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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 직업, 기업, 단체, 사건 등은 실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허구임을 밝힙니다.

* 작품 속에 존재하는 제도 및 명칭은 실제와 일부 다를 수 있으며, 이는 작가의 창작에 의한 설정임을 밝힙니다.



미필적 고의

1화








햇볕이 따스하다 못해 뜨거운 날.

“떨지 말자, 권다현…….”

깔끔하게 차려입은 치마 정장이 우습게도 무더위에 목덜미 뒤로 땀이 흥건했다.

실습 첫날이라서 오는 긴장감 때문인지 날씨 탓인지는 몰라도 건물에 들어섰을 때, 이미 이마에 땀이 맺힌 상태였다.

다현은 손등으로 이마를 슥, 닦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오늘부터 연수생들 실무 기간 아닙니까?”

“큰 사고 없이 조용히 넘어가야 할 텐데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어렴풋하게 들리는 소리에서 자신을 포함한 동기들을 두고 하는 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부터 사법 연수원 2년 차 연수생들의 실무 수습 기간이었다.

그 탓일까. 검찰청 안이 제법 떠들썩했다.

“작년엔 제법 시끄러웠죠?”

“말이라고. 후배라는 게 부끄러울 지경이었지.”

가만히 듣고만 있는데도 어쩐지 낯이 뜨거웠다.

마치 자신의 미래를 전해 듣고 있는 듯한 기분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검사.

다현이 지금까지 꿈꿔 온 신성하고도 가치 있는 일이었으며, 어릴 때부터 기필코 해내야만 하는 목표였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밤낮없이 공부만 했다.

이렇다 할 추억 하나 없이 학창 시절을 참 재미없이 살았다.

독종이라고 불릴 만큼 노력한 대가로 중, 고등학교 시절 내내 전교 1등은 당연했고 전국 석차에서 1, 2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 결과, 다현은 그렇게 수석으로 한국대 법대에 입학했고, 졸업을 앞두고 사법고시 3차 면접까지 모두 패스하는 기염을 토해 냈다.

그해 사법고시를 본 이들 중 단연 돋보이는 성적으로 1등을 차지한 그녀는 연수원 동기 중 최연소를 자처하며 마지막 학기를 시작했다.

이대로 연수원 성적을 잘 유지한다면 1등으로 수료할 수 있을 것이다.

“후…….”

긴장감에 숨을 크게 내뱉었다.

공부를 잘하는 것과 실전에 투입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상황이었다. 절대 긴장의 끈을 놓쳐서는 안 된다.

띵.

도착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녀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2개월간 지도를 맡아 줄 형사 4부 423호실.

문앞에 선 다현의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검사 직무 대리로 발령받은 권다현입니다.”

문을 열고 검사실에 들어서자마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쩐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게 이상하다고 느낀 찰나, 저 멀리서 묵직한 음성 하나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배당 올 때까지 얌전히 앉아 있어.”

흠칫하며 고개를 들자 책상 앞에 앉아 기록문을 검토하고 있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지난밤 퇴근하지 않은 게 분명해 보이는 구겨진 셔츠 차림의 그는 숨 막힐 정도로 차가운 분위기를 내뿜었다.

짙은 일자 눈썹 아래 관찰이라도 하는 듯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눈매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오뚝한 콧날과 날렵한 턱선은 그의 인상을 더욱 차갑고 냉랭하게 보이게 했다.

섣불리 말을 걸 수도,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권위적인 모습이었지만 그마저도 사람을 끌어당기기 충분했다.

“앉아 있으라는 말, 못 들었나? 왜 거기 멀뚱히 서 있지?”

“네? 아, 네!”

매서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에 그녀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쭈뼛쭈뼛 텅 빈 책상 앞에 앉았다.

423호 검사실의 수사관과 실무관이 알은척을 하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녀의 신경은 온통 지도 검사에게 향해 있었다.

기록문들이 가득 쌓인 책상 위에 비뚤게 놓인 명패가 그를 대변했다.



검사 문이헌 檢事 文怡憲



저 사람이 문이헌……?

