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01







1장





갑자기 눈으로 쏟아지는 강한 햇빛에 설희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붕, 그녀를 내려 준 버스가 뿌연 먼지바람을 흩날리며 떠났다. 설희는 자신이 올라가야 할 언덕을 마주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학교에서 조금 더 공부하다가 밤에 올 걸 그랬나? 이 더운 날 무거운 캐리어까지 끌고 집까지 올라가다가는 더위 먹을 텐데.



‘그 소문 진짜예요?’



궁금증이 아니라 기분 상하게 할 요량으로 내뱉던 희정의 눈빛이 떠올랐다.

차라리 집에 가서 찬물에 샤워하고 한숨 자고 일어나 공부하는 게 낫지. 학교 기숙사에 남아 있다가 희정을 계속 마주쳤다가는 남은 시험 준비까지 엉망이 될 것이다.

손목에 끼워 두었던 검은색 고무줄로 능숙하게 머리카락을 한데 모았다. 그새 땀에 젖었는지 쓸어 올리는 목덜미가 축축했다. 환하게 드러난 하얀 목덜미로 뜨거운 태양이 들러붙었다.

“망할 여름.”

낮게 읊조리면서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커다란 저택들이 즐비한 성북동. 가뜩이나 사람이 없는 동네는 연일 백 년 만의 더위라는 뉴스 덕인지 사람의 코빼기조차 볼 수 없었다.

정오가 지난 시각이라 높은 담장이라고 해 봐야 만들어 내는 그림자가 겨우 몸을 반쯤 가릴 정도였지만 설희는 악착같이 그림자 밑으로 숨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 한바탕 내린 비 때문인지 더욱 습한 공기 덕에 50m도 올라가기 전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러다 쿵쿵, 크게 음악을 튼 채 뒤에서 달려오는 자동차 소리에 몸을 한껏 벽 쪽으로 붙였다.

부아앙! 촤아아아, 소리와 함께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나 청바지와 흰 티 위로 얼룩덜룩 흙탕물이 잔뜩 튀었다.

미친놈. 잡히기만 해 봐, 하고 한바탕 소리라도 질렀어야 했음을 깨달았을 땐 이미 파란색 스포츠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터였다.

정말 되는 일이 없는 하루다. 빨리 시험에 붙어 지긋지긋한 이 동네와 한국을 떠날 수 있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기도했다.



* * *



30여 분을 올라갔을까. 저 멀리서 익숙한 담벼락과 정문이 보였다.

성북동 꼭대기, 그것도 골목의 모퉁이에 자리 잡은 덕에 삐죽 튀어나온 저택은 주변의 경관을 한눈에 살펴보기에 좋은 터였다. 물론 걸어서 이 집에 들락날락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시련에 가까운 위치였지만.

설희는 정문을 지나 주차장 옆쪽으로 난 후문으로 향했다.

이 집의 후문과 붙어 있는 대영물산 일가의 정문에서부터 후문 쪽까지 색색의 스포츠카와 온갖 외제 차들이 빼곡했다. 동시에 쿵쿵 땅을 울리는 앰프의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한바탕 파티라도 연 모양이네.”

이게 엄마가 전화로 하소연을 하던 두통 유발 파티인가.

3년 전 옆집으로 이사 온 대영물산 일가는 이 동네 사람들과는 다르게 파티를 꽤 자주 연다고 했다.

이 동네 집들이야 본채와 본채끼리는 거리가 있는 까닭에 이 정도 소음이 서로의 생활 영역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공교롭게도 대영물산의 파티가 주로 열리는 정원과 마주한 담벼락 밑에 있는 그녀의 집까지는 거리가 꽤 가까웠다.

그 때문에 밤늦게까지 파티가 열리는 날이면 골이 깨지는 것 같다고 엄마가 전화할 때 몇 번 얘기했는데, 직접 경험하기는 그녀도 처음이었다.

마치 자신의 집에서 열리는 것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진동과 소음에 그동안 엄마의 하소연을 반쯤은 건성으로 넘겼던 게 조금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좀 더 살갑게 이야기를 들어 드려야지, 마음먹은 동시에 오늘은 집에서 편히 쉬긴 힘들겠다는 생각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차라리 근처 카페에 가서 시간을 죽칠까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커다란 저택들로 둘러싸인 동네에는 그 흔한 카페 하나 없었고, 가장 가까운 카페를 가기 위해서는 왔던 길을 되돌아 버스 정류장으로 가야 했다.

그때, 아까 그녀를 지나쳐 갔던 파란색 스포츠카에서 익숙한 얼굴이 내렸다. 남자가 그녀를 발견하고 한참 통화하던 상대에게 급한 일이 있다며 갈무리했다.

“여! 이게 누구야? 백설 공주 아냐?”

비아냥대는 인사에 설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백설희. 백설 공주.

그건 이름 때문에 생긴 별명이기도 했지만, 설희의 도도한 성격을 비꼬는 별명이기도 했다.

감히 네까짓 게 뭐라고 도도하게 구냐는 뜻을 담은.

