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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머리는 그나마 멀쩡하기에 괜찮은 줄 알았더니 가엽게도 그 속이 고장 난 모양이로군.’

얌전히 누워 가슴팍에 깍지 낀 손까지 올려 둔 소아즈에게 그녀가 연민의 눈초리로 혀를 찼다. 하지만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잠에서 깨어나 보려 무던히 애를 쓰는 그의 뺨을 톡톡 두들긴 레오노엘이 말했다.

‘현실 도피는 그만하고 이거나 먹어라. 벌써 3일간 잠만 잤으니 더 이상 위장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3일이요?”

그녀의 말에 화들짝 놀란 그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레오노엘은 이제 더 설명하기도 지겹다는 양 가늘게 눈을 떴다.

‘그래. 거의 죽은 거나 다름없었으니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던 거 아니겠니? 나도 의술에 대해선 잘 모르니 이 이상 묻지 마라. 어쩌다 너 같은 녀석을 살려 주어선…….’

혀를 쯧쯧 차는 족제비를 내려다보며 소아즈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넋을 놓았다.

“하지만…… 하지만 이게 가능한 건가요? 진짜 이상하잖아요…… 족제비가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고, 어떻게 족제비가 사람을 치료해 줄 수 있어요?”

그의 질문에 레오노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할 말은 역시 이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떠올려 냈다. 그 날 이후 한 번도 꺼내 본 적 없는 단어. 제 본질.

‘나는 마도사니까.’

소아즈가 자신을 어떻게 쳐다보건 그녀는 공허한 눈으로 어딘가의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떤 것 하나 지켜 내지 못하고 제 나라를, 제 백성들을 모두 한 줌의 재로 흩날려 보낸 끔찍한 기억이 전신을 옭아맨다. 천 년을 살아오며 어느 한순간도 잊은 적 없는 이 죄의 기억은 죽는 날까지도 영원할 것이었다. 물론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마……도사…….”

방금도 보았듯이 그는 족제비가 말을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제 말을 거짓으로 알아들으리라 생각했던 레오노엘은 예상외로 왼손을 들어 올려 입을 틀어막는 소아즈를 보고 한쪽 눈을 들어 올렸다.

그 위로 보이는 얼굴의 상부는 장밋빛으로 물들어 갔고 금색 눈동자에는 빛이 가득했다. 미세하게 떨리는 전신. 그것은 한마디로 무언가에 감격해하는 반응이었다.

“그렇구나…… 그래서 이렇게…….”

‘……?’

“사인…… 사인 한 번만 해 주실 수 있으세요?!”

사인을 외치긴 했으나 마땅히 받을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소아즈는 허둥지둥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셔츠에다 받아 버리자는 마음이 추위도 불사르고 외투를 벗어 버릴 준비를 했다. 그런 소아즈의 모습을 황당하게 쳐다보던 레오노엘이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얼어 죽을 작정이야?’

“하지만 종이가 없으니까!”

소아즈가 억울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마도사를 만나다니, 이런 기회가 흔하리라 생각하세요?”

‘뭐야? 마도사 앞에서 그런 말을 해 봤자…….’

물론 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 레오노엘이 그의 주장에 동의하며 고갤 끄덕였으나 대화의 주제가 삼천포로 빠졌다는 것을 퍼뜩 깨달았다.

‘왜 의심하지 않지? 내 말을 믿어?’

“당연하죠! 마도사님이니 말을 하시는 거잖아요. 아니면 족제비가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어요.”

소아즈는 담담하게 이유를 말했다. 일개 평범한 족제비가 사람의 말을 할 수는 없으니 그런고로 즉, 이 말하는 족제비는 마도사가 분명했다. 애초에 그녀 또한 그런 이유에서 제 정체를 털어놓은 것이므로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입맛을 다셨다.

발할라의 멸망 이후 세상에는 차츰 마법이 사라져 갔다. 대륙에서 가장 장엄하고 융성했던 문명이 한순간에 사라진 사건은 사람들에게 꽤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위대한 마법왕국의 멸망은 그들에게서 마법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게끔 바꾸어 놓았고 종내에는 누구도 마법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들에게서 마법은 자연스럽게 소멸됐다. 마력의 원천인 ‘그것’이 사라지지 않았더라도 만일 어떤 다수의 집단이 아직까지도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면 대륙에는 여전히 마력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대륙 아래에 흐르는 마력이란 거의 무한한 것과도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법의 소멸은 생각보다 빠른 시일 내에 당도했다. 어떻게 이것이, 또 인류에 해가 되는 상황을 가져올지 예측할 수 없기에 사람들은 마법을 버렸다. 목숨 아까운 건 누구나 매한가지였던 모양이었으니.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를 깨운 것은 두 뺨이 붉게 상기된 소아즈였다. 그가 큰 용기를 낸 사람처럼 수줍게 레오노엘을 불렀다.

“저…… 마도사님! 저를 살려 주신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응? 뭐…… 그래야지…….’

한껏 감동한 소아즈의 시선을 피한 레오노엘이 멋쩍게 대답했다. 사실은 그냥 외면하려 했었다. 어차피 죽일 생각이었으니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런 절벽에서 떨어졌는데도 가늘게 숨을 이어 가고 있는 그를 발견했을 때 이 인간은 살아야 하는 운명이구나 싶어 버려두지 못했다. 아마도 푹신하게 쌓인 눈 덕분에 목숨을 연명했겠지만 온몸의 뼈가 부러져 그대로 뒀으면 아마 한 시간 안에 죽었을 것이다.

