 원하나요?”
“레이디요.”
열의로 가득 찬 눈이 어둑한 실내에서 반짝거렸다.
“기간은 보름. 그동안 귀족 레이디가 웃는 법, 말하는 법, 걷는 법, 먹는 법을 모조리 가르쳐 주세요. 이유는 묻지 말고.”
“마지막 말은 필요 없을 뻔했네요. 우리 가게는 ‘질문’과 거리가 멀거든.”
마담이 레나의 자질을 평가하듯 천천히 주변을 돌면서 아래위를 훑었다. 백작의 시선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레나의 속치마까지 들춰 볼 기세였던 그녀는 여전히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웃었다.
“보름이라고 설렁설렁 가르칠 마음은 없어요. 각오 단단히 해 두는 게 좋을 거예요, 아가씨.”
그리고 마담의 으름장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속성으로 진행되는 수업 도중에 새신랑 유혹하는 법까지 얼떨결에 배운 건 예상 밖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