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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버 부케


1화



prologue


레나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속으로 숫자를 셌다. 마음 같아선 손톱을 번갈아 가며 두드리고 싶었지만 하늘 같은 영주님 앞에서 그런 무례가 용납될 리 없었다.
자신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피는 영주의 시선이 느껴졌다. 레나가 어린 티를 벗으면서부터 느껴 온 시선이었다.
끈끈한 거머리, 뱀의 허물, 취객의 더러운…….
“눈을 들어라.”
최대한 혐오스러운 것을 떠올리며 더러운 것엔 더러운 것으로 맞서 보려 했거늘 영주는 틈을 주지 않았다. 혀를 내밀고 싶지만 그랬다간 혀가 잘리겠지. 레나는 억지로 한숨을 참으며 정면을 쳐다보았다.
13년 전, 그녀의 가족을 영지 내로 거둬 준 페트론 백작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신기하리만치 닮았단 말이지.”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늘 뒤집어쓰고 다녔던 잿가루도 소용없었다. 레나가 서재로 들어서자마자 백작은 가소롭다는 듯 웃더니 당장 머리를 감고 오라고 명령했다. 언제 어떻게 들켰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레나의 작은 비밀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결과적으로, 지금 그의 눈앞에 탐스러운 벌꿀색 머리카락이 드러난 상태였다.
백작의 막내딸 스칼렛과 빼닮은 머리색이었다.
“너도 알겠지만 페트론 백작가와 아미티지 놈들은 오랜 숙적이다. 아주 고질병 같은 놈들이지.”
흔한 변경의 백작에서 왕궁을 드나드는 권력자로 거듭난 그는 대단한 야심가였다. 아미티지 공작가는 대대로 유서 깊은 귀족 집안. 구(舊)세력과 신(新)세력의 충돌이라기엔, 공작가는 여전히 건재하고 백작가는 지나치게 탐욕스러웠다.
적어도 레나가 보기엔 그랬다.
1인자를 무너뜨리기 위해 페트론 백작가가 써 온 방식들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치졸한 데가 있었다.
“한데 그 아미티지 놈이 내 소중한 스칼렛을 점찍어 결혼을 요구하더군. 그것도 국왕 앞에서,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에서 말이야.”
두근.
거기까지만 들었는데도 이미 레나의 심장은 꽉 죄어들었다. 백작의 호출이 유쾌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이 최악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위험하다. 유달리 예민한 감각이 경고를 보내왔다.
그리고 이어진 명령은 레나의 불안에 말뚝을 박았다.
“내 딸이 되어라.”
선명한 초록빛 눈동자가 공포로 흔들렸다.
“내 딸 스칼렛의 대역이 되어서…… 가서 죽어라. 복수는 철저히 해 주마. 네 부모 앞으로도 위로금을 두둑이 보낼 터이니 명예로운 죽음이 되겠지.”
대체 누가 누구의 복수를 하는 거냐고 반박하고 싶었다. 애초에 자신을 신부로 보내지 않으면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아도 될 게 아닌가.
하지만 레나는 알고 있었다. 백작은 바로 그 ‘복수’를 위해서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었다.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킬 불씨. 순진하고 가련한 막내딸의 복수라는 명분을 내건다면 국왕도 섣불리 제재하진 못할 터였다.
그리고 아미티지 공작.
그가 무슨 생각으로 숙적의 딸을 요구한 것인지도 짐작이 갔다. 이는 결코 가문의 반대를 뛰어넘는 사랑 따위가 아니었다.
가면, 죽는다.
어쩌면 가는 도중에 죽을지도 모른다.
신랑 측도, 신부 측도 모두가 레나의 죽음을 원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튀어나와 그녀의 목을 힘껏 조르는 것만 같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두 다리로 버티고 있는 레나의 귓가에 축축한 웃음소리가 와 닿았다.
“무리에서 쫓겨나 죽어 가는 네 가족을 먹여 주고 보살펴 주었지. 이제 은혜를 갚을 차례다. 알고 있겠지? 집시의 딸이 백작의 은혜를 갚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란 것을.”
백작이 키득, 웃었다.
“……감사 인사는 넣어 둬라.”
그 말을 끝으로 레나는 성에서 쫓겨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녀는 헤어날 수 없는 검은 웅덩이에 빠진 기분이었다.





