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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본능 4화

2. 진강우(4)





“후…… 좋아! 힘내자, 할 수 있어!”

두 손을 불끈 쥐고 기합을 넣어 보았다. 이렇게라도 해야지만 울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빠르게 걸음을 옮겨 사거리 쪽으로 위치한 가까운 편의점 한 곳에 도착했다.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내부를 살펴보니,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편의점은 파트타임이니까 우선 들어가서 그의 행방을 물어볼 참이었다.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반기는 인사에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사지 않고 물어만 보자니 괜히 미안해서 초코바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단 걸 좋아하던 진강우가 즐겨 먹던 것이었다. 습관적으로 집은 제품에도 온통 그의 자취를 쫓을 뿐이라 헛웃음이 나왔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해 주세요.”

아르바이트생이 능숙하게 계산을 하자마자 때를 놓치기 전에 질문부터 던졌다.

“저기, 혹시 다른 타임 아르바이트 시간에 진강우라고 하는 사람이 있나요?”

제발 여기서 일했으면 좋겠는데. 제발.

“진강우요?”

“네.”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답했다.

“죄송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는데.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손님.”

“아…….”

아쉬움에 탄식만 흐른다. 그러면 그렇지. 이렇게 그를 빨리 발견할 리가 없어. 원하는 소득을 얻지는 못했지만 가볍게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하며 나왔다.

나는 그가 좋아하던 초코바를 든 채로 망설일 새도 없이, 다음 목적지로 발길을 돌렸다.



***



두 번째, 세 번째 편의점은 허탕이었고, 이번으로 벌써 네 번째였다. 여기도 아니라면 딱 한 군데 남는 것인데 그마저도 아닐까 싶어서 마음만 조급해졌다. 처음과는 다르게 발걸음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연이은 실패로 기운은 쭉 빠져 고개를 들기도 버거웠다.

제발…… 이번에는 제발. 힘겹게 두꺼운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묵직한 목소리가 인사를 건네 왔다.

“어서 오세요, 손님.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이야기하세요.”

“어……?”

……익숙한 목소리에 숨을 쉬기조차 버거웠다. 놀란 마음에 심장은 미어지듯 고통스러웠다. 멈칫한 발걸음은 채 옮기지도 못하고 우뚝 서서 머뭇거리기만 했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참지 못하고 바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저기요, 손님?”

“아, 아! 네.”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

“아, 아니 그게…….”

걱정하는 말을 들으니 내가 알던 그가 맞았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조금 더 피곤한 목소리였지만 금세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어쩌지. 이대로 얼굴을 보면 울 것 같은데. 그랬다간 바로 이상하다며 미친 사람처럼 취급하지 않을까 두렵고 무서웠다. 이 짧은 시간 동안 그와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났고, 내가 그를 위해 몸을 내던졌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진강우의 불안한 눈빛, 호흡, 그리고 그를 살리느라 쓰러져 가던 나를 걱정하며 숨 막히게 끌어안던 모습까지 너무나도 선명해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산소가 부족한 듯 숨이 가빠 올랐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도 않을 만큼 힘겨웠지만 상체를 들썩이며 천천히 내쉬었다. 여전히 심장은 터질듯 욱신거렸고 그가 청소해 놨을 깔끔한 편의점 바닥엔 못난 내 얼굴이 어렴풋이 비쳤다. 아…… 진짜 못생겼어.

“손님.”

“아, 아뇨! 물건 살 거예요. 살게요!”

“…….”

내게 다가오던 발걸음이 눈앞에서 멈춰 섰다. 마치 조용히 기다려 주는 듯한 배려 역시 정말로 내가 알던 진강우다웠다.

항상 고개를 푹 숙이고 있노라면 그는 조용히 내 앞에 서서 발끝만 내보였다. 그리운 옛 기억을 되찾고 나니 조금씩 진정이 되어 머리를 들었다. 아직은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재간이 없어서 최대한 시선을 피하고 가장 안쪽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하고 맥주가 가득 담긴 애꿎은 냉장고만 물끄러미 응시했다. 커다랗게 내 형상이 비쳤고, 울음을 참느라 붉어진 코와 눈이 보였다. 그리고 또.

“윽.”

안 돼. 새어 나올 것 같은 울음에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시끄럽게 돌아가는 냉장고 유리 위로 그의 실루엣이 뿌옇게 어른거렸다. 내가 알던 모습과는 다르게 머리는 좀 길었다. 사뭇 풋풋한 그를 보고 있자니 슬쩍 웃음도 나왔다. 나를 만나기 전 진강우는 저랬구나. 여전히 잘생긴 모습을 한 그를 넋을 잃고 남몰래 감상했다.

무엇을 살까 고민하다가 그와 살면서 종종 마셨던 맥주 한 캔을 집어 들었다. 맥주캔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을 손끝으로 매만져 보니 시원한 감각은 두근거리던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었다.

그를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찾게 되자 뒤늦은 안도감이 몰려왔다. 조심스레 곁눈질로 쳐다보니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진지해서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그와 예고 없이 눈이 딱 마주쳤다. 아, 미쳤어. 너무 떨려.

