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화] 다음에 두고 보자







천마도 담천우.

십팔대 마교주이자, 현존 무림을 통틀어 최강이며 고금 제일의 무인이 될 남자.

그게 바로 그였다.

그런데 현재 그는 고금 제일이라는 자신의 야망을 버려야만 할 상황에 처해 있었다.

“어이, 장자방이!”

“풍정기입니다.”

툭하고 던져놓은 담천우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오십대의 중년인은 인상을 구기며 자신의 이름을 토해놓았다.

담천우는 녀석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런 담천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의 턱은 밑으로 바짝 당겨져 있었다. 꽤나 고집 있어 보이는 그 얼굴은 평생 글줄이나 읽을 것 같은 꼬장꼬장한 서생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담천우는 문득 뇌리에 의문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마뇌 이 녀석은 왜 배신한걸까?’

분명 이유는 있을 것이다. 평소 장자방이라고 놀려댔던 것 때문에? 그게 아니라면…….

담천우는 그의 뒤편에 서있는 면상들을 바라보았다.

이유는 저들에게서 찾는 게 빠를지도 모르지.

담천우가 중간 중간 피가 섞인 마른기침을 토해내며 말했다.

“어, 그래. 장자방이.”

“…….”

그의 말이 심기를 건드렸는지, 마뇌 풍정기는 아예 답을 하지 않았다.

역시 이쪽은 아니다. 표정이 없거든.

그에 비한다면 뒤에 있는 놈들은 기대할 만했다. 툭 치면 다양한 반응들이 바로 튀어나올 것 같았으니까.

“이봐, 뭐야? 왜 이렇게 몰려 나왔는데?”

“오늘부로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이다.”

담천우의 말에 당당한 어조로 답을 한 자는 원로원주였다.

정말이지 원숭이같이 생겨서 평소에도 원숭이새끼라고 놀려댔었지.

“어이, 원숭이새끼. 제자리가 뭔데?”

“으드득. 고귀한 천마위를 너같이 하잘 것 없는 자에게 언제까지 맡겨 둘 수는 없다.”

“하잘 것 없는 자?”



이유를 들어보니 진짜 별 게 없었다. 천마는 천마이기 때문에 고귀한 것이다. 저들에 의해 입증 받아야 하는 자리가 아니고.

“내가 육대마가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정곡이라도 찔렸는지 썩어 들어가는 면상들.

진작 죽였어야 했는데, 귀찮아서 내버려뒀더니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담천우가 혀를 차며 말했다.

“고생했다. 천한 놈 밑에서 십 년이나 있었으니 배알이 꼴렸겠네.”

“크, 크흠.”

붉어지는 면상들 중에 몇몇 놈들의 얼굴에는 마뜩찮음이 섞여 있었다.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저기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을 들으니 담천우는 이해가 되었다.

흑풍찬마대.

뒤늦게 반란 소식을 듣고 달려오는 모양이었다.

민망하지만 나라는 놈이 그래도 하급무사들 쪽에서는 꽤나 신망이 있거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흑풍찬마대로는 역부족이었다. 천마신교의 알짜배기 무력대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전부 눈앞에 있는 놈들이었다.

그러니 저들에게 있어 흑풍찬마대는 그저 귀찮은 날파리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허락된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저들의 얼굴이 점점 밝아지는 건, 담천우의 입에서 나오는 핏물 중에 중간 중간 잘게 잘려진 내장조각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이제는 대라신선이 와도 가망이 없다.

“그런데… 말이다.”

담천우는 포기하는 대신 도를 짚고 일어섰다. 순간 다리에서 힘이 풀렸지만 짐짓 힘을 주었다. 그러자 놈들의 눈에서 공포라는 게 묻어나왔다.

왜냐하면 저기 산처럼 쌓여있는 일천여 구의 시체는 내가 만든 거거든.

“적혼마녀는 왜 그런 거지? 솔직히 마뇌 너는 의뭉스러운 게 뒤통수를 쳐도 이상하지가 않아. 그런데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든.”

담천우가 오늘 죽는 가장 큰 이유는, 방심 때문이었다.

지금 담천우의 등 쪽에 꽂혀 있는 검. 이게 바로 적혼마녀가 저지른 짓이었다.

적혼마녀는 화경급 고수에다가 담천우가 종종 침상으로 부르던 애첩이었기에, 기습은 막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사실, 교주가 없앤 암흔곡의 후예입니다.”

“그랬나……. 그래, 그래서 그랬군.”