chapter 1 대리 결혼식





레나는 집시의 딸이었다.
물론 자신이 부모님과 다르게 생겼다는 자각은 있었다. 여자아이는 섬세하고 예민하다. 외모에 관심을 가지게 됐을 때부터 레나는 부모님의 짙은 피부색과 진한 이목구비를 영원히 닮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부드럽게 굽이치는 벌꿀색 머리카락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딱 좋았다. 들판의 클로버처럼 생생한 초록색 눈동자도, 희고 고운 피부나 장밋빛 입술도 부모님과 달랐다.
아마 레나는 그들의 친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아기를 훔쳐 왔을 린 없다.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부모님은 누구보다 집시의 피가 진하게 흐르면서도 바깥사람들이 악행이라 일컫는 몇 가지 풍습은 따르지 않았다. 그것은 레나의 가족이 무리에게 두들겨 맞은 뒤 추방당한 이유이기도 했다.
빈사 상태의 가족을 구해 준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페트론 백작이란 것이 운명의 장난이었다.
레나는 미행이 붙지 않았는지 주위를 살핀 뒤 아담한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머니! 아버지! 빨리요. 얼른 짐을 챙겨 떠나야 돼요!”
마을에서 산파 일을 하고 온 어머니 유벤타가 딸을 맞았다. 성에서 별일이 없었는지 묻기도 전에 딸이 커다란 가죽가방을 꺼내 들고 세간을 털어 넣는 모습에 당황한 눈치였다.
“무슨 일이니, 레나야?”
“……갑자기 어딜 간다는 게냐?”
약초를 다듬고 있던 아버지 미구엘도 소란에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영지에 정착한 이래로 여행을 떠난 적이 없었다. 지금 딸의 모습은 여행이 아니라 야반도주를 하려는 데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백작이 무슨 말을 한 거니?”
어머니의 감은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평소와 다른 기색을 읽어 낸 유벤타는 딸의 손목을 잡은 뒤 침착하게 물었다. 무리에서 추방되었지만 집시 혈통을 잊지 않은 유벤타는 그들만 있을 때는 모든 경칭을 생략했다.
“말해 보렴.”
“……백작이 절 스칼렛인 척 아미티지 공작에게 시집보내려고 해요. 대역 신부로 가서 전쟁의 불씨가 되라고요.”
레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유벤타는 급히 숨을 들이켰다. 미구엘은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이어서 두 사람은 눈을 감고 허공으로 손을 들어 올리며 기도문을 읊었다.
하늘과 땅과 자연을 향한 기도였다.
레나는 다시금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마른과자와 육포, 견과류를 나무통에 담아 넣었다. 또 뭘 챙겨야 하더라? 그렇지, 튼튼하게 짠 모포는 필수다. 최소 며칠은 거의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할 텐데 체온 유지는 중요했다.
아무래도 가방 하나로는 부족할 것 같다. 레나는 다른 가방을 찾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기도는 좋죠, 어머니. 지금이야말로 기도가 필요한 때긴 해요. 짐은 제가 챙길 테니까 두 분은 기도를 해 주세요.”
“……레나야.”
유벤타가 조용히 딸의 이름을 불렀다. 어찌나 정신없이 집 안을 왔다 갔다 하는지 몇 번을 더 부르고서야 레나의 주목을 끌 수 있었다.
“네, 왜요?”
“그만두렴.”
그 말을 하는 유벤타의 눈은 차분한 슬픔으로 젖어 있었다. 어디서든 유용하게 쓰일 단도를 막 챙겨 들던 레나가 그대로 멈춰 섰다. 자신이 잘못 들었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어머니의 말이 진심임을 알아차렸다. 레나의 목소리가 핀에 꽂힌 나비처럼 떨렸다.
“……어째서요?”
