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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에 등장하는 배경, 지명, 인물, 종교, 기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 탐나(TAMNA)




<01>







열여덟의 겨울.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뜬 시간은 새벽 1시 15분. 평소보다 귀가 시간이 늦어져 분명 혼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날따라 집 안은 소름 끼치도록 어두웠고 고요했다.

달라진 기류를 알아차리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매캐한 가스 냄새.

자욱이 퍼진 연기.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미묘하게 어그러진 듯 어딘가 이상했다.

희뿌연 기체 사이로 잔잔히 흐르는 피아노 소나타까지도.

‘Moonlight Sonata’

베토벤의 월광.

달빛이 비치는 어둑한 호수 위를 걷는 듯, 차분하고 낮은 음률은 서정적으로 죽음의 평온을 기도한다. 생기가 사라진 고적한 공간으로 웅글게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가 절망을 말한다.

불안하고, 또 위태롭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오래된 나무 바닥재가 삐그덕, 삐그덕 맞물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기분 나쁜 섬뜩함을 느끼며 안방 앞에 다다랐을 때. 소녀는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아…….”

문틈 사이, 화장대 거울에 반사된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소녀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엄청난 공포가 파도처럼 밀려와 단숨에 사고를 집어삼켰다.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히끅, 딸꾹질만 터져 나올 뿐, 가느다란 비명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월광. 적연한 피아노 곡조가 괴물의 손이 되어 우악스럽게 입을 틀어막는 듯했다.

“사, 살려…….”

목소리를 힘껏 짜내 봤지만 무리였다. 절박함은 끝내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하고 모조리 목구멍으로 집어삼켜졌다.

알잖아. 이건 현실이 아니야.

힘껏 부정해 봐도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너무나 사실적이었고, 선명했다. 심장이 당장 파열될 것처럼 세차게 뛰었다.

뚝, 뚜욱. 뚝.

알 수 없는 액체가 규칙적인 간격으로 바닥에 떨어졌다.

창밖의 먹구름이 느린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문을 뚫고 창백한 달빛이 흘러들자 어둠에 갇혀 분간이 어려웠던 것들이 하나둘씩 환히 밝혀졌다.

그제야 코를 찌르는 비릿한 냄새의 원인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안 돼.”

소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에선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펑! 퍼엉!

고막이 찢길 듯한 폭발음이 고막을 강타했다. 숨이 막히고 알 수 없는 뜨거움이 전신을 휘감았다. 부엌에서부터 시작된 화염이 무서운 속도로 나무 바닥재를 타고 소녀가 서 있는 곳을 향해 번져 왔다.

“아, 아윽! 쿨럭……!”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연기에 소녀는 고통스럽게 기침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죽어 버린 엄마의 부릅뜬 눈이 살려 달라 애원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이성은 멀어지고, 원초적인 본능만 남았다.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꿈에서, 현실에서.

끔찍한 이곳에서.

결국 나는, 도망쳤다.



* * *



“허억! 하아, 하…….”

해성은 발작하듯 거친 숨을 쏟아 내며 잠에서 깨어났다.

실핏줄이 터진 엄마의 새빨간 눈은 잊을 만하면 악몽으로 찾아왔다. 나를 두고 도망친 너를 결코 용서하지 않겠노라 저주하듯. 같은 날짜, 같은 시간의 장면은 10년째 집요하게 반복되었다.

열어 둔 창틈 사이로 시린 바람이 훅 밀려들자,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몸에 한기가 돌았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해성이 팔을 뻗어 창문을 닫았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샜다.

“일어났네? 깨우려고 했는데.”

때맞춰 은영이 방으로 들어왔다.

은영은 중앙경찰학교에서 만난 동기였다. 둘은 운 좋게 백서지구대에 발령받아 1년의 시보 경찰 인턴 기간 동안 서로에게 의지하며 견뎠다. 같은 기동대를 나왔고,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함께 근무했던 만큼 그 인연이 깊었다. 이 정도면 운명이란 선배들의 말이 무색해지게 저번 달 인사 발령 시즌에 맞춰 그 길을 달리하게 된 참이다.

뜬금없이 보고 싶다며 자정 시간에 떡볶이를 사 들고 불쑥 찾아온 은영과 수다를 떨다 잠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시간을 확인한 게 새벽 2시였는데, 다 죽어 가는 몰골의 해성과 달리 은영은 활력이 넘쳐 보였다.

“잠은 잘 잤어?”

해성은 대답이 없었다.

은영이 재빨리 해성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 하며, 부르튼 입술과 이마에 맺힌 식은땀까지. 이제 좀 괜찮아졌나 했더니.

“너, 설마. 또 그 꿈 꾼 거야?”

“그냥, 뭐…….”

“형사 생활 괜찮은 거 맞지?”

은영이 근심스럽게 물어 왔다. 지구대에서 함께 근무하던 시절, 야간 근무 도중 대기 시간에 잠시 휴식을 취하려 눈을 붙일 때면 해성은 발작과 경련을 반복했다.

한 달에 두 번 이상. 스트레스 정도에 따라 횟수는 더 늘어났다.

은영은 해성의 과거를 아는 유일한 측근이었지만, 악몽에 괴로워하는 동기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 비번 날이 겹칠 때마다 집에서 함께 있어 주는 게 전부였다.

“괜찮아. 나 같은 사람이 한두 명도 아닐 거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위험 현장에 노출된 경찰들이 종종 겪는 증상이었다. 그러나 해성이 겪고 있는 병은 그 원인이 조금 달랐기에 문제였다.

“넌 언제 출근해? 아, 오늘 지구대 야간 근무라 했지.”

해성은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부럽다.”

협탁 위에 놓인 알약을 익숙하게 털어 넣는 해성을 안쓰럽게 흘겨보던 은영이 바락 소리쳤다.

