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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네가 거기서 왜 나와?]

[이쪽이 하고 싶은 말이야! 중군을 치러 간 거 아니었어?]

[여기가 중군이야!]

[잠깐만…….]

통신기 너머로 3분대장이 패널을 조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니엘 역시 자신의 현재 위치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관측병이 운용되고 있지 않은 상태라 전술 맵에는 아무런 정보도 출력되고 있지 않았다.

샤를이 2소대장을 맡기 전, 다니엘은 관측병과가 정말 꿀 빠는 보직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남들은 다 기간트에 타서 고생하는데, 관측병과 녀석들은 뒤에서 몸 편히 앉아 있고, 마도학자들을 도와주면서 같은 평민인데도 젠 척 하는 게 너무 아니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샤를이 2소대장으로 파견을 오고 관측병들은 일반 기간트 조종수로 운용하겠다는 그의 말에 다니엘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역효과가 되어 돌아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니엘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관측을 위해 일반 전투원 한두 명을 후방에 배치하는 것 자체가 전력에 적지 않은 손해를 일으킨다.

게다가 과거에 관측병이 보내 준 잘못된 정보 때문에 고생한 경험까지 떠오르자, 지금 이 상황이 조금 아쉽기는 해도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정신승리를 하며 다시 한번 아멜의 대장기를 육안으로 색적하는 다니엘.

[찾았다!]

예상대로 아멜은 모래바람을 연막 삼아 저 멀리 도망가고 있었다.

부우웅—

다시 한번 모래바람을 스쳐 지나가며 아멜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격하는 다니엘.

[잡았다!]

모래바람을 돌파해 아멜에게 다시 접근하는 데 성공한 다니엘의 봉이 매서운 기세로 아멜의 기간트를 내려치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의 공격은 허사로 돌아갔다.

쿵!

갑자기 나타난 적기와 부딪치는 바람에 동체가 흔들렸고, 그 때문에 무기를 휘두를 수가 없었다.

‘치! 너무 대장기에만 시선이 팔려 있었나?’

갑자기 나타난 적기가 암살자도 아니건만, 너무 아멜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만약 실전이었다면 적에게 둘러싸여 생환을 보장받을 수 없을 뻔한 위험한 상황이었다.

다니엘은 자책했다.

[…다니엘 병장님?]

[어? 뭐야?]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이번에도 다니엘과 충돌을 일으킨 것은 3소대원이 아닌, 자신과 같은 2소대원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 부딪친 것은 방금 팀킬을 할 뻔한 3분대원이 아닌 2분대원.

[다니엘 병장님이 왜 여기 있습니까?]

[어? 그러는 너희야말로 왜 여기 있냐?]

[여기 좌진입니다!]



***



‘양익을 먼저 펼침으로서 상대가 그에 대응해 진형을 전개하게 만들고, 이후 중앙돌파를 하려는 액션을 취함과 동시에 날개를 하나둘씩 접어 중진에 합류를 시킨다.’

2소대와 3소대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난전을 일으키는 와중에 네드는 잠시 상황을 복기했다.

전투 중에 잡념을 가지는 것은 원래라면 좋지 못했다.

하지만 장교 출신 병사에 분대장 겸 임시 소대장 대리에 관제병과라는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이런 난전 속에서도 냉철하게 현장을 분석하는 버릇을 만들었다.

‘이후 적의 응전을 피함과 동시에 중진은 그대로 우익으로 선회해 이동해 합류. 자연스레 상대의 중진 역시 아군의 중진을 따라 우측 전장으로 빨려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펼쳐 두었던 좌익을 완전 회수함으로서 상대의 우익 역시 우측 전장에 빨려들어 왔지.’

사전 회의 때 이미 다 설명이 된 내용이었건만, 실제로 그렇게 전황이 흘러갈까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걱정과는 달리, 전황은 잭스가 예견한 그대로 흘러갔다.

네드는 콕핏에 설치된 디스플레이 우측 면에 나열되어 있는 소대원 목록을 봤다.

대부분은 계급에 맞게 나열된 가운데, 홀로 그 흐름에 거스르며 3열에 있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잭스, 진짜 너는 대단한 녀석이다. 일자무식 평민 출신답지 않은 명석한 두뇌나 흘려들었을 뿐인 지식을 활용할 줄 아는 지혜까지. 만약에 네가 농가의 자식이 아닌, 귀족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어쩌면 제국의 판도가 바뀌었을지도 모르지.’

아직 잭스의 천재성에 대해 감탄하는 건 시기상조일지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드는 잭스에게 진심으로 감복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교육을 받고 사관학교에서 수업까지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현장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지.’

네드는 자신이 장교로 지내던 시절을 떠올렸다.

딱히 사고를 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활약을 한 것도 아닌 소대장.

빠르게 승진을 했지만, 네드는 그게 자신이 뛰어나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영방군 내 파벌들의 이해관계 속에 이루어진 고속 진급.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자신이 속한 파벌이 밀려나자 가문은 몰락했고, 자신 역시 백의종군을 해야만 했다.

‘잭스도 잭스지만, 더 대단한 건…….’