초등학교 시절 그녀와 서하의 관계를 알던 그의 친구들이 놀릴 때 쓰던 말이었다. 그 말을 제일 처음 만들어 썼던 게 저 자식이었던가.

“백설 공주라 재투성이 컨셉으로 다니는 거야?”

지훈이 흙탕물로 엉망이 된 설희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었다. 딱 보아하니 아까 버스 정류장에서 고의로 튀기고 간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올라간 지 한참이나 되었는데 대문 앞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겠지.

“그건 신데렐라고.”

악에 받쳐 성질이라도 부리길 바랐던 모양인지 고저 없이 눈을 내리깔고 내뱉는 말에 지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그런 지훈의 옆을 쌩하게 지나가는 설희의 옆으로 그가 다시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너도 파티에 참석하게?”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분명 그렇게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내 집에 가는 데도 이유가 있어야 해?”

“내 집? 풉.”

지훈이 보란 듯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는 설희의 미간도 꿈틀거렸다.

그냥 무시했어야 했는데.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걸 보니 오는 동안 진짜 더위라도 먹은 모양이다.

몸을 돌린 그녀를 지나쳐 지훈이 앞장서 문을 열었다.

“그래 가자. 네 집. 이왕이면 네 방 구경도 좀 시켜 주고. 들어가실까요?”

그를 한 번 노려본 설희가 대문을 들어섰다.

빠르게 계단을 오르던 그녀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당황했다.

보통 강 회장님이 주최하는 파티는 정문과 연결된 정원에서 열렸다. 손님들이 오더라도 정문 쪽 정원과 본채를 이용할 뿐, 이쪽 별채나 수영장 쪽으로 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커다란 정원수들 뒤쪽으로 펼쳐진 수영장 주변에는 수영복을 입은 젊은 남녀들이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겨우 몇 발자국 들어왔을 뿐인데 벌써 딴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한서하가 있었다.

비록 5년 만에 보는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라는 것을 감지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조금만 신경 썼다면 파티에 초대받았냐는 지훈이 왜 옆집이 아닌 이 집 대문을 열었는지 눈치챌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파티가 옆집이 아니라 이 집에서 벌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텐데.

그리고 정문 쪽이 아닌, 후문 쪽 수영장에서 파티를 열 만한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텐데.

그랬다면 여기까지 올라오지도 않고 그대로 돌아갔을 텐데.

찰나의 순간에 수십 가지 후회가 들었다.

놀란 두 다리가 꿈적도 못 하고 캐리어를 쥔 주먹이 하얗게 변했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돌리려는 사이 그녀를 먼저 인사시킨 건 지훈이었다.

“한서하. 서프라이즈 선물이다.”

그의 한마디에 사람들의 시선이 설희에게 쏠렸다.

‘어? 백설희네?’, ‘네가 데리고 왔어?’ 오늘 모인 인원 중 그녀를 아는 몇몇 사람들의 얼굴에는 적대감이, 그녀를 모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여기저기 웅성거리는 소리에 결국 한서하도 몸을 돌렸다.

아무 데도 몸을 숨길 곳 없는 사막 한복판에서 내리쬐는 태양을 온몸으로 받듯, 그렇게 설희는 그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헤어지던 시점에서 이미 성장이 끝난 탓에 키와 생김새는 비슷했지만 5년이란 시간 동안 묘하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5년.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5년이란 시간 앞에서 심장 한 귀퉁이가 다시 한번 작게 욱신거렸다.

자신을 노려보던 눈빛이 무심하게 변하고, 자신을 흔들던 거친 손끝에 우아하게 샴페인 잔이 들리는 걸 보면서 씁쓸함에 입술 안쪽 여린 점막을 짓씹었다. 마가 낀 날이 틀림없다.

손에 든 샴페인 잔을 굴리며 서하가 서서히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자신 쪽으로 다가올 때마다 살짝 벌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탄탄한 근육이 일렁이며 태양 빛에 반짝였다. 그 모습이 꼭 표범 같다. 느리긴 하지만 결코 먹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만약 여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주춤하는 꼴을 보이면 당장 목숨 줄을 끊어 놓을 것 같았다.

차마 시선도 돌리지 못한 채 자신과 팔 하나만큼 가까워지는 서하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 내야 했다.

한서하. 이 집 주인의 아들이고 대한민국 재계 서열 7위인 한서그룹의 유일한 후계자. 그리고 자신은 그의 집에서 일하는 정원사의 딸.

이미 자신과 서하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 호기심이 일었다. 무슨 재미난 일이라도 일어나길 바라는 모양이 뻔했다.

설희는 더욱 빳빳하게 고개를 들었다. 행여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 더욱 골려 먹지 못해 안달 날 것들이 그들이니까.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네.”

그녀를 발견한 순간 지루함이 배어 있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선물은커녕 지금 이 자리에 그녀가 불청객이라는 걸 여지없이 드러내는 눈빛이었다.

유난히 끝이 날카로운 입술과 눈매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표독스러워 보이는 인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표정은 고스란히 비수가 되어 꽂혔다.

“미안.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끼었네.”

그녀의 대답에 그의 한쪽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