더는 피할 수 없으니, 간신히 뗀 걸음으로 여태껏 찾아 헤맸던 진강우와 마주했다.

와…… 진짜 말도 안 돼. 엄청 풋풋하잖아.

“계산해 주세요.”

“…….”

책을 보던 그의 눈이 물끄러미 시선을 맞춰 왔다. 무엇인가 못마땅한 듯 삐딱하게 서서 위아래로 내 모습을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왜 저러지 싶어서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내 쪽으로 커다란 손바닥을 내밀었다.

“신분증.”

“……네?”

“신분증 보여 주세요.”

“어?”

시, 신분증?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바지 주머니를 급하게 뒤적거렸다. 어. 잠깐, 뭐지? 아, 아냐, 그럴 리가……? 아무리 찾아봐도 신분증은커녕 지갑도 보이질 않았다.

“…….”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다른 편의점에서 두고 온 듯했다. 아, 진짜. 멍청해도 이런 멍청이가…….

“설마 없으신가요?”

“아, 그게요. 제가 지갑을 잃어버린 것 같은데…….”

민망하고 쪽팔려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당황스러움에 고개를 숙여 숨죽이는 것뿐이었다. 너무 어이없고 짜증 나는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피식피식 웃음이 새었다. 그래, 괜찮아. 얼굴이라도 봤으면 됐지. 찾았으면 된 거야. 싶던 찰나.

“학생이세요?”

“…….”

무뚝뚝하고 덤덤한 말투에 고개를 들어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경험상 딱히 기분 나쁜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 괜히 안심이 되었다.

너무 보고 싶어서 매일 밤낮 울었던 만큼 다시 만난 것 자체가 정말 꿈만 같았다. 밀려오는 행복감에 취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깔끔한 복장 위로 새겨진 그리운 이름을 눈에 담았다.

‘진강우.’

나는 너무나도 벅찼던 마음에 여러 번 곱씹고 곱씹다가 못다 한 말을 전했다.

“네, 저 학생인데.”

“하…….”

나는 그의 기가 찬 듯한 웃음마저도 반가웠다. 3년 후 상황이었다면 입을 대번 내놓고 노려봤겠지만, 지금은 뭐든 좋았다. 더는 입을 열지 않은 채 진강우의 무뚝뚝한 얼굴만 쳐다보니, 그가 펜과 종이 한 장을 작은 주머니에서 꺼내 들고 턱을 까딱거렸다. 반갑게도 회귀 전이나 지금도 그의 버릇은 여전해서 보는 내내 신기한 감정만 북받쳤다.

나는 웃으며 한 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저…… 제 이름은 심차연이고, 여기서 바로 위에 있는 한국대 다녀요. 아니, 음. 자퇴해서 이제는 아니긴 한데…….”

아, 맞아 까먹었어. 나 자퇴했었지. 그것도 지금 눈앞에 있는 진강우를 찾는답시고 그랬는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지? 민망함에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고개를 수그렸다. 자퇴한 게 무슨 자랑이라고, 쪽팔려서 얼굴을 들고 있기도 부끄러웠다. 그래도 역시나 진강우는 진강우였다. 여전히 묵묵하고 배려하는 성격은 회귀 전 그리운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면 본인 주민등록증 앞자리만 말해 봐요. 이왕이면 핸드폰 번호도 같이 주고.”

무덤덤하게 말하는 그에게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왜요?”

진강우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픽 웃었다. 어이없을 때 나오는 그의 또 다른 버릇 중 하나였다. 뭐가 우습길래 저러는 걸까 싶던 차에, 그가 계산대를 탁탁거리며 말했다.

“맥주 제가 사겠습니다. 지갑 찾게 되면 와서 갚아요.”

“네?”

“말 못 들었어요? 제가 사겠다고요.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보이니 이번 한 번만 믿어 드리겠습니다. 두 번은 없어요. 아, 그리고 노파심에 이야기하는데… 이렇게 봐줬다고 저 신고도 하지 말아요. 그럼 가만 안 놔둘 테니까. 아셨어요?”

“아…… 네.”

그의 말 한마디에 가슴 한편이 몽글몽글해졌다. 에스퍼로 각성하기 전 진강우는 무뚝뚝했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도 융통성이 있었구나 싶었다. 그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자 기쁜 한편,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현재 내 앞에 있는 그는 진강우가 맞았다. 하지만, 나와 동고동락하며 가이딩을 도왔던 파트너는 아니었다.

나는 보다 더 면밀하게 그를 살피기 위해 찬찬히 내 기억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눈에 담았다. 다행히도 첫 임무 때 어리바리했던 날 구한답시고 무리해서 생긴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눈썹 끝에서부터 광대뼈까지 쭉 내리긋는 흉터는 종종 내게 죄책감을 주곤 했었는데… 역시 지금의 그는 그때의 진강우가 아니었다.

그가 나 때문에 가지게 된 상처를 보고 불현듯 무서워도 마음을 굳게 잡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그 상처 때문에 미안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보답하고자 가이드로서 소명을 다했었던 기억이다.

내가 조금만 더 멋진 가이드였다면. 어정쩡한 B급이 아닌 적어도 A급이어서 당당했더라면, 미래에 있을 우리의 운명이 조금은 바뀌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