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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끝이 유난히 길게 빠진 입꼬리와 웃을 때 생기는 입 옆 세로 주름을 보고 사람들은 매력적인 미소라고 칭찬하지만, 설희는 저 웃는 모습을 보며 꼭 독사 같다고 생각했다.

홀린 듯 보고 있다 보면 어느 틈에 날카로운 독니로 사람을 콱!

“알아. 알았으면 집에 안 왔을 텐데, 그치?”

서하가 허리를 굽혀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살짝 웃으며 드러낸 독니에 정곡을 찔려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집이라고 꼬박꼬박 돌아오고. 참 착해, 우리 설희.”

허리를 굽힌 채 서하가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지만, 설희가 그 손을 툭 쳐 냈다.

그 바람에 그의 오른손에 있던 샴페인 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쨍그랑 소리를 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순간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그렇게 부르지 마.”

“뭐? 우리? 겨우 다정하게 이름 한번 부른 게 죄가 되나. 그래도 나름 한 가족인데.”

한서그룹 후계자와 일개 정원사의 딸이 가족이라니. 서하가 슬픈 눈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손바닥을 하늘 쪽으로 펼쳐 보였다. 억울하다는 제스처에 여기저기서 키득거렸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나 갈게.”

한 발짝 옆으로 움직이자 그가 다시 가로막았다.

우지끈. 바닥에 있던 유리 조각들이 비명을 지르며 으스러졌다. 그 바람에 그의 발이 유리에 베여 붉은 피가 흘렀다. 바닥을 적실 정도는 아니지만, 저 정도 피를 낼 정도면 발바닥이 꽤 쓰라릴 텐데.

“오랜만에 왔는데 축하 인사는 해 줘야지.”

서하가 옆에 있던 테이블에서 샴페인 두 잔을 집어 들어 한 잔을 그녀에게 건넸다. 마치 축배라도 들자는 것처럼. 그 바람에 깨진 유리에 빼앗겼던 정신이 돌아왔다.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좀 해 줘.”

“그럼 안 되지. 나 귀국 축하 하느라 친구들이 와 준 건데. 그럼 얘들 다 내쫓을 테니까 네가 축하해 줄래?”

설희는 휙 몸을 돌려 캐리어를 끌고 수영장 뒤쪽으로 붙어 있는 자신과 엄마의 거처로 향했다.

뒤에서 서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볼륨 좀 더 키워.”



* * *



찬물에 샤워하고 다시 욕실 문을 열자 후덥지근한 열기가 온몸을 덮쳤다. 두피에서부터 다시 땀이 송골송골 차올랐다.

설희는 빠른 걸음으로 선풍기 앞에 털썩 주저앉아 강풍 버튼을 눌렀다. 시원한 바람이 젖은 두피 사이로 파고들며 열렸던 모공이 빠르게 닫혔다.

“시원하네.”

그제야 종일 찝찝했던 것들에게서 조금은 벗어난 기분이다.

“망할 여름.”

설희는 여름이 싫었다.

어디를 가든 끈질기게 따라오는 태양. 그리고 결국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뜨거운 열기.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도 그녀가 여름을 싫어하는 이유는 많았다.

겨울에 태어난 탓인가. 여름이 되면 영 맥을 못 췄다.

게다가 체력이 좋은 편도 아니었기에 중학교 때 여름에는 한 시간 거리의 학교에서 돌아오면 샤워를 하고 그대로 두어 시간 뻗기 일쑤였다. 그건 공부할 시간을 그만큼 뺏기는 것을 의미했다.

값비싼 과외를 받을 수도 없고, 누구처럼 부모님이 데리러 와서 시간을 줄여 주는 것도 아닌데 팔자 좋게 낮잠이라니. 자신을 이렇게 무기력하게 만드는 여름이 싫었다.

그리고 그 여름을 닮은 한서하도.

설희에게 서하는 여름이었다.

어릴 때 그의 이름 ‘하’ 자가 여름 ‘하(夏)’인 줄 알고 여름을 닮았다고 생각을 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안 후에도 서하는 그녀에게 여름이었다.