기간트의 두부를 돌려 난전 중인 전장을 살피는 네드.

전장 곳곳이 다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불타오르고 있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는 기간트용 아밍소드와 타지쉴드를 장착한 대장기 한 기가 있었다.

마치 절세미녀가 추는 춤 선을 보는 듯한, 깔끔하고 아름다운 움직임으로 적들을 현혹시켜 끌어당기고 있는 대장기.

얄밉게 상대의 공격을 피하며 포위를 당하지 않음과 동시에 적절하게 2소대 기간트들을 전투불능 상태로 만들고 있는 대장기를 보고 있자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송곳은 주머니에 넣어도 두각을 나타낸다고 했던가.’

룬드래곤 왕국의 전설적인 재상 드미트리에 관한 이야기를 듣던 중에 들은 말이었다.

‘재능 있는 자는 그 어떤 상황에 처해도 그 재능을 드러낸다고 하지. 하지만 두각을 드러낸 송곳도 그것을 꺼내서 사용해 줄 사람이 있어야 성립이 되는 이야기다.’

실제로 네드는 소대장 대리를 하면서 잭스가 내는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만약 일반 병사로 전락하지 않은 장교였다고 하면 잭스를 기용했을까?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대귀족의 자식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민의 말을 귀 기울이고 거기다 기용까지 하는 대담함. 정말로 대단한 것은 잭스보다 소대장님이시다.’

네드는 순회순찰대에서 일반 병사로 오래 복무할 생각이 없었다.

군내 정치질을 통해 라인을 타며 원래 있던 자리로 복귀할 생각뿐인 네드.

신임 소대장으로 온 아멜에게 알랑방귀를 뀐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 생각이 모의전을 통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크크, 난봉꾼이라고 들었는데, 의외로 남자를 홀리는 데에도 재능이 있으시군.’

아직 알게 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네드는 벌써부터 아멜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네드! 내 쪽으로 합류해라. 길이 보인다. 지금부터 2소대를 뚫고 샤를 중위를 쓰러트리러 가겠다.]

[네! 지금 가겠습니다!]

27년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채워지지 않은, 정체 모를 갈증.

네드는 아멜을 통해 그 갈증이 채워질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



C급 기간트에 올라타서 싸워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학생, 아니, 중학생의 만들기 과제처럼 엉성하고 허접한 치리공공과는 급을 달리하는 C급 기간트.

C급 기간트는 치리공공과 달리 제대로 캡슐 형태로 만들어진 콕핏과 1인승이라 치기에는 다소 여유로운 내부 공간을 보유하고 있어 탑승에 있어 불편한 감은 없었다.

심지어 시야 확인을 위해 콕핏 전면부가 노출되어 있는 것과 달리, 두부에 안광 카메라가 장착되어 있었다.

그것을 통해 확인된 시야가 콕핏 내 디스플레이로 출력되는, 지극히 일반적인 메카의 구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 이거야! 이게 진짜 로봇이지.

게다가 이따금씩 들려오는 기간트의 고동 소리는 남자로 하여금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누군가 그랬던가.

현실은 때론 픽션보다 더 논픽션 같다고.

그것은 기간트 조종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이었다.

전날에 본 카트린의 B급 기간트도 박력이 대단했는데, 직접 콕핏 안으로 들어와 조종하는 C급 기간트의 웅장함은 이루어 말할 수가 없었다.

C급 기간트를 몬다는 것.

그것은 중고이기는 해도 내 인생 첫 차를 사서 운전하는 것보다 더 심장을 벌렁거리게 했다.



[잡았다!]

후면 카메라가 내 뒤를 노리고 공격해 들어오는 2소대원 하나를 포착해 화면에 보여 줬다.

하지만 사실 나는 기간트가 인식하기도 전부터 상대의 배치를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대비를 할 수가 있었다.

역시 미니맵 기능은 위대했다.

후욱―

바퀴가 역회전하며 내가 타고 있던 기간트가 후진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회심의 일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유롭게 공격을 피해 버리자, 2소대원이 좌절감에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2소대원들은 오픈 마이크로 자유롭게 대화하고 있었다.

솔직히 지휘라고 할 것 없이 제멋대로 전투를 하고 있는 꼴을 보니, 2소대에게 전용채널은 별 의미가 없어 그럴 만도 했다.

부우— 부우—

배후에서 가해 오는 공격을 피했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잭스의 계략대로 상대가 나라는 미끼에 낚여 개활지의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한 채 오히려 자신들끼리 움직임을 제한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 좋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금적금왕.

손자병법에 나와 있는 이 병법은 적을 쓰러트리려면 먼저 왕을 노려야 한다는 지극히 기본 중의 기본 병법이었다.

병법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2소대 1분대장이 본능적으로 나를 노린 것처럼 킹을 잡으면 상대에게 남은 말이 아무리 많아도 체스는 끝이 난다.

2소대원들을 전부 쓰러트리고 샤를을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현 전력으로는 중과부적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2소대가 혼란에 빠져 있고, 샤를이 마법을 캐스팅하느라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체크메이트를 외칠 때.

‘대체 무슨 마법을 쓰길래 캐스팅을 10분 넘게 하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이 세계의 마법 체계 때문에 그렇다.

