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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간밤에 환자 및 특이사항 없었습니다.”

분대장인 네드 상병이 각잡힌 각도로 경례하며 점호 끝 허가를 요청했다.

순회순찰대는 한국과는 달리 단체 점호가 없었다.

각 소대장들이 인원만 파악한 후 특이사항이 있을 때만 상부에 보고하는 시스템이었다.

단, 일과가 시작하기 전에만 보고하면 되는 거라서 일어나서 바로 할지, 아니면 식사 후 일과시작 직전에 할지는 소대장의 재량이었다.

그래서 나는 경험을 살리고자 밥을 먹고 다 씻은 다음에 소대의 단체 게르로 마련된 텐트 앞에 모여서 하기로 했다.

“단결. 다들 어제 제법 취했을 텐데도, 사고를 안 쳐서 이 소대장은 고마울 따름이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소대원들의 눈빛이 일제히 카트린에게로 쏠렸다.

카트린은 소대원들의 눈총을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흠흠, 일부러 모른 척 해 주려고 소대장인 내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꼭 그래야겠냐.

“그러면 점호는 이쯤에서 마치지. 카트린 하사, 오늘 일과는 어떻게 되지?”

장교수첩에 소대에 정해진 임무와 일과를 살펴봤지만, 안타깝게도 업데이트가 필요하다는 문구만 적혀 있었다.

일단은 한 번 정해진 일과를 해야 그게 장교수첩에 기록되는 듯했다.

“주둔지 이동 둘째 날이니까, 소환식 및 전장비, 그리고 모의 훈련일 겁니다.”

“소환식?”

처음 듣는 용어가 나왔다.



[도감에 정보가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때를 맞춰 울리는 시스템 알림음.

장교수첩을 꺼내 해당 내용을 열람했다.



— 소환식.

└ 순회순찰대에서 사용하는 용어 및 개념. 기간트는 강력한 병기이나 연비가 좋은 편이 아니기에 주둔지를 이동할 때마다 가동시키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다. 그래서 우선 사람이 이동한 후 마법병대가 소환마법진을 그려 기간트를 불러오는데, 이걸 소환식이라고 한다.



도감에 적힌 설명을 보고 살짝 놀랐다.

마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물자 운송을 이런 식으로 하기도 하는구나.

마법이 없던 지구에서 온 만큼 대규모의 마법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이 들뜬다고 해도 장교가 장병들 앞에서 허술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법.

“그렇군. 오전에는 소환식. 오후에는 모의전이란 말이지?”

“예.”

“일단 지휘 막사에 다녀올 테니, 부소대장은 소대원들을 통솔하고 있도록.”

“알겠습니다. 미리 소환식장에 가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대충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카트린의 모습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 졌다.

그때, 문득 소환식이라는 게 굳이 군 병력을 대기시켜야 할 정도의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소환 이후에 바로 전장비도 하는데다가, 소환되는 물품이 기간트라는 중요한 병기니까 병력이 대기하며 지켜야 한다는 게 납득이 갔다.

“아, 그러고 보니 소환식은 어디에서 하지?”

보통의 군부대는 대부분의 행사를 연병장에서 했다.

하지만 순회순찰대는 방랑 부대.

연병장이라는 게 존재할 리가 없었다.

어제 들렸던 지휘 막사 앞에 큰 공터가 있던 것이 떠올라 말을 이었다.

“설마 지휘 막사 앞에서 하는 건가?”

“보통은 지휘 막사 앞에서 진행을 합니다만, 어제 갑자기 마수가 습격하는 바람에 샤를 중위님… 2소대장님이 급하게 다른 곳에다 소환마법진을 그리셨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소환식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카트린의 말에 문득 어제 이름 모를 중사가 연대장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도 분명 샤를 중위라는 이름이 등장했고, 공간이 협소해 다른 곳에 우리넬이라는 기간트를 불렀다고 했다.

