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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0. 마법사의 편지





「친애하는 헬렌 앳웰 양에게.



내 벽난로는 먼지 쌓이도록 버려진 지가 오래되었는데, 제대로 작동할지 모르겠네요. 만약 당신이 이 편지를 읽고 계시다면 벽난로가 당신에게 성공적으로 편지를 전달했다는 뜻이겠지요.

당신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필체 연습도 많이 했답니다. 어떤가요? 차마 못생긴 글씨로 당신에게 편지를 쓸 수는 없었거든요.

무슨 종이에 무슨 잉크로 편지를 쓸지도 아주 많이 고민했어요. 두께감이 있는 오돌토돌한 질감의 종이가 좋을지, 새하얗고 말끔한 종이가 좋을지 고민하는 내 모습이 상상되나요?

동네 까마귀가 이런 나를 본다면 ‘하이고, 지랄이 풍년이다.’라는 관용구로 나를 비난하겠지만, 누군들 이렇지 않겠어요? 초면인 사람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건 다들 똑같잖아요. 그러니 첫 만남을 가질 때나, 면접을 볼 때 제일 좋은 망토를 걸치고 집을 나서는 것이겠지요.

이쯤 되면 제가 누군지 궁금해지셨겠지요? 제발 그렇다고 말해 주세요. 나를 궁금해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자기소개를 하는 건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서요. 게다가 내 벽난로가 오작동이라도 일으켜서 생뚱맞은 사람에게 이 편지가 전달될 가능성도 무시 못 하고 말입니다.

헬렌 양께서 편지가 올바른 곳으로 전달되었다는 답장을 보내 주시면, 그때 제가 누군지 아실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의 친절한 답신을 기다리겠습니다.



달 여왕이 지켜보시는 밤

헬렌 양과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누군가로부터.」



「아마도 하늘을 날고 계실지 모르는 헬렌 양에게.



내 벽난로는 비록 낡았지만, 그래도 거짓말을 하지는 않아요! 헬렌 앳웰 양께 정확히 편지를 전달했다며 확신에 차 말하더군요. 물론 저도 제 벽난로의 말을 믿었습니다. 편지가 어디로 갔는지 제일 잘 아는 건 벽난로일 테니까요.

하지만 하루 이틀을 기다려도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래요. 저는 아무런 답장도 받지 못한 채 마음만 졸여야 했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제 벽난로 쪽을 흘끗거리고 있지만, 편지가 올 기미는 보이지 않는군요.

아마도 당신이 제게 답장을 하기에는 몹시 바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은 저와 같은 동족이 틀림없으니까요. 하늘을 은빛으로 수놓은 은하수가 가로지르는 새벽 밤을 완벽하게 비행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았을 땐 찬사라도 보내고 싶었어요!

그리고 당신의 세계에는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빗자루를 타는 모습을 보고 아주 놀라기도 했죠! 마법 불모지에 혜성처럼 나타난 마녀라니! (당신의 모습을 비유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나는 모습은 정말이지 혜성 같았어요.) 나는 당장 당신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요,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가 바로 그거예요.

마법이라는 놀라운 기적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불모지에서, 심지어는 우리 자매 마녀들보다도 더 뛰어난 비행술을 선보인 마녀를 목격했을 때, 내 마음이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당신은 모르시겠지요.

나는 지금도 당신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어요. 분명 당신은 내가 모르는 미지의 마법에 대해 알고 계시겠지요! 우리의 세계와는 다른 의미로 놀랍고 신비한 그쪽 불모지에 대해서도 들려주실 수 있으실 거고요!

내 벽난로는 언제나 열려 있답니다.



달 여왕의 가호를 담아

누군가로부터.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비행술의 선구자, 헬렌 앳웰 양에게.



무례한 이미지를 심어 주고 싶지 않아서, 저는 침착하게, 당신의 답장이 오기만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려 일주일이나요!)

그동안 저는 까마귀와 토론을 했어요. 편지는 정확하게 전달되었는데, 답장이 오지 않는 이유를 찾아내려 한 거죠.

까마귀는 저에게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더군요. 혹시 내 벽난로로 답장을 보내는 방법을 모르는 건 아니냐면서요.

하지만 저는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 같은 완벽한 비행술을 다루는 마녀라면 상대편 벽난로로 답장을 보내는 방법 따위는 껌 씹는 것보다도 쉽게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제 세계의 예를 들자면, 그런 일은 네 살짜리 아이도 거뜬히 해내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혹시, 당신이 제 편지를 아주 의심스럽게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더군요.

당신도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 같은 마법 사용자들은 세간에 정체가 드러나는 걸 극도로 꺼려하니까요. 아마도 당신은 이름도 밝히지 않은 수상한 사람이 다짜고짜 답장을 보내 달라고 하니 거부감을 느끼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불모지에 살고 있는 마녀잖아요. 우리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비밀을 엄수하고 있을 게 분명하겠죠.

저의 무례에 대해 사과드리는 차원에서, 제 이름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에녹 그리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마법사가 맞다는 증거를 함께 동봉합니다. 제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마법이죠.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마법! 이쯤 하면 당신의 의심을 거둘 수 있을 거라 감히 기대해 봅니다.

그럼 이번에야말로 답장이 돌아올 거라 믿어도 될까요?



신뢰와 호의를 담아

에녹 그리어 올림.」



「이봐, 에녹.

너 무슨 약 했냐? 약쟁이치고는 글씨가 너무 정갈한데.

