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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소대장님, 죄송하지만 이번 전투는 제가 지휘하겠습니다.]

[…….]

뜬금없는 말에 당황해 말없이 가만히 있자, 그것을 부정이라 여긴 카트린이 말을 이었다.

[전투에 있어 강한 적보다 더 무서운 것은 믿을 수 없는 아군입니다. 소대장님은 오늘이 전입하신 첫날입니다. 아직 저희 소대원들과 팀워크를 아직 쌓지 못했죠. 때문에 섣불리 지휘하셨다가 문제가 생기기보다는 어떤 소대인지 지켜보시는 쪽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맞는 말이군. 그러면 오늘은 견학이라 생각하지. 지휘는 자네가 맡게. 나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빠져 있겠네.]

기간트를 처음 타는데다가, 여기는 현대전이 아닌 구시대의 냉병기전이 펼쳐지는 세계였다.

내가 한국군에서 익힌 군지식과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날 게 분명했기 때문에 우선은 간을 보기로 했다.

격납고 밖으로 나가자, 서너 기의 처음 보는 기간트들이 카트린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치리공공과는 다르게 생겼지만, 크기는 치리공공과 비슷한 걸로 봐서는 루퍼스 병장이 말한 또다른 D급 기간트, MS—826인 걸로 보였다.

그리고 다른 병사들이 치리공공의 정비 상태가 더 좋음에도 불구하고, MS—826을 탔는지는 MS—826을 본 순간 바로 알 수가 있었다.

날림으로 만든 치리공공과 다르게 MS—826은 그래도 통상적인 로봇의 형상을 띄고 있었다.

금속 재질로 만들어진 바디는 화살 따위는 튕겨 낼 수 있을 것만 같았고, 다소 뭉개져 있기는 했어도 황동빛을 띄는 헤드는 고대 그리스 병사를 연상케 했다.

치리공공이 단검과 버클러로 무장을 한 것과 달리, MS—826은 라운드 쉴드와 장창으로 무장을 한 게 누가 봐도 병기라는 걸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단지 소재를 나무에서 구리로 바꾸었을 뿐인데, 이 정도로 퀄리티에 차이가 나다니…….

다음부터는 기회가 된다면 치리공공은 절대 타지 말고 MS—826을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솔직히 말하면 둘 다 그다지 타고 싶지 않았다.

내가 타고 싶은 것은 카트린 하사가 탄 것처럼 최소 4층 높이는 되는 거대 로봇이었다.

[순회순찰대 서부군단 1사단 3연대 본부중대 3소대! 지금부터 마수 격퇴 지원작전을 나간다! 모두 나를 따르도록!]

[와아아아아아!]

카트린 하사가 탄 B급 기간트의 발뒤꿈치와 앞꿈치가 열리며 바퀴가 노출되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야영지 내부를 지나 밖으로 향했다.

MS—826에 탄 소대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어디 보자…….”

그 사이 나는 계기판을 확인하며 바퀴를 노출시키는 버튼이 뭔지 확인했다.

파일럿 감각 보정 시스템 덕분인지, 해당 기능을 활성화하는 데 필요한 버튼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해당 기체의 부스트 시스템을 감지했습니다.]

[동기화 완료.]

[부스트 어시스트 시스템 적용 완료.]



그러자 발에 달린 바퀴들이 노출이 되더니, 이내 허리 양옆이 열리며 압축된 공기를 뒤로 배출하기 시작했다.

부우우우웅!

“후하아아아!”

치리공공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출발한 소대원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체감상으로는 오전에 연대장과 같이 탔던 마차의 배 이상으로 빠르게 느껴졌다.

“진짜 하르마 로얄이랑 똑같네.”

처음 조종해 보는 기간트이기도 했고 약간 겁을 먹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치리공공의 조작감은 놀라울 만큼 하르마 로얄이랑 비슷했다.

야영지를 빠져나갈 때쯤, 기간트를 조종하는 게 완전히 익숙해졌다.



***



아멜을 비롯한 소대원들이 기간트를 몰고 떠나는 걸 바라보고 있는 정비분대.

그중에서 루퍼스 병장과 그의 부사수는 입을 떠억 벌리고 있었다.

“야… 야, 로이야… 봤냐?”

“봤지 말입니다…….”

“너 혹시 나 몰래 치리공공에 뭐… 이상한 장치 달았냐?”

“제가 그런 걸 왜 합니까? 그리고 저 그런 잡기술 없는 거 아시지 말입니다.”

“그러면 방금 치리공공 옆구리가 열리면서 공기를 배출한 건 뭔데?”

“루퍼스 병장님이 모르시는데,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이번에는 부사수인 로이조차 부정하지 않을 정도의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하게 되자, 루퍼스는 혹시 아까 겪은 일도 현실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라면 작동할 리가 없는 치리공공의 통신기능 말이다.



***



[부소대장님,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뭘?]

[소대장님은 원래 뭐 하시던 분이셨습니까?]

디스플레이에 출력되는 음성채팅창에 쉐인이라는 상병과 카트린 하사의 칸에 녹색 불이 들어와 있었다.

[왜 궁금한데?]

[아니, 그렇잖습니까? 저… 치리공공을 타고 저희를 완전히 따라오고 있는데, 이게 가능한 겁니까?]

[…….]

[저희가 타고 있는 이런 약간의 룬이 새겨진 양산형 C급 기간트도 아니고, 룬이 아예 안 새겨져 있는 D급 기간트인데, 상식적으로 따라온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잖습니까.]

치리공공