자신을 내려 주고 연대장이 향한 방향이 어디인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혹시 저쪽 숲 너머를 말하는 건가?”

“아, 맞습니다.”

다행히도 정답이었다.

공식으로 소대장 업무 시작하자 마자 망신살 치를 뻔 했네.

“그럼 일을 마치고 그쪽으로 바로 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 2열 종대로 헤쳐 모여.”



각을 맞춰서 이동하는 소대원들을 뒤로하고 나는 장교수첩을 정리하며 본부 막사로 향하고 있었다.

아침 점호 시간에 네드 분대장이 소대원들에 대해 보고한 내용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뭐, 그중에는 누가 봐도 신임 쏘가리를 놀리기 위한 허위 보고도 조금 섞여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지.

네드 분대장이 생각보다 살갑게 구는 것만 같아 그리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



그리고 약 두 시간 뒤, 야영지 인근 숲속 공터.

기간트를 불러오는 소환식 때문인지 본부 막사는 계원들과 일부 장교들만 남아 한적한 분위기이였다.

다행히 마리안느 중대장은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데운 염소 우유를 마시며 소대장들의 점호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점호 상황을 깔끔하게 보고한 후, 소환식이 행해지는 장소로 바로 이동했다.



“야! 거기 너! 아씨, 삐뚤삐뚤게 그리지 말라고 했지! 계산도 개판으로 하는 새끼가… 아주 선도 개판으로 그리지? 똑바로 안 그려!”

소환식이 이루어지는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누군가가 사자후를 지르며 소환마법진을 그리는 2소대원들을 다그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이 2소대장인 샤를 중위님인가?

2소대원들은 넓은 공터 한가운데에 커다란 원을 그린 후, 그 안에 무수히 많은 선들을 긋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다른 연대 본부 병력들이 외곽에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다들 넓직하게 거리를 두고 서 있었기에 카트린과 네드 분대장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결.”

카트린이 나를 보고 경례를 했다.

네드 분대장 역시 급하게 소대원들을 차렷시키고 경례를 하려고 했지만, 내가 손을 들어 괜찮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저분이 2소대장이신 샤를 중위님이십니다.”

“우리가 3소대라고 하기에 기간트 소대만 세 개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보군?”

“…….”

카트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왜지…….

뭔가 또 실수했나?

“크흠.”

괜사리 헛기침을 한 번 하자, 카트린이 그제야 대답을 해 주었다.

“샤를 중위님만 마법병과이시고, 나머지 소대원들은 그냥 기간트 조종수입니다.”

“음? 왜 2소대장님만 마법병과인 거지?”

“그거야 당연히… 아무래도 소대장님께서 제국 서부 지역에 최대 규모의 영방군을 보유한 루겐바인가 사람이라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만, 저희 관군들은 마도학자들을 죄다 황실 근위부대인 금위병에게서 빌려 옵니다. 2소대장님도 금위병 직할 마법병단에서 파견 나오신 분입니다.”

“마법사가 아니라 마도학자?”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그걸 들은 몇몇 소대원들이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네드 분대장이 입을 열었다.

“괜히 저희 긴장했을까 봐 이렇게 달래 주시는 겁니까? 공상마법소설도 아니고, 세상에 마법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제법 괜찮은 농담이었습니다, 소대장님.”

아씨, 농담한 게 아닌데…….

괜히 넋 놓고 있다가 쪽을 당할 뻔했다.

첫날에 그래도 좋은 모습을 보여서인지 소대원들이 알아서 좋게 해석해 줘서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마법은 있는데 마법사는 없고, 대신 마도학자는 있다니.

이 세계의 마법 체계에 대해 강한 궁금증이 일었다.

그거야 곧 소환마법진이 발동하면 해결될 것 같으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그래. 너무 굳어 있는 거 같아서 말이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 어제처럼 전투를 나가는 것도 아니고, 고작 소환식이지 않습니까.”