사법 연수원을 넘어 한국대 법대에서 소문이 자자한 남자.

TV에 나오는 이들 못지않게 유명한 선배가 제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다현은 얼떨떨하면서도 식은땀이 삐죽 났다.

문이헌.

앞으로 그와 함께할 2개월의 짧은 실습 기간이 그리 순탄치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 * *



그로부터 일주일.

다현은 검사 직무 대리로 발령을 받은 423호 검사실이 형사부에서 제일 배당이 많은 곳이라는 걸 몸소 깨닫게 됐다.

덕분에 각종 사건을 직,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어서 좋았다.

연수생 동기 중 최단 시간에 가장 많은 기록을 검토했다고 자부할 만큼 그녀의 지도 검사는 중앙 지검 형사부를 통틀어 가장 일이 많았다. 개중에 무난한 절도 사건 등은 직접 조서를 꾸미기도 했다.

“권다현.”

사기 사건의 참고인 조사가 끝난 이헌이 나지막이 다현을 불렀다.

다현은 그의 부름에 책상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바짝 들었다. 그러고는 마주 보고 앉은 지도 검사를 쳐다봤다.

이헌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다가오라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다현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쭈뼛쭈뼛 그에게 다가갔다.

일주일째 한 방에 마주 앉아 있지만,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좀처럼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제 숨통을 바짝 조이는 기분이었다.

문이헌 검사 앞에만 서면 피의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죄를 술술 자백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결정문 작성은?”

“끝났습니다!”

다현의 우렁찬 대답에 가져와 보라는 듯 그가 손짓했다. 그녀는 재빠르게 작성을 끝낸 결정문을 프린트해 이헌에게 공손히 건넸다.

강남에 있는 유명 주얼리 숍이 탈탈 털렸다.

VIP 고객을 대상으로 철저한 예약제를 통해 운영되는 곳이었다.

보안은 두말할 것도 없으며, 심지어 사설 경비 업체가 상주 중임에도 보란 듯이 절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물이 풀리면서 절도범은 생각보다 쉽게 검거되었고, 현재 유치장 신세를 지고 있었다.

검사 직무 대리로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작성한 공소장이었다.

다현은 조마조마한 마음에 애꿎은 입술만 깨물며 제가 쓴 공소장을 살피는 이헌의 얼굴만 힐긋거렸다.

“공범은?”

이헌이 꺼낸 첫마디에 다현은 당황해 눈만 깜빡거렸다.

공범이라니. 경찰에서 넘어온 기록엔 공범의 ‘공’ 자도 없었다.

“사설 경비가 24시간 상주하고 보안이 까다로운 곳을 쉽게 뚫고 들어간 놈이 장물 처리를 그렇게 허술하게 했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다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가? 그래.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이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경찰에서도 공범을 조사했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고 피의자가 단독 범행이라고 자백을 한 탓에 사건은 그렇게 검찰로 송치되었다.

심지어 피의자는 절도 전과가 있었고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나온 지 이제 겨우 1년이 지난 상황이었다.

“증거가 없으면 찾아야지.”

“피의자는 절도 전과 6범에 동일 범죄로 교도소에 복역한 사실이 있습니다. 당시에도 단독 범행이었고 장물을 내다 팔다가 경찰에 덜미가 잡혔습니다. 장물을 내다 파는 수법이 이전 범행 수법과 동일합니다. 현재 주변인 탐문 조사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고 피의자 주변 인물 중에서 의심되는 이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현은 제 생각을 망설임 없이 뱉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헌의 눈도 마주치지 못했을 테지만 어쩐 일인지 목청이 높아진 듯도 했다.

이헌은 살펴보던 공소장을 조용히 덮었다. 뭔가 잘못된 건가 싶어 다현은 눈을 깜빡이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잘했어.”

공소장을 다현에게 건네며 그가 말했다.

“경찰 조사만 믿고 갈 수도 있는 사건이었는데 피의자 조사까지 직접 하고, 공소장도 잘 썼어.”

