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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필적 고의

2화








“그러니까, 본인은 서문옥 씨 말만 믿고 피해자에게 땅을 소개 시켜 준 거다, 이 말입니까.”

경찰에서 올라온 피의자 조서에도 눈앞의 사기범은 피해자와 만난 적 없다며, 자신과 부동산 거래를 한 사실조차 없다고 발뺌하던 사람이었다.

실제로 대포 통장을 이용한 탓에 피의자와 피해자가 돈을 주고받은 내역이 명확하지 않았다.

“그렇다니까요, 검사님! 나는 중간 수수료나 먹는 중개업자지, 사기꾼이 아닙니다!”

“그런데 피의자를 이 야산과 인근 논, 밭에 자주 봤다는 동네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땅을 팔아 달라고 하니까 어떤 곳인가 해서 둘러보는 게 당연하지! 어디에 있는 매물인지도 모르고 그냥 팔아요?”

“피의자가 동네에 올 때마다 사람들이랑 같이 왔다는데, 피해자가 한 명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게 무슨……!”

이헌이 고소장을 피의자에게 내밀었다. 모두 4건. 관할서가 모두 달랐다. 피해자가 한 명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고소장을 본 순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란 건 피의자가 아닌 신문을 지켜보던 다현이었다.

“피의자가 땅 주인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던 서문옥 씨가 땅을 분할해서 판 건 아닌데, 왜 그 땅을 산 사람은 다섯 명일까요.”

“그, 그거는…….”

“땅 주인이 서문옥 씨든 김경찬 씨든 피의자는 땅을 무려 다섯 명에게 팔았고, 땅값으로 50억을 제외한 5억 원을 중개 수수료로 챙긴 겁니다. 맞습니까.”

“…….”

“50억은 모두 대포 통장으로 들어갔으니 땅 주인이라는 서문옥 씨에게 갔는지 아니면 피의자 주머니로 들어갔는지는 곧 밝혀질 겁니다. 대포 통장이라고 해서 추적이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요.”

실소유주가 누가 됐던, 피의자가 사기를 쳤다는 게 입증된 셈이었다.

얼굴이 상기된 피의자는 이헌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회피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검사의 신문에 피의자가 제대로 보기 좋게 넘어간 꼴이었다.

다현은 곁눈질로 이헌을 힐긋 바라봤다.

그는 한낱 실무 실습생에겐 그저 존경스러운 검사님이었다. 피의자를 가지고 논다고 표현할 만큼 담담하고 태연하게 빈틈을 공략했다.

초범이면서도 대범하게 사기를 펼친 피의자의 어리숙한 모습을 꿰뚫어 본 이헌의 조사 방향은 일반적이고 당연한 절차들이었지만 그녀에겐 그저 경이롭기만 했다.

훗날 자신이 검사가 되면 이헌처럼 빈틈없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싶었다.



* * *



서울 중앙 지검으로 실무 실습을 나온 지 3주째.

검사 직무 대리로 발령이 났을 뿐 연수원 실습생 신분이라 다른 평검사들처럼 야근이 없었다.

덕분에 출근할 때 몸과 마음은 상쾌했다.

다현은 카페에 들러 커피를 샀다.

검사님이 좋아하는 아메리카노는 투 샷을 추가하고 계장님은 카페라테, 실무관님은 카페모카.

그렇게 세 잔을 테이크아웃 해 걸음을 재촉했다.

출근 시간 전이지만 검사실은 불이 켜져 있었고 전날도 귀가하지 못해 몰골이 엉망인 계장님과 실무관님이 책상에 뻗어 있었다.

“……아.”

마치 자신의 미래를 보는 듯해 그녀의 입에선 안타까움의 탄식이 쏟아졌다.

안타까운 시선을 뒤로하고 다현은 커피를 지도 검사에게 건네며 미소를 지었다.

“커피 드세요.”