네드 분대장 옆에 있던 루퍼스 병장이 뺀질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은근히 약을 올리는 것 같은 말투에 ‘이놈 봐라’ 싶었지만, 병장이니까 그려러니 했다.

내가 이 세계 군대에 대해서 잘 모르고 병장이어서 봐줬지, 한국이었으면 그냥 바로 완전군장 구보를 시키는 건데.

쩝.

“그나저나 2소대장님은 화가 많으신 모양이군.”

“저래 보여도 한때 중대원들에게 가장 평이 좋던 분이셨습니다. 지금이야 다른 별명으로 불리고 있지만, 처음 파견을 오셨을 때만 해도 천사라고 불리셨습니다.”

“호오, 천사라…….”

카트린의 말을 듣고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샤를 중위를 쳐다봤다.

“야이, 하… 새끼들이, 니들 다 휴가 짤리고 싶어! 대가리에 든 게 없으면 선이라도 똑바로 그려야 할 거 아냐! 내가 계산을 맡기냐, 뭘 맡기냐! 아니, 고작 선만 좀 똑바로 그리라는 건데, 그것도 제대로 못해? 우리 할머니도 너네보다 잘 그리겠다! 야, 꺼져! 이 새끼 맞선임이 누구냐! 존이야? 하, 나중에 소환식 끝나고 잠시 나 좀 보자.”

와아…….

천사였던 거 맞지?

거친 말들을 잔뜩 쏟아내는 샤를 중위의 말을 듣고 있자니, 천사라는 단어가 그렇게 위화감이 느껴질 수가 없었다.

역시 군대가 싸이코를 양성하는 것인가.



욕과 함께 진행되었던 2소대의 소환마법진 그리기도 어느새 막바지에 다달랐다.

PDA화 된 장교수첩을 열어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어느덧 10시 30분.

소환식을 마친 후, 간이 전장비를 하고 나면 얼추 점심시간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는 듯, 본부소대의 취사 병력들이 식사추진을 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아저씨, 준비 다 되었거든요? 기간트, 불러요?”

소환마법의 준비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한쪽을 바라보고 크게 소리치는 샤를 중위.

놀랍게도 그 방향에 있던 것은 연대장을 비롯한 과장급 간부들이었다.

그리고 연대장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OK 사인을 보내 샤를 중위가 아저씨라고 부른 게 자신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확인시켜 줬다.

“아저씨라니…….”

어처구니없는 하극상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오고 기가 찼다.

하지만 그런 나와 달리, 다른 이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법병과들은 전원 원칙상 금위병 직할 소속이니까, 엄밀히 말하면 아저씨라 불러도 무관합니다.”

“그런 건가?”

“뭐, 영방군이야 자체적으로 마탑을 운영해서 마법병이 있다고는 하지만, 국토방위군이나 순회순찰대, 제도상비군과 같은 관군은 따로 마탑을 운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국가 기관에서 양성된 마법병과들은 죄다 금위병에서 거둬 가니, 저희는 무조건 금위병한테서 마도학자 빌려야 합니다.”

생소한 용어들이 많이 나와서 급하게 장교수첩을 열어 도감을 확인했다.



— 영방군.

└ 영지방어군의 준말로 지방 영주들이 사적으로 운영하는 사병 집단. 제국 영토의 대부분을 지키고 있는 제국의 주력군이자, 귀족파를 상징하는 군대.



— 제도상비군.

└ 제도 블랙오리온에 주둔하며 제도를 수호하는 정규군.



— 언실리워커.

└ 첩보 및 암살 활동에 특화된 특수군. 전원 부사관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금위병.

└ 황실 직할의 최고위 수호부대. 전원 장교로 구성되어 있으며 휘하에 여러 특수병단을 보유하고 있다. 황제파를 상징하는 군대.



응?

여기 제국이라고 하지 않았나?