이헌의 목소리가 이렇게 좋았나?

제게 길게 말을 건넨 건 처음이었다. 다현은 너무 놀라 입을 떼지 못했다.

뒤에서 수사관과 실무관이 문 검사님한테 칭찬받은 사람은 처음이라는 호들갑도 그녀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오직 그의 목소리만 또렷하게 들릴 뿐이었다.

“공소장 들고 부장 검사님한테 갔다 와.”

다현은 이헌에게 공소장을 받아 들고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검사실을 나섰다.

결정문을 쓰면 지도 검사와 부장 검사, 차장 검사에게 차례대로 검사를 받는다.

부장 검사실에 들어가서 결정문을 검사받으면서도 귓가엔 계속 지도 검사의 목소리만 맴돌았다.



“잘했어.”



쿵쿵쿵. 심장이 방망이질 치듯 뛰어 댔다.

그 짧은 칭찬 한마디에 왜 심장이 주체가 안 되는 거야. 왜!

“연수원 성적이 좋다더니, 첫 공소장도 잘 썼네.”

부장 검사에게도 당연하다는 듯 칭찬을 들었다. 다현은 그저 멋쩍은 듯 웃으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 뒤로 계속 이어진 부장 검사의 칭찬과 얼굴 보기가 쉽지 않은 차장 검사의 칭찬까지 받았지만 그들의 말은 조금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오로지 지도 검사의 얼굴만 눈앞에 둥둥 떠다니고 부드럽던 목소리가 맴돌 뿐이었다.



* * *



부동산 사기 사건의 피의자 소환 조사가 있던 날이었다.

“권다현.”

전날 경찰에서 올라온 송치 사건들을 살펴보고 있던 다현을 지도 검사인 이헌이 불렀다.

절도에 특수 폭행까지, 다채로운 기록문에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던 그녀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조사실 들어와.”

“네? 제가요?”

피의자 소환 조사가 있을 조사실에 들어오라는 말에 다현은 제법 놀라 하며 눈을 껌뻑였다.

조사실엔 아직 한 번도 가 보지 못했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피의자 신문은 생경하기만 했다.

“왜, 싫어?”

“아, 아뇨!”

“두 달 동안 책상에 앉아만 있을 생각이었어? 뭐든 보고 배워야지.”

“네!”

지도 검사가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 줄 거라는 생각은 버리고 실무 실습에 임해야 한다던 동기들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서늘했던 첫인상과는 달리, 이헌은 지도 검사로서 맡은 바 역할에 충실했다.

오후 4시만 되면 검사실로 밀려들어 오는 배당이 산처럼 쌓였다.

미제를 만들지 않으려 야근도 불사하는 이헌을 보면서 그를 향한 동경이 조금씩 커져 갔다.

그와 함께 조사실에 나란히 앉아 있으니 괜히 기분이 묘했다.

“등기부 등본에 실소유주는 김경찬 씨입니다. 피해자에게 땅 주인이라고 소개한 사람은 김경찬 씨가 아니던데, 혹시 피의자도 땅 주인이라던 서문옥 씨에게 피해당한 겁니까.”

땅 주인은 섭외된 연기자였고 눈앞에 앉아 있는 피의자가 모든 것을 지시했다고 이미 진술을 받은 상황에서 이헌의 신문은 다소 의아하게 들려왔다.

이게 무슨 앞뒤 상황 없이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사기의 주범인 피의자에게 너도 땅 주인이라고 찾아온 공범에게 속은 거냐고 묻고 있다니.

“나도 피해잡니다! 그 땅 팔겠다고 먼저 찾아와서 10억만 받아 달라고 했다니까요! 나머진 전부 나더러 챙기라고 먼저 그랬습니다.”

피의자가 언성을 높이며 테이블을 내려쳤다.

본인도 피해자라는 말을 우렁차게 내뱉으며 억울하다는 듯 이헌을 쳐다봤다.

시종일관 뻔뻔하리만치 모른다던 피의자가 순식간에 안면을 바꾸고 나오자 다현은 황당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