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돈을 좋아하시는 헬렌 앳웰 양에게.



아쉽게도, 지금 당장 내 얼굴을 보여 드릴 수는 없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나에겐 초상화를 의뢰하는 취미가 없거든요! 의뢰해 봤자 뭐 해요? 원본보다 못 할 것이 뻔한데.

그렇다고 당신이 거처하는 곳에 무작정 찾아갈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죠. 당신 말대로 얼굴 보고 대화하는 게 제일 좋겠지만, 제가 애초에 왜 편지를 보냈겠어요? 제 이름을 알려 드리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랍니다. (그 이유를 설명 드렸다간 당신이 화를 낼 것 같네요…….)

저는 불모지의 아름다운 별들을 관찰하러 잠시 나들이를 나갔던 것뿐이었어요. 풀밭 위에 누워 내가 사는 곳의 밤하늘에서는 볼 수 없는 이웃 세계 별들을 감상하고 있었는데, 쉭 하는 소리를 내며 비행하는 누군가를 목격하게 된 거죠.

제가 뭘 알았겠어요? 당연히 저는 제 눈앞을 스쳐 지나간 이가 빗자루를 탄 마녀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소리는 빗자루를 타고 나는 소리와 정확히 일치했거든요!

하지만 당신의 말에 의하면, 당신은 마녀도 아니고 빗자루를 타지도 않았다는 거군요. 그리고 적들에게 불꽃놀이를 보여 주는 게 당신이 하는 일이라는 거고요. (왜 하필 불꽃놀이일까요?)

그렇지만 당신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만은 사실인 거죠? 빗자루가 아닌 ‘비행기’라는 것을 탈 뿐, 그날 제 머리 위를 날아갔던 건 분명 당신이었어요.

만약 그렇다면, 당신이 하늘을 날 수 있다면 말이죠. 그렇다면 그것 자체로도 당신은 우리와 동등한 마녀이자 자매가 아닌가요? 무릇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저 높은 하늘을 자유로이 비행할 수 있다면 말이에요. 그 자체로도 멋진 일이 아닌가요?

불모지의 마녀들은 빗자루가 아닌 비행기를 타고 나는군요. 언젠가, 하늘까지 훤히 보이는 낮에 당신이 비행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까마귀가 꾸벅꾸벅 조는 나른한 시간

에녹 그리어 올림.



추신 : 당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아냈는지에 대해 물으셨지요. 물론 저는 수정 구슬 따윈 이용하지 않았어요. 잘 생각해 봐요. 당신 주변에는 많은 새들이 지저귀고 있을 거예요.」



「에녹 그리어라는 과대망상 증후군 환자에게.



난 네가 누군지 몰라. 네가 어떻게 나에게 편지를 전달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심지어 네가 진짜 남자이기는 한 건지도 말이야.

누군가 나를 상대로 멍청한 장난을 치는 것일 수도 있겠지. 남자 이름을 쓰면서,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지어내며 말이야.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우리 모두에게는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고, 이딴 헛짓거리를 하기에는 네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해. 진짜야.)

내가 공습을 나가는 모습을 너는 빗자루를 탄 마녀에 비유했지. 혹은 ‘혜성’이라든가…… 물론 하늘을 나는 건 분명히 로맨틱한 일이야. 누군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 새들처럼 하늘을 가르는 건 사람들이 오랫동안 꿔 왔던 꿈이었잖아.

하지만 내가 하늘 위에서 하는 일은 전혀 로맨틱하지 않아. 멋진 일도 아니고. 나는 그저 그들이 내 미래를 파괴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 일을 하는 것뿐이야……. 그들을 가만히 두면 분명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모조리 빼앗아 갈 테니까. 난 그걸 막으려 하는 것뿐이야.

알겠어?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네가 무슨 의도로 내게 편지를 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넌 분명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지. 그럼 내 이야기 좀 들어 줄래?

나도 예전에는 마법과 환상이 등장하는 동화 같은 이야기들을 좋아했어. 그런 이야기를 읽고 있자면 내가 마법을 가르치는 학교에 입학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거든.

맞아, 그땐 정말로 나도 마법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기적을 부리면서 괴물을 물리치고, 대서사시 같은 모험을 하고…….

나는 내가 마법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처럼 멋진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이런 진흙탕에서 구르고 있었어. 전쟁이 끝나는 것만을 유일한 동아줄처럼 붙잡은 채 말이야.

그런데 그거 알아? 이젠 힘들어서 못 하겠어. 난 무려 반 년 동안이나 이 지랄을 하고 있다고. 이젠 내가 전쟁 전에 뭘 좋아했는지, 무슨 음악을 들으며 어떤 춤을 췄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

전쟁이 끝난다 해도 어떤 삶으로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어.

나를 기다리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내가 기억한다 해도 이미 전부 망가지고 파괴되었을 거야.

정말 더 이상은 버틸 힘이 없어. 부탁이니 누군가가 신나는 노래라도 듣게 해 줬으면 좋겠어.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말이야.

이제 됐지? 내가 얼마나 재미없고 한심한, 망가진 인간인지 알았다면 이제 편지를 보내는 짓 따윈 그만해.

넌 심지어 진짜 마법사도 아니잖아.



― H. A」



「마법을 믿지 않으시는 헬렌 앳웰 양에게.



무릇 마법이란 기적과도 같은 일이죠.

그러한 탓에 아주 멀게 느껴지는 개념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마법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누구나 누릴 자격이 있는 기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법이라 불리는 것이지요.