살아 있는 생명체의 몸에는 마나가 깃들어 있고 인간 역시 생명체이기 때문에 마나를 갈무리 할 수 있는 세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사활동을 증진시키거나, 아니면 본체를 강화하는 수단으로밖에 쓸 수가 없었다.

내 기준에서 이것은 마나라기보다는 내공에 가까워 보였다.

이 세계에서는 내츄럴 마나라고 불렀다.

이 내츄럴 마나는 다른 에너지로 전환이 불가능한 마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변환이 가능한 마나가 필요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의 연구 끝에 인간이 찾아낸 변환 가능한 마나, 그것은 바로 마수가 몸에 지니고 있는 핵인 마석이었다.

마석을 통해 가공된 마나를 다루게 되면서 이 세계의 문명은 한층 더 진보했고 이것을 마도혁명이라 불렀다.

뭐, 이런 역사 이야기를 카트린에게 은근슬쩍 물어서 알아보았다.

아무튼 이 세계의 마법 체계가 본능이 아닌, 철저한 계산으로만 작동하는 물리학적인 요소가 가득하다 보니, 마법 한 번을 발동하는 데에 필요한 준비 과정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마나를 끌어올 마석이 필요하고, 변환시킬 디바이스, 그리고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캐스팅 및 그걸 현실에 확정시키기 위해 온갖 수식과 계산들.

뭐어… 엄청 복잡하다.

적어도 내가 마법을 쓸 일은 없겠지.

아쉬우면서도 저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다행인 부분이었다.

마수의 핵을 코어로 사용하는 기간트를 타면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되지만, 그래도 계산만큼은 인간이 해야 했다.

현실이라는 건 온갖 조건들이 실시간으로 변하기 때문에 계산식이 항상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A라는 정리를 사용해야 하는가 하면, 때에 따라서는 F의 정리를 사용해야 할 수도 있었다.

결국 마도학자라는 것은 머리가 박살날 정도로 머리 쓸 일이 많은 직업이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이 세계에서 마법이라는 것은 투석기 같은 공성병기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네드가 합류한 게 미니맵에 들어왔다.

조금 전에도 2소대원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해 준, 아주 고마운 기능이었다.

원래 기간트에는 미니맵이 달려 있지 않았다.

전술맵이라고 해서 관측병과가 실시간으로 보내오는 정보를 띄우는 게 있기는 한데, 미니맵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네드! 모래바람을 일으켜라.]

[네? 하지만 소대장님, 지금도 충분히 시야가 어렵습니다. 이보다 더 모래바람을 일으키면 관측병의 도움 없이는 움직이는 게 힘들 겁니다.]

[상관없다. 우리보다는 상대가 더 곤란할 거다. 2소대에는 없고, 우리에게는 있는 이 지휘라는 것의 차이를 보여 줄 생각이다.]

[알겠습니다.]

네드 분대장이 기간트의 발에 달린 바퀴를 굴려 흙먼지를 일으켰다.

거의 중국발 황사가 생각나게 할 정도로 흐릿해진 시야.

하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니맵은 적과 아군의 구분뿐만 아니라, 각 기체의 시야각까지 표기가 되었다.

나는 잠입 액션 게임을 하듯 적의 시야에 걸리지 않게 적진을 돌파해 샤를 중위에게 다가가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부우우우우웅—

끝에 다다르자, 더 이상 은밀 기동을 하지 않고 오히려 소리를 더 크게 내며 기간트의 속도를 올렸다.

내가 모래바람을 뚫고 나오자마자 뒤이어 2소대 소속 기간트들이 내 뒤를 쫓아왔다.

하지만 이미 내 눈에는 샤를 중위가 탄 기간트가 포착된 상황.

채널을 오픈 마이크로 전환한 뒤 샤를에게 외쳤다.

[체크메이트입니다, 샤를 중위님!]

샤를이 당황했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기간트가 어색한 움직임으로 뒤뚱거리더니, 이내 발을 헛디뎌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휘리릭—

샤를의 기간트 주위를 한 바퀴 돈 후, 봉 끝을 콕핏에 갖다 댔다.

[…항복.]

“스, 승자! 2소대!”

그렇게 나의 첫 모의전이 끝났다.

모의전의 참관인 역할을 맡았던 정비반장이 얼이 빠진 목소리로 우리의 승리를 선언했다.

[이, 이겼다!]

[진짜 이겼어!]

[연패가 끊겼다!]

승리 선언을 듣자마자 소대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후우, 상대를 농락해 가며 승리하는 전술의 짜릿함.

하지만 무언가 내 마음 속 갈증은 아직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이번 모의전에서 내가 한 역할은 미끼 역할로 상대를 끌어들여 혼란을 유발하는 것.

돌파 과정에서 일부 접촉이 있긴 했지만, 화끈하게 치고받고 싸웠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MOBA 게임으로 치면 파밍 끝내고 탑에서 내려왔는데, 게임이 끝나 있는 상황.

뭔가 너무 아쉬웠다.

하지만 그런 나를 이해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갈등을 채워줄 요소가 곧바로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