이런 곳에 있다 보면 마약을 찾는 놈들이 많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런 일을 비난할 생각도 없고. 마약이라도 있어야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이니 말이야. 웃기는 일이지?

하지만 넌 좀 심각한 것 같아. 마법이니 빗자루니, 그런 헛것이 눈앞에 보일 정도면 군의관에게 가서 상담을 받아보는 게 좋을 거야. 진심으로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널 얼간이 약쟁이 취급할 수도 있었겠지만, 내게 초콜릿을 보내 준 호의를 생각하면 말이야, 넌 그리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거든.

머리에 단 꽃부터 떼고 정상인 대 정상인으로 대화할 수 있기를 바랄게. (그렇다고 답장 보내라는 소리는 아님.)

근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이 구역은 여성 편대만 모여 있는 곳인데.



― H. A」



「친절하신 헬렌 앳웰 양에게.



내 벽난로에 불꽃이 일더니, 이윽고 당신의 편지가 도착했음을 목격했을 땐 그만 곁에 있던 까마귀를 너무 세게 안은 나머지 터뜨릴 뻔했답니다! (오른팔과 손을 무지막지한 부리로 마구 쪼이는 후폭풍을 겪어야만 했죠.)

드디어 하늘의 지배자이자 땅이 우러러보는 위대한 마녀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감격을 금치 못했습니다. 제 글씨가 잔물결에 비춘 것처럼 보이는 건 다 그 때문이에요.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더라고요.

어쨌든,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붙잡고 편지를 얼른 읽어 내려갔습니다. 과연 당신은 내게 보내는 편지에 어떤 내용을 담았을까, 몹시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자신에게 실망해야 했어요. 두 번, 세 번 다시 읽어 보았지만 아직 저는 당신의 편지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 이해력이 부족한 탓일까요?

현명한 당신께서 제 이해를 도와주신다면 내 온 마음을 담아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1. ‘편대’라는 게 무엇인가요? 올가 게르그의 「삼라만상의 지식을 총망라한 대백과사전」을 샅샅이 뒤져 보아도 그런 단어는 나와 있질 않더군요.

2. 제가 동봉한 마법으로 제 신원을 확인하셨을 텐데, 마치 마법을 믿지 않으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3. 제 ‘초콜릿’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나요?



언제나 눈이 내리는 밤

머리에 꽃을 하나 더 달 필요가 없는, 꽃 같은 에녹 그리어 올림.」



***



「386비행대대 제2 여성 편대 소속

헬렌 도로시 앳웰 병장 진료 소견서 - 2주 차



자원입대 후 한 달 만에 공습에 발탁되어, 타 병사들보다 실전에 오래 노출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해당 환자의 정신력은 놀라울 정도로 강인하다고 사료됨.

그러나 최근 친했던 병사들이 연이어 전사했고, 그로 인해 심각한 트라우마 증세를 보임. 악화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한 것으로 판단됨.

항우울제를 포함한 기타 약물 치료를 거부하는 해당 환자에 대한 약물 치료 독려가 필요함.

환자가 향후에도 실전에 투입될지에 대해서 논의 요함.」



***



「잘생긴 면상을 숨기는 이유가 몹시도 궁금한 에녹에게



야, 네가 그렇게 잘생겼어?

그럼 내 앞에 좀 나타나 보지 그래? 내가 비행하는 모습도 봤다면서. 그럼 근처에 있다는 뜻 아냐?

나 잘생긴 남자 좋아해. 뜨내기처럼 편지로 대화를 주고받을 필요는 없잖아? 언제 한 번 얼굴 좀 보자고. 예뻐해 준다니까? 대신 네 미모에 대해 거짓을 고한 게 드러나면 내가 군대에서 배운 기술들을 좀 써먹어 줄지도 몰라.

난 잘생긴 남자에겐 무한히 관대하니, 네 한심하고 멍청한 질문들에 친히 답변해 주지.

1. 편대가 뭐냐고? 비행기를 타고 적 기지에 불꽃놀이 쇼를 보여 주는 사람들의 모임을 그렇게 불러. 혹은, 제 발로 지옥에 걸어 들어간 불쌍한 새끼들을 뜻하기도 하고. 물론 나도 거기에 포함돼.

올가 게르그가 대체 뭐 하는 여잔지는 모르겠지만, (보나마나 마녀겠지! 제발 설명하지 마.) 편대라는 단어를 모르는 걸 보니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게 틀림없어. 네가 부럽다, 올리.

2. 존나 당연하게도 난 마녀가 아니니까. 내가 마법을 부릴 줄 알았다면, 여기서 이러고 있었겠냐고. 만약 내가 마법을 부릴 줄 알았다면 나는 우선 부자들을 내 노예로 만들 거야. 그리고 그들이 나에게 돈을 갖다 바치게 해야지. 여자에게 필요한 건 사랑 따위가 아니라 돈이거든.

앞서 말했듯 난 평범한 여자고, 마법을 믿지도 않아. 네가 진짜 마법사라고 해도 신경 안 써. 내가 여기 와서 배운 게 뭔지 알아? 기적이나 마법 같은 건 내게 절대로 일어나 주지 않는다는 거야.

3. 초콜릿? 아직 그 효과를 잘 모르겠는걸…… 한 열 개 정도만 더 먹으면 좀 감이 올지도.

그런데 왜 내 질문에는 답변 안 하냐. 내 이름 어떻게 알았냐니깐? (장담하는데 신비로운 마법의 수정 구슬에서 내 이름을 보았다느니 하는 개소리 쓰면 불꽃놀이 폭죽 장전하고 찾아간다.)



― H.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