‘어때? 불편한 곳은 없느냐?’

“괜찮은 것 같아요. 좀 뻐근하긴 한데 이 정도야.”

회복마법을 썼다 해도 그런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몸이 멀쩡하다면 이상한 것일 테다. 소아즈는 어깨를 움직이며 목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뻐근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움직이기에 큰 무리는 없었다.

‘목뼈를 제외한 모든 뼈가 산산조각 나 있었다. 죽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야.’

레오노엘은 그의 목 아래부터 발끝까지를 훑었다. 너덜너덜해져 걸레짝과 다름없던 그의 몸을 사람 구실을 할 정도로 만들어 놓은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당연한 말이지만 늑대들은 소아즈를 살리는 데 항의를 표했다. 물론 그가 나쁜 녀석인 것만은 분명했다. 전문 사냥꾼들을 그만큼 데려왔다는 건 적어도 지난번 여우들에 버금가는 대형 참사를 일으킬 속셈이었으리라.

하지만 레오노엘은 생각을 바꿔 그를 자신의 보금자리로 데려왔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경탄스러울 만큼 어여쁜 이 남자는 분명 인간들에게 전하라고 불려졌다. 자신이 아는 그 전하가 여전히 인간들의 왕이라는 뜻이 맞는다면, 이대로 죽여 버리는 것보다 살려 이용하는 것이 훨씬 더 효용성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내 작품이긴 하나 보면 볼수록 훌륭하구나. 어찌 생채기 하나 없이 이리도 깨끗이 나을 수가 있지?’

작은 머리를 기웃거리며 제 몸을 만족스럽게 살피는 족제비를 보자 소아즈는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어떻게 치료하신 건지 물어봐도 돼요?”

‘어떡하긴? 비록 이런 몸이긴 해도 그 정도의 간단한 마법은 다룰 줄 알아.’

물론 치료마법에 한해서였지만 이런 산골에서 그 정도면 굉장한 마법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지. 마법이 사라진 이 세계에서 자신의 마법은 그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고 또 훌륭한 것이었다.

레오노엘은 한껏 으스대는 몸짓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인간과 말하는 것도 오랜만이지만 인간을 보는 것 또한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그래, 한 천 년쯤 될까?

“그런데 역시 마도사라고 하는군요. 생소한 어감이에요.”

소아즈는 생소한 단어를 입 안에서 되뇌었다. 어깨가 한껏 올라가 있던 레오노엘이 버릇처럼 없는 눈썹을 치켜떴다.

‘무슨 소리야? 달리 부르는 말이라도 있다는 소리니?’

“저희들은 마도사라는 단어 대신 마법사라는 단어를 새로이 만들었거든요. 누군가 이 단어를 발견하기 전에 고대인들을 마법사라고 지칭해 버려서…….”

그가 설명하는 단어의 어원을 듣고 있던 레오노엘이 조금 후 수긍하듯 머리를 주억였다.

‘마법사라니 그것참, 기이한 말이구나. 마법은 마법이고 마도사는 마도사인데.’

소아즈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잔잔히 웃었다. 지금의 사람들은 마법사라는 단어에 더 익숙해져 있었다. 조금이라도 고대사를 공부했다면 그 단어를 모를 리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져 버린 통에 모두 마도사를 마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동화’에도 그렇게 쓰여 있고 말이다.

‘뭐, 마력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 벌써 천 년이니까. 그 누구도 시대의 흐름을 붙잡아 둘 순 없지.’

그렇게 말한 레오노엘은 아련한 눈으로 어딘가 먼 곳을 응시했다. 소아즈는 궁금한 것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으나 추억 속을 헤매는 마도사를 방해할 순 없었으므로 소아즈는 그저 얌전히 그녀가 상념에서 깨어나길 기다렸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다소곳이 앉은 상태로 눈만을 굴리며 굴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바빴다. 솔직히 말해 믿고 싶지 않다 해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의 주변에, 정확히는 바닥 위에 널려 있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 몰랐지만 주위에는 꽤나 많은 고대의 유물들이 쌓여 있었고 보관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천천히 부식되어 가는 중이었다.

빛바랜 초록빛 청동 거울, 나태함이 묻은 회중시계, 그리고 어디에 사용되는지 용도를 알 수 없는 상자까지, 소아즈는 그중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작은 도기 주전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오래되어 낡고 무늬가 반쯤 지워져 있었으나 그것에 새겨진 문양은 틀림없이 익숙한 것이었다. 꿈속에서도 잊어버릴까 수만 번 보아 아로새긴 날개와 십자 그림은 발할라를 상징하는 고대의 황금빛 문양이었다.

“당신은 발할라의 마법사였군요.”

주전자 뚜껑에 그려진 그림을 매만지던 소아즈가 조용히 물었다. 사위는 고요했다. 레오노엘은 답이 없었다. 그저 생각에 잠긴 것이라 여긴 그는 녹이 슨 주전자의 주둥이를 쓸다 어렴풋 시선을 들어 올렸다.

미풍과도 같은 숨을 들릴 듯 말 듯 내쉬는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눈보라를 등지고 선 그녀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져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기묘한 감각이 그의 등줄기를 쓸었다. 곧이어 소아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주전자를 꼭 쥐었다.

“그…… 눈…….”

소아즈는 목구멍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어둠으로 그늘졌어도 그녀의 눈동자는 연옥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분노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흰 도깨비의 안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