아무래도 내가 먼젓번에 부린 마법이 당신의 신뢰를 얻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나 보군요. 부디 이번에 보내는 마법은 당신 마음에 들기를 바라요.



달 여왕께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밤

에녹 그리어 올림.



추신 : 아무것도 당신을 기다리지 않기는, 여기 속상해서 훌쩍이는 마법사 한 명이 있다는 사실만 알아줘요!」



***



「일기장에게. 나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내 일상을 잊지 않기 위해 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기장에 첫 글씨를 새겨 넣은 이래로 가장 이상하고도 ‘그야말로 일기에 쓸 가치가 있는’ 일이 일어났다!

적어도 저녁놀이 질 때까지는 평소와 같은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 말을 몇 번 쓰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힘든 날이었다. 날이 갈수록 적응이 되기는커녕 우리 모두가 깊은 수렁 속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가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을 청하려고 침낭에 들었다. 나는 이 시간을 제일 좋아한다. 잠이야말로 이 지옥 속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니까.

모두가 고요한 어둠 속, 저마다의 도피처로 향하려 꿈나라 행 티켓을 끊고 있을 때, 바로 그 일이 일어났다.

정부가 내건 슬로건이나 윙윙거리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곤 하던 저 커다란 확성기에서 익숙하지만 아주 낯선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분명 난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하지만 그건…… 그게 왜 여기서 방송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는 영문을 모른 채 자리에서 일어나, 잠깐 동안 혼란스러운 시선을 교환한 끝에, 암묵적으로 허용된 소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우리는 함께 춤을 추고, 수통을 꺼내 브랜디를 마시는 시늉을 하다가 깔깔 웃었다. 아무도 그런 우리를 제지하려 나서지 않았다. 정말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건 그냥 평범한 노래일 뿐이었는데.

확성기에서 흘러나온 건 유행가였다. 우리 모두가 기억하던 그 노래 말이다……. 이 황량한 곳으로 모여들기 전, 그 평범하던 시절에 유행하던 그 노래였다.

아직도 그 가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마법이라도 일어났던 걸까?

그래, 그건 마법이 틀림없다. 제정신이라면 그런 노래가 방송되지도, 모두가 소란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잠시 동안 우리는 정말 행복했다는 거였다. 마치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 카야 스탠튼 일병의 일기 중.



***



「친애하는 헬렌 앳웰 양에게.



안녕, 또 나예요.

이번 편지는 조금 많이 짧을 거예요. 이 한마디를 하고 싶어서 잠이 안 올 지경이었거든요. 그러니까 그 말이 뭐냐 하면요.

내가 뭐랬어요! 나 마법사랬죠!

음,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요.

그럼 내일 봐요!



벽난로가 없으면 얼어 죽을 것 같은 밤

에녹 그리어 올림.」

1. 달과 마법과 륀 도흐







「미친 마법사, 에녹 그리어에게.



대체 뭐야? 어젯밤엔 정말이지 난리가 났었다고.

그 정도로 깊은 밤이면 모두가 죽은 것처럼 곯아떨어지고도 남을 시간이었단 말이야. 난 우리 대원들이 그 늦은 시각에 그렇게 활발해질 수 있는지 처음 알았어.

그 음악만 아니었다면, 단체로 각성제를 들이켜기라도 한 줄로 착각했을 거야. 아니면 드디어 온 편대가 정신을 놓아 버렸다든가.

게다가 하필이면 로버트 오코넬의 노래일 건 또 뭐야? 좀 더 얌전한 노래로 고를 순 없었어? 내 장담하는데, 그냥 평범한 재즈 정도로도 우리는 충분히 좋아 미쳤을 거야. 그런데 로버트 오코넬이라니! 그는 잠자던 강아지도 댄스를 추게 만드는 작자라고.

불평하는 것같이 들렸다면 미안. 사실은 나, 어젯밤에 정말 좋았어. 전쟁이 터진 이후로 그렇게 신이 났던 적이 없었어. 정말이야! 물에서 술맛이 나더라니까. (이것도 네가 마법을 부린 건가?) 음악만으로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군대에 와서 알다니. 정말 미쳤어, 미친 거야.

그 당시 우리 꼴이 얼마나 말이 아니었는지 말해 주자면 말이야, 우리는 심지어 인간 소리를 내지도 않았어. 단 한 명도 제대로 된 언어를 구사하는 놈이 없더라고. 노래를 따라 부르는 몇몇 마니아들을 제외하면 우린 한 무리의 원숭이들이나 다름없었다니까.

잠시만이라도 나를 정신 나간 클럽으로 데려다줘서 고마워.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마법으로 확성기를 조종한 건가? 그래, 확성기를 조종하고 물을 브랜디로 바꾸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다음부턴 대원들을 미치게 하는 마법 정도는 자제해 줘. 알겠지?

네가 이곳에 마법을 부리러 왔다면 우리 모습을 봤을 수도 있겠다. 우리 눈에 띄지 않게 몸을 숨긴 건 정말 현명한 일이었어. 네가 네 허풍만큼 잘생긴 남자라는 게 정말 사실이었다면, 그리고 그 당시의 우리가 너를 발견했더라면 말이야…… 우린 인간이 아니라 원숭이들이었거든. 무슨 말인지 알지? 여자의 본능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지 알게 되었을 수도 있어…….

정말 최고의 축제였어.

왜 진즉에 나타나지 않은 거야? 마약보다 마법이 훨씬 낫잖아!



― H.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