벌써 2주째 그녀는 아침마다 423호 검사실의 커피 배달을 자처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론 혼자 칼퇴근을 해서 미안한 마음이라고 포장을 했지만, 음흉한 흑심이 자리하고 있는 건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덕분에 지도 검사의 커피 취향을 알게 됐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권다현.”

“네?”

눈앞으로 불쑥 들어온 커피를 확인한 이헌이 고개를 들었다.

“네가 여기에 커피나 주러 온 사람이야?”

그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서 있는 다현을 보곤 까칠하게 말했다.

괜히 한마디 더 붙여 보려고 했다가 낭패가 따로 없었다. 조용히 커피나 내려놓고 말 것을.

다현은 쭈뼛거리면서도 커피를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이걸 내려놔, 버려, 어쩌지 하면서 이헌의 눈치를 살폈다.

“앞으로 커피는 됐고, 일이나 열심히 배워.”

그렇게 퉁명스레 말하며 그는 손에서 볼펜을 놓고 다현의 손에 들린 커피를 휙 가져갔다.

괜히 밉보이나 싶어 시무룩해지던 다현의 얼굴이 환해진 건 순식간이었다. 이헌이 커피를 한 입 마셨다.

“내일 불법 도박 사건 피의자들 들어오기로 했으니까 네가 해 봐.”

다현은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대답조차 망설였다.

“왜. 싫어?”

피곤함에 무거워진 눈꺼풀을 얌전히 내리깔고 있던 그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눈을 떠 다현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 아뇨!”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손사래를 치며 그녀는 대답했다.

지금껏 큰 소환 조사가 필요 없는 약식 기소 사건들만 처리해 왔고 경찰 조사만으로도 충분한 사건들만 맡은 탓에 자칫 잘못했다가는 지도 검사에게 누가 될 수 있어 그녀는 덜컥 겁이 났다.

지금 423호 검사실에서 조사 중인 불법도박 사건은 덩치가 제법 컸다.

점조직으로 구성된 탓에 피의자를 가려내는 것도 힘들었다. 현행범으로 체포해 온 조직원들도 잔챙이들이라 잘못하다간 기소 중지를 해야 할 판이었다.

하겠다고 했으니 해야 하는데 사건에 대한 기록만 한 트럭. 참고인이 오기 전까지 기록문을 빠짐없이 살펴야 했다.

“잘했잖아. 잘할 거야.”

“…….”

긴장에 얼어붙었던 몸이 녹아내리는 거 같았다.

“궁금한 건 물어보고.”

“네, 알겠습니다!”

두꺼운 기록문을 건네받으며 다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로 돌아와 기록문을 살피면서도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헌을 자신도 모르게 힐긋거렸다.

차갑던 눈빛도 이젠 마냥 따스해 보이고 목을 옥죌 만큼 어둡던 아우라도 후광으로 바뀌어 있었다.

철야 속에서도 말끔한 몰골이 남들과 비교될 정도였다.

비록 구겨진 셔츠 차림으로 기록문을 살피며 진중하다 못해 미간에 깊게 새겨진 주름까지도 멋있어 보여 미칠 지경이었다.

자기 일에 몰두하는 남자가 이토록 매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일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지도 검사인 이헌은 그 누구보다 후배인 자신을 하나부터 열까지 챙기고 가르쳤다.

기록문이 산처럼 쌓인 이 와중에도 그는 염려를 잊지 않았다.

동경의 대상이던 그는 어느새 누구보다 가까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가 좋아졌다.

그가 좋다.

그를…… 좋아한다.

검사 문이헌이 아니라, 남자 문이헌을.

첫사랑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와 그녀를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여 갔다.



* * *



국립 과학 수사 연구원



콘크리트 건물이 가슴을 짓누르고 숨통을 조르는 거 같았다.

입구에서 좀처럼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아 다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초조한 듯 손톱을 뜯었다.

검사 직무 대리로 실습 기간에 부검하게 될 줄 몰랐던 사람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는 식은땀까지 흘리는 모습을 보였다.

막상 그 시간이 다가오자 초조하고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다현은 짙은 한숨만 연신 내뱉어댔다.