담천우는 입맛이 썼다.

그런 줄 알았다면, 얼굴을 부수지는 말 걸 그랬다.

마지막 순간에 그녀가 짓던 후련한 미소를 떠올리자, 담천우는 마음이 조금 울적해졌다.



찌이이익.

담천우는 아예 넝마가 되어버린 상의를 쭉 찢어서 도병과 함께 손을 싸맸다.

그러자 사람들의 얼굴에 황망함이 어렸다.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는 것이리라. 누가 봐도 마지막은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담천우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자신답고 싶었다.



십이 세에 마교 투신.

이십오 세에 마교 공식 서열 삼백오십 위, 마졸.

삼십 세에 마교 공식 서열 일백팔십 위, 십오마령.

삼십오 세에 마교 공식 서열 팔십 위, 마령단주.

삼십팔 세에 마교 공식 서열 십팔 위, 대외원주.

사십오 세에 당대 마교 교주였던 천세형을 꺾고 제십팔대 교주로 등극.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야말로 피로 점철된 인생이 아니었던가.

“와라, 쥐새끼들. 격의 차이를 보여주지.”

담천우의 손이 가는 방향대로 피와 살이 갈라지고 흩어졌다.

냉혹하지만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그런데 천마도라고 불리는 그 잔혹한 손끝에서, 이율배반적이게도 애잔함이 묻어나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처절한 사투이자,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담천우의 진혼곡이었다.

그리고 제물은 여기 있는 모두가 될 터였다.

“하하하하!”

담천우의 웃음소리가 시원하게 뻗어나갔다. 마지막 순간, 일그러지는 풍정기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 *



“저, 정말 당신은…….”

호수 위의 물결처럼 잔잔하게 침잠되어 있던 마뇌 풍정기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진저리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제아무리 천망의 계략을 펼쳤다 한들, 무심하게 깨버리는 저런 사내를 어느 군사가 좋아할 수 있을까.

한 방울이라도 닿는 순간 모든 혈을 파괴시킨다는 독 중의 독인 사혼고.

한 번 박히면 죽을 때까지 피를 쏟게 만드는 악마의 병기 암혼비표.

세외 사세와 천마신교의 정예로 이루어진 인의 장벽.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중독되는 순간 한줌의 내공도 쓸 수 없도록 만든다는 연미산.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저 사내의 마지막 발걸음만큼은 막지 못했다.

“정말… 징그러운 놈이었소.”

마교연합의 한 축이자 세외 삼대세력 중에 하나로 꼽히는 소뢰음사의 혈불은, 치가 떨린다는 눈으로 시체가 된 담천우를 응시했다.

거칠 것이 없어 보였던 폭풍 같은 행보는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거짓말같이 멈춰 있었다.

폭혈공으로 인한 마지막 숨결이 드디어 사그라진 것이었다.

등에 치명적인 관통상을 입은 상태로도 일천을 더 베어 넘기던 그 괴력은 이해불가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정작 풍정기는 답을 하지 못했다.

담천우가 최후의 순간 중얼거린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에 두고 보자니…….’



* * *



“북방사신, 비록 당신은 적이지만 실로 같은 남자로서 존경할 만한 사내였소.”

시체로 산을 덮은 성곽 어딘가에서, 붉은 갑주를 입은 고위 장수 하나는 감탄과 공포가 혼재된 눈빛으로 사내를 응시했다.

북방사신이라고 불린 남자는 흑빛의 철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철가면의 중간 중간 부서진 이음새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의외로 젊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북방사신은 장수의 감탄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전혀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장수는 그 시선을 따라가다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단신으로 이뤄낸 피의 협곡. 그것은 실로 끔찍하면서도 장엄한 것이었다.

“공주마마…….”

하지만 괴물이라고 생각했던 북방사신의 입에서 새어 나온 것은, 삶의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듯한 메마른 한 마디였다.

적장에게서조차 존경을 받던 사내는 지금 이 순간 이미 죽음을 각오한, 아니 죽음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삶은 아무런 희망도, 의미도 없었다.

꿈틀.

순간, 장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렇지 않아도 아슬아슬하게 성곽 외벽에 서있던 북방사신이었는데, 정신을 잃었는지 그 아래 천애절벽이라고 할 만큼 깊은 협곡으로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대장군!”

“내버려둬라.”

장수는 부하의 다급한 외침에도 천천히 손을 내저었다.