빛나는 햇살 가득한 여름 말고, 한여름 뙤약볕같이 사람을 뜨겁게 태우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두 눈을 멀게 만드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설희는 제 방 창문 사이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도대체 파티는 언제 끝날까, 가늠하려고 했지만 짐작도 안 갔다.

그동안 한 번도 한국에 오지 않고 미국에서 잘 사는 것 같더니 갑자기 왜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홍가영. 문득 그 이름이 떠올랐다.

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같이 유학길에 올랐다. 공식적으로는 가영 역시 오래전부터 음대 진학 준비를 했다지만 급작스레 떠났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같이 미국에서 학교 다니다 약혼을 하고, 결혼하는 재벌들의 결혼 코스를 밟는 것이 특별한 것은 아니기에 곧 이해했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그렇게 급하게, 그 넓은 미국에서 둘 다 같은 지역으로 유학을 가는 우연은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

물론 그 이후의 얘기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집안의 자그마한 소문도 새어 나가지 못하게 단속하는 강 회장의 성품을 보노라면 결혼 전까지 이야기가 돌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싶었다.

이러다가 내년 어느 날 대학을 졸업하고 가영과 결혼 소식으로 언론에 등장함과 동시에 한국으로 들어올지도 모를 일이라 생각했다.

그 전에 이 집을, 한국을 떠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이렇게 그를 다시 본 탓일까. 마음이 한층 더 조급해졌다.

책상 한편에 올려 두었던 탁상 달력을 집어 들었다. 달력은 지난번 집에 들렀던 2월에 멈춰 있었다. 그녀는 달력을 한 장씩 넘겨 8월을 찾았다.

2차 발표가 얼마 남지 않았다.

다행히 2차까지는 그럭저럭 본 것 같고, 이제 3차 시험만 남았는데.

집에서 3차 시험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래도 졸업 전에 시험을 마무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여길 수밖에.

계산상으로는 충분히 합격권이라 생각되지만, 항상 일어나는 뜻하지 않던 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이럴 시간에 공부라도 한 자 더 하는 게 낫지.”

캐리어를 열고 가득 챙겨 온 책들을 책꽂이에 차례대로 꽂았다.

두툼하게 떡제본된 책 위로 ‘외교관 후보자 선발 시험 3차 면접 대비 예상 문제지’라고 적혀 있었다.

1, 2차도 마찬가지지만, 3차 면접은 특히나 스터디가 많이 도움이 될 텐데. 하필이면 이 시점에 스터디에서 나오게 되다니.



‘야! 백설희! 그거 진짜 사실이야?’

‘언니 그거 진짜 사실이에요?’



하지만 인제 와서 생각하면 뭐 해.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다.

책을 펼치고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집중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한 문단을 다 읽고도 제가 지금 무슨 내용을 봤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다시 문단의 처음으로 돌아가려는데 창밖으로 쿵쾅거리는 음악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주섬주섬 가방을 뒤져 기숙사에서 잘 때 사용하는 주홍색의 귀마개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잠귀가 밝은 탓에 여러 명이 사용하는 기숙사에서 꼭 사용하던 건데, 집에 온다고 안 챙겨 왔나 보다. 그녀는 아쉬운 대로 휴지를 말아 귀에 꽂았다.

엉성한 밀도 때문인지, 바깥에서 울리는 음악 소리가 워낙 큰 탓인지. 휴지로 막은 귓구멍 사이로 음악이 파고들었다. 앰프가 쿵쿵 울릴 때마다 창문 또한 같이 춤추며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

이럴 바엔 차라리 한숨 자고 일어나 공부하는 게 남는 거다.

덜 말린 머리 때문에 침대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누워 버렸다. 등을 타고 올라오는 방바닥의 한기가 나쁘지 않다. 눈을 감았다.

한숨 자고 일어났을 때는 저 소란이 모두 끝나 있기를.



* * *



잔뜩 심각한 얼굴로 발에는 피를 뚝뚝 흘리고 앉아 있는 서하의 모습이란.

한마디로 호러물이 따로 없었다. 지훈은 혀를 끌끌 찼다.

“별거 아냐. 다들 놀아. 어이 거기! 음악 좀 키워 달란 말 안 들려요?”