“후우. 긴장하지 말자.”

423호 검사실에 배당된 살인 사건의 피해자 부검이 있는 날이었다.

치정으로 추정된다는 경찰 조사 결과와는 달리, 붙잡힌 용의자는 시종일관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어 부검으로 정확한 사인을 밝혀내고 증거가 될 만한 단서를 찾아내야만 했다.

“안 들어가고 뭐 해.”

그때 등 뒤로 묵직한 음성이 그녀의 넋 나간 정신을 깨웠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 다현은 말끔한 슈트 차림의 이헌과 마주했다.

그는 담담하다 못해 조금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검사의 모습이었다.

부검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다현을 지나쳐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모습에 그녀는 심호흡을 크게 내뱉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억지로 뗐다.

“검사, 판사, 변호사. 뭐 할 거야.”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그가 물었다. 한껏 긴장한 채 땅만 쳐다보고 있던 다현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이헌을 바라봤다.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사적인 걸 묻지 않던 이헌이었다.

그 탓일까. 그녀는 불규칙적으로 날뛰던 심장이 조금이나마 평정심을 되찾아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물음에 입을 떼 대답했다.

“검사 할 겁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초지일관이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꿈과 진로가 바뀐 적 없었다.

“그럼 시체 보는 거 익숙해져야 해. 정신 차려. 너 혼자 아니니까.”

별거 아니었다. 그저 긴장하고 무서워하는 실습생에게 건네는 선배 검사의 당연한 위로의 말이었다.

그 당연한 말들에 쓸데없이 심장이 나대니 미쳐 버릴 노릇이다.

“경찰에서 올린 조서, 봤어?”

이헌의 물음에 다현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의자는 묵비권 행사 중이고, 모른다고 딱 잡아떼고 있어. 현장 조사에선 피해자 혈흔 말고 나온 게 없어. 사건 현장도 깨끗하고.”

“알고 있습니다.”

“손톱만 한 작은 증거라도 시체엔 남는 법이야. 부검에서 아무것도 안 나오면 범행을 입증할 단서가 없어.”

“만약 부검에서 아무것도 안 나오면…… 그땐 어떻게 됩니까.”

굳게 닫힌 부검실 문고리를 붙잡고 그가 말했다.

“유치장에서 풀어 줘야지.”

문이 열렸다. 싸늘한 기운이 전신을 휘감았다.

부검실로 들어가는 이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불안감은 다시 그녀를 덮쳐 왔다.

유리 벽 너머에서 부검을 준비 중인 법의관들이 있었고, 이헌은 그들과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멸균된 가운과 글러브를 끼고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선 다현은 그를 힐긋거리며 가운을 챙겨 입고, 글러브를 끼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부검실로 들어가는 이헌을 뒤따랐다.

“부검 시작하겠습니다.”

쿵쾅쿵쾅 불안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부검실 안의 모든 이들에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부검대 위에 올라와 있는 시신에 시선조차 주지 못하고 고개를 재빠르게 숙여 묵례했다.

고인에 대한 묵례가 끝나기 무섭게 차갑고 날카로운 메스로 칼자국이 난도질 되어 있는 시신의 목부터 배꼽 아래까지 길게 그어 내리는 모습에서 다현은 숨을 죽였다.

입에서 신음도 나오지 않았다.

태연하게 부검을 바라보고 있는 이헌의 곁에서 실눈을 뜬 채 시신을 힐긋거리기 바빴다.

보긴 봐야겠는데 온몸이 칼자국으로 엉망이 된 시신을 본 것이 처음이라 정신을 온전히 붙잡고 있는 것부터가 곤욕이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도 검사인 이헌은 태평하게 팔짱까지 끼고 법의관들의 곁에 서서 시신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기까지 했다.

“이리 와서 봐.”

설마 시신을 보라는 거야?

미친다, 정말.

속이 울렁거려 대답조차 할 수가 없는 다현은 마스크 속에 감춰진 입술을 꾹 깨물고 실눈을 뜨며 슬금슬금 부검대 앞으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