“백작이 우리의 도주를 예상 못 했을 리가 없다.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는 순간 마당에서 사로잡힐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그 사람의 말을 따를 순 없어요! 어머니도 아시잖아요. 2년 전, 페트론이 아미티지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이들이 살고 있는 본우드 왕국은 정략결혼과 침략 전쟁을 적절히 활용한 끝에, 전 대륙을 통틀어 가장 큰 규모의 나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각 지역에서는 여전히 영주의 권한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왕에게는 이들을 견제할 또 다른 무리, 즉 대대로 충성을 바쳐 온 다섯 가문이 있었다. 동쪽의 비옥한 영토 로젠하트를 다스리는 아미티지 공작가는 이 다섯 가문 중에서도 왕의 최측근이라 할 만했다.
그리고 수년 전부터, 북서쪽 변경에서 페트론 백작가가 새로이 부상했다.
이들은 애초에 왕의 여섯 번째 측근이 될 뻔했지만 선대 영주의 오만함이 가문을 변경으로 내몰았다.
본래 남작이던 작위가 백작으로 상승했으나 이는 겉치레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하사된 영지는 오히려 예전만 못한 수준이었다. 왕이 이런 명령을 내린 배후에는 선대 아미티지 공작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말이 돌았다.
선대 영주는 꿈에서도 아미티지의 목을 베었다. 이를 갈며 재건만을 꿈꿔 왔다.
결국 그의 아들인 현재 페트론 백작에 이르러서야 오랜 노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우거진 침엽수림을 고급 건축재로 팔고 가문만의 독자적인 향수를 개발함으로써 부를 축적해 나갔다.
그 부를 이용해 병사들을 키웠고 2년 전, 드디어 국왕의 신임을 얻을 기회를 차지했다.
영 불안한 낌새이던 북쪽 지역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물밑에서 치밀하게 준비했는지 예상보다 반란의 불길은 크고 거셌다. 완전 무장을 한 기마병 천 명이 쓸고 가면 뒤따르던 병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남은 목숨을 베어 냈다.
새로 개발한 무기는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페트론과 근방의 영주 세력이 협공해도 힘이 부치는 상황. 당장 출정이 가능한 아미티지가 나설 차례였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반란 진압은 성공적이었다.
젊은 공작의 약혼녀가 비참하게 살해당한 것을 제외하면.
상황인즉 이러했다. 젊은 공작의 군대가 반란군과 맞서는 동안 페트론과 타 영주 세력은 수비에 집중하며 전세를 살피고 있었다.
그때 젊은 공작이 잠시 머무르던 이웃 성이 습격을 당하고 말았다.
성에는 지원군이 오기까지 버틸 만큼의 병사가 남아 있었다. 공작의 약혼녀와 간호원 스무 명도 함께였다.
아수라장을 간신히 빠져나온 성의 병사는 황급히 지원을 요청했다.
페트론 백작이 택한 것은 지원이 아니라 합동 공격이었다.
그는 남은 군사를 모조리 끌고 숲을 가로질러 공작과 싸우고 있는 반란군의 뒤를 쳤다. 앞뒤로 죄어 오는 공격에 반란군은 전멸했다.
잠시나마 성을 탈환했던 자들도 무시무시한 기세로 돌아온 대군에게 짚단처럼 허물어졌다.
그러나 젊은 공작의 측근들은 병사들의 만세 함성에 동참할 수가 없었다.

“……소피.”

목이 졸린 채 성탑에 매달린 공작의 약혼녀가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기에.
전장까지 따라 나올 만큼 각별했던 연인의 시체를 공작이 직접 거둘 때, 그들은 주인의 영혼이 지옥에서도 가장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성과 성 사이의 거리는 4마일(대략 6.4km)이었다.
고작 4마일.
당시 백작의 군대는 급습한 자들의 두 배가 넘었다.
아무리 전술상으로나, 결과적으로나 백작의 판단이 맞았다 해도 그 아래 도사린 악의를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페트론 백작은 재도약의 기회를 차지함과 동시에 가문의 원한을 제대로 갚아 치운 것이다.
잔혹한 피의 복수였다.
원래 빼앗긴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앗아간 짓이었다.
젊은 공작은 이후 와병을 핑계로 논공행상의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그사이 페트론 백작과 다른 영주들은 각기 원하는 것을 받아 갔고 그렇게 2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