디제이가 좀 더 흥겨운 음악으로 바꾸고, 흥을 돋우는 손짓에 사람들이 곧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옆에서 누군가가 챙겨 주는 손수건과 일회용 밴드를 건네받아 서하에게 건네며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괴기 영화 그만 찍고 피 좀 닦아라.”

5년 만에 한국에 온 서하였다.

그동안 그는 한국에 오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한국에 돌아와 한서그룹을 책임질 거라면 대부분의 재벌가 자식들처럼 한서의 뉴욕 지사에서 일하거나 동종 업계에서 실무를 익혔을 것이다.

하지만 생뚱맞게도 서하는 주식에 관심을 가졌다.

사업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탓인지 서하 역시 숫자에 능했다.

게다가 자라 온 환경 역시 세계 경제가 돌아가는 상황, 어떤 게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인지 파악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적합했다.

때문에 미국에서 성인이 되자마자 주식, 펀드, 채권 등의 투자에 빠져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게다가 수익률도 월등했다. 학교에서 모의 대회를 열었을 때 매년 다른 학생들을 압도할 만한 수익을 올렸다.

그러니 월가까지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앞다퉈 졸업 후 그를 모시기 위한 물밑 경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농담으로 사업도 하고, 주식도 할 거냐고, 한서가 이제 금융업까지 손대는 거냐고 농담을 던졌지만, 서하는 웃지 않았다. 그 모습에 어렴풋이 한국에 돌아올 생각이 없음을 느꼈다.

하여튼 미국에 놀러 가서 몇 번 운을 떼 봐도 귀국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닫고 있더니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불쑥 귀국했다.

그래서 오래간만에 한국에 온 친구에게 축하 파티를 거하게 해 주려고 했는데, 축하는커녕 결국 피까지 보고. 가뜩이나 서하에게 말도 없이 파티를 열어 욕을 잔뜩 먹을까 쫄아 있는 상황에 아주 악조건이 주렁주렁했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이 있다면 백설희와 마주친 걸 한서하는 좋아할지도 모르니까.

“어때? 내가 파티 잘 열었지? 고마우면 나 주식 정보 좀. 나도 꼰대 돈으로 안 살고 너처럼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마음대로 한번 살아 보자.”

그의 너스레에 손수건으로 쓱쓱 발바닥에 난 피를 닦던 서하가 피 묻은 손수건을 그에게 던졌다.

“한 번만 더 마음대로 해.”

10년 넘은 친구인데도 저렇게 차갑게 말을 하면 저로 모르게 오금이 움찔했다.

못 들은 척, 지훈은 손수건을 빙빙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근데 쟨 왜 그때 그대로냐? 나이를 먹었으면 좀 나긋나긋해지는 맛이 있어야 할 거 아냐.”

“그럼 그런 여자 만나.”

그 말이 지훈의 귀에는 백설희에게 관심 끄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같이 욕 좀 하며 우정을 쌓아 보자는 작전도 실패였다. 아니, 조금 전보다 서하의 표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마주친 지 30분도 안 되어 백설희는 또 한서하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기분이 저렇게 롤러코스터를 탈 정도면 그냥 연애라도 질리게 하든가. 못 먹으니 미련이 남는 거지. 먹어 봐라 저런 가시 돋친 계집애 누가 좋아한다고. 몇 년 만에 얼굴 보는 건 줄 아냐? 그런데 고작 백설희 때문에 이 좋은 날을 망쳐?

생각 같아서는 성질대로 퍼부어 주고 싶은데 잔뜩 구겨진 얼굴을 보니 말이 쉽게 안 나왔다.

멀쩡하던 한서하가 그깟 백설희 잠깐 마주쳐 놓고 넋 놓고 있는 꼴이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차라리 한번 고백이라도 하지 그래? 네가 안 하면 내가 대시한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자리에서 일어난 서하가 별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야, 어디 가? 주인이 이렇게 사라지는 게 어딨어? 금방 올 거지?”

한서하를 소개해 준다는 명분으로 이 많은 사람을 초대한 자신의 입장은 어떡하라고.

“네 마음대로 초대한 거니 끌고 사라지는 것도 알아서 해.”

“아우! 저 미친 것들.”

지훈은 설희가 향한 곳과 서하가 들어간 별채를 번갈아 보며 뒷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