“좀! 물이랑 같이 먹으래도 그런다. 계집애야.”

“아, 깜빡했다.”

“어휴, 진짜…….”

은영은 속상한 마음이 컸다. 저런 상태로 어떻게 강력계에서 버티고 있는 건지. 그 고집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해성의 선택이 순간적인 충동은 아니었다는 건 은영도 잘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신중히 고민했다. 앓고 있는 병으로 하여금 동료들에게 도움은커녕 폐만 끼치는 건 아닐까, 인사 발령 시즌이 다가올 때마다 해성은 수도 없이 망설이고, 고민하던 끝에 매번 강력계 지원을 포기했다.

정례 사격 훈련이 있는 날이면 해성은 무조건 만 발을 쐈고, 주기적인 체력 검정이 있는 날이면 단 한 차례도 빠짐없이 1등급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꺼려 하는 궂은일 또한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겉으로 보기에 해성은 누구든 탐내고도 남을 인재였다. 그곳이 아무리 여경을 기피하기로 유명한 짐승들만 득실거리는 강력계라 할지라도 말이다.

“정 못 버티겠으면 내년에 바로 인사이동 신청하는 거다. 알겠지?”

“어디로. 지원팀으로?”

“어디든!”

“체질적으로 안 맞아. 우리나라 치안 좋잖아. 여태까지 살인 사건은 한 번도 안 떨어졌어. 걱정 마.”

해성이 은영을 안심시키며 옷장을 열었다. 사복 근무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낯설고 어색했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등 뒤로 은영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이번에 너희 팀 팀장 새로 온다 했지? 후, 벌써부터 걱정이네.”

청바지 버클을 채우던 해성의 손이 멈칫했다.

“……왜?”

“그 사람 말 많더라. 그쪽 인사계에서 근무하는 직원이 아는 선밴데, 저번에 길에서 우연히 만났거든. 마침 네 생각도 나서 물어봤었어.”

“알고 있대?”

“그래. 어마어마하게 유명하단다. 피도 눈물도 없는 미친놈으로.”

난 또 뭐라고. 해성이 비식 웃음을 흘렸다.

“이쪽 사람들이 다 그렇지 뭐.”

“아니야. 좀 달라. 검거율도 높고 실력도 다 괜찮은데, 문제는 성격이야. 완전 사이코래. 위아래 없는 건 기본이고. 비주얼만 끝내주는 또라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다니까?”

샤워는 경찰서 가서 해야겠다. 패딩을 걸친 해성이 흐름을 끊었다.

“가야겠다. 너도 쉬다가 출근해.”

“야, 이해성!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은영은 현관으로 멀어지는 해성의 뒤를 다급히 쫓았다.



* * *



추위는 좀처럼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작년 12월부터 시작된 혹한은 새해가 밝고 2월이 될 때까지도 길게 이어졌다. 기상청 말을 빌리자면, 50년 만에 한반도를 강타한 기록적인 한파라고 했다.

살갗이 뜯길 것 같은 추위에 해성은 부르르 어깨를 떨며 경찰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내 집 안방처럼 익숙해진 관악경찰서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남경찰서는 규모부터가 대단했다.

새삼스레 경찰서 내부를 둘러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강력 2팀 팻말이 붙어 있는 문 앞에 다다랐다.

해성은 추위와 긴장으로 꽁꽁 얼어붙은 두 손에 하아, 입김을 불어 넣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문고리에 손을 얹은 순간, 불현듯 은영의 경고가 떠올랐다.



‘내 말 무시하지 말고 잘 새겨들어. 왕자님 같은 얼굴, 절대 믿지 마. 공감 능력 없단 말도 있어. 피해자나 유가족한테 표정 변화 한번 없이 독설 뱉는 건 기본이고. 평소엔 말 한마디 듣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무뚝뚝한데, 살인 사건에 피만 봤다 하면 환장을 한다더라. 열정? 정의감? 그런 거 모르는 사람이래. 말이 괜히 돌겠어?’



꺼림칙하다는 느낌을 받은 건, 그 맥락에서였다.



‘경찰대 수석으로 졸업해서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에이스였는데, 사고 한탕 크게 쳐서 강남경찰서로 온 거래. 뒤 봐주는 사람이 있는 건지 실적 인정받아서 징계나 강등 없이 이 정도로 끝난 거라는데, 결국 좌천이나 다름없잖아.’

‘좌천?’

‘그래! 일단 한번 꽂혔다 하면 수칙이고 나발이고 없는 사람이란다. 민원 폭주 단골. 어떻게 경찰이 됐나 싶을 정도라는데, 나사 하나 빠진 거야, 분명히.’



때아닌 충격에 망설이고 있는 사이, 문이 활짝 열렸다.

상대는 미처 해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얼굴을 확인할 새도 없이 널찍한 어깨에 해성의 이마가 부딪혔다.

그 반동으로 남자의 손에 들려 있던 무언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자연스레 해성의 시선도 밑으로 향했다.

경찰 마크와 POLICE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떨어진 물체의 정체는 경찰증이 들어 있는 목걸이다. 언뜻 봐도 놀라울 정도로 걸출한 외모가 박힌 증명사진이 보이고, 그 밑에 적혀 있는 이름 세 글자가 눈에 담겼다.



「차 강 현」



‘이름이 뭐였더라, 차……. 아, 생각났다! 차강현. 차강현이었어.’



차강현. 은영이 알려 준 그 이름을 속으로 곱씹으며 허리를 숙였다. 해성이 그의 경찰증을 조심스럽게 주워 든 때였다.

“뭘까, 이건.”

귀를 휘감는 나직한 음성이 고요하게 흘러나왔다.

해성이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남자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무감정한 눈으로 해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