까마득한 단장절애. 그 어떤 자라 할지라도 살아날 방법은 없어 보였다.

“이미 폭혈공을 쓴 놈이다. 살아 있을 리가 없지. 이만 본대로 복귀한다.”

“충(忠)!”

장수는 마지막으로 북방사신이 떨어져 내린 협곡을 바라보며 얕은 한숨을 토해냈다.

‘혹여 살아있다 해도 반병신이 되었을 테지. 만약에 살았다면 쥐 죽은 듯이 사는 게 좋을 것이오. 지킬 것도 이미 다 사라졌을 테니.’



* * *



[환혼주]

만인의 피를 정제하여 만든 정수로서, 미리 마셔두면 최후의 순간 단 한 번, 다른 사람의 몸을 빼앗아 다음 생을 이어갈 수 있다.

단, 죽은 사람과 치환될 몸은 조건이 같아야 한다.



* * *



나는… 무엇일까.

존재(存在)하는 것인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지금은 현생인가, 아니면 명계인가.

그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허무로 돌아간 것인가.

혼란스럽다.

환혼술. 거짓말 같은 이야기.

나는 정말로 믿었던 것일까?

모르겠다.

어둠 속의 끝없는 혼란은 길을 제시하지 않은 채 갈래와 갈래 사이를 비틀었다.

나뭇가지처럼 생긴 갈래의 끝은 어떤 것은 비틀어져 있었고, 어떤 것은 가시덤불처럼 날을 세우고 있었다.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하나의 길.

그것만이 오롯이 빛나고 있었다.

비록 생을 다하는 별똥별처럼 흐렸지만, 그것은 분명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을 향하여 담천우는 본능적으로 손을 내뻗었다.

그 순간, 담천우의 영혼 앞에 드리웠던 검은 장막이 걷혔고, 누군가의 일생 아니 기억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떠나겠습니다.”

십오 세 정도의 소년.

아직은 앳되고 어려 보이지만, 야무지게 다물린 입술하며 작지만 굳건한 눈매는 의지가 강해 보였다.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선풍도골의 노인.

“쯧쯧쯧, 이 천지분간 못하는 벌거숭이 같은 놈. 네놈처럼 덜 떨어진 녀석이 한손을 보탠들, 밑 빠진 독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이미 결심이 섰습니다.”

“꼴도 보기 싫다. 썩 꺼지거라!”

역정이 난 듯 홱 돌아앉는 노인.

소년은 그 돌아선 등을 향해 구배지례를 올린 후 방을 나섰다.

그리고는 어딘가로 향하는 소년.

그렇게 그가 간 목적지는 비밀스런 조직이었다.

그곳에서 소년은 사람 베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시간은 흘러 흘러 홍안의 소년은 어느새 청년이 되었고, 자신이 살아온 날 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더운 피를 묻히게 되었다.

전장에서 때로는 암계에서.

원래부터도 범상치 않았던 소년의 무력은 점점 더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소년은 중과부적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개인으로서의 그는 강했지만, 혼자 힘으로는 명백히 한계가 있었다.

사부의 말대로 이미 고구려라는 큰 배는 풍랑을 만나 난파 직전에 있었다.

그렇게 현실의 벽에 부딪혀 괴로워할 때쯤, 청년이 된 그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열정 많은 청년의 마음을 오롯이 빼앗아버렸다.

청년은 이제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닌, 그녀를 지키는 길을 택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청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나 하나를 지키지 말고 만인을 구하세요. 그게 장군의 길입니다.”

청년은 쓸쓸히 돌아갔다.

그로부터 얼마 뒤…….

나라는 망했다.

청년은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바에야 그녀라도 구하겠다!

한달음에 전장에서 벗어나 그녀에게로 달려온 청년.

하지만 그가 보게 된 것은, 이미 싸늘하게 죽어버린 시체였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은장도가 힘없이 들려 있었는데, 분명 자기 자신을 해하는 데에 쓰였으리라.

그 처절하고도 비참한 죽음은, 그러나 그녀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다.

히히덕거리며 시간(屍姦)을 하고 있는 적장의 모습.

그걸 보는 순간, 청년은 눈이 돌아가 버렸다.

“네, 네놈들이 감히! 죽여 버리겠다!”

꽝!

마지막은 내공을 스스로 폭출시켜 적들을 휩쓸고 있는 전신(戰神)의 모습이었다.

순간, 짙게 깔렸던 어둠이 빛으로 화했다.

이번에는 전혀 다른 장면이 담천우의 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