보통 제국이라 하면 강력한 관군이 특징인 걸로 아는데, 이 세계의 관군은 국경을 수비하는 병력 말고는 죄다 지방 영주들이 사병으로 관리를 하네?

아무래도 지구에서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제국의 개념과는 많이 다른 듯싶었다.

그래도 굳이 비슷한 느낌을 찾자면, 신성 로마 제국 같은 느낌이랄까.

아직 이 세계에 온 지 2일밖에 되지 않았기에 뭐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까지 내린 결론은 그랬다.

“그래도 명색이 군인인데, 아무리 파병을 나온 타군이라고 해도 그렇지, 대령한테 중위가 아저씨라 하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군. 작위는 아예 신경 쓰지 않는 건가?”

“신경을 쓰는 편이 보통입니다만… 샤를 중위님 같은 경우는 특이 케이스라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워낙 자기 색이 강하신 분이라… 거기에 마도학자들이 말만 군인이지 사실상 황실을 뒷배로 두고 있는 관료라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마도학자들은 군의관과 비슷하다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연대장에 대한 샤를 중위의 태도는 선을 많이 넘은 것 같은데…….

내가 너무 꼰대인가?

연대장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고.



그러게 자아성찰을 하고 있는 동안, 2소대원들을 원 밖으로 쫓아낸 샤를 중위가 소환마법진 한가운데에 선 후, 허리춤에서 등이 없는 랜턴을 꺼내 높이 들었다.

“소환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매지컬 체크하겠습니다. 혹시라도 마도구 소지하고 계신 분들은 지금 즉시 마도구의 전원을 꺼 주십시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에 걸레라도 문 것마냥 거친 입담을 뽐내던 샤를 중위가 답지 않게 공손한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겁이 더 났다.

잠시 후, 샤를 중위가 랜턴을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랜턴 안에서 진동이 일더니 푸른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 내가 마도구 끄라고 했지! 누굽니까!”

아무래도 누군가 마도구의 전원을 아직 끄지 않은 듯, 샤를 중위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충분히 샤를 중위가 화를 낼 만한 일이었기에 모두가 두리번거리며 범인색출에 나섰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진 신고를 하지 않았다.

“내가 직접 가서 마도구 때려 부수기 전에 당장 끄는 게 좋을 겁니다.”

으르렁거리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샤를 중위.

에휴, 천사라고 불리던 샤를 중위가 왜 저렇게 성질머리가 고약해졌는지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하여간에 꼭 이렇게 말을 안 듣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렇게 정체 모를 범인을 속으로 추궁하며 샤를 중위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얼굴을 붉힌 채 누가 봐도 크게 화났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 주던 샤를 중위가 랜턴을 내세우고 그 진동의 방향을 따라 범인을 색출하러 직접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뚜벅뚜벅.

뚜벅뚜벅.

“……?”

응?

어째서인지 샤를 중위가 점점 우리 소대 쪽을 향해 다가왔다.

어? 뭐야?

우리 소대원 중에 범인이 있는 거였어?

소대장으로서 꽤나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했을 때, 샤를 중위가 내 바로 앞에 섰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에 다소 날카로운 눈매, 피곤이 가득해 보이는 동공, 그리고 그 피로를 증명하듯 볼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꽤나 초췌한 몰골을 한 샤를 중위가 내 앞에 서서 랜턴을 내밀었다.

랜턴은 그 어때보다도 크게 진동을 하고 있었다.

아, 내가 범인이었구나.

‘아’는 무슨 ‘아’야.

내가 왜 범인이야?!

생각지도 못한 범인의 정체에 크게 당황한 사이, 샤를 중위가 내 손에서 무언가를 빼앗아 가더니 머리 위로 올렸다.

“내가! 마도구! 끄라고! 했지!”

그러고는 샤를 중위가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패대기 그 물건을 내팽개쳤다.

그 물건은 다름 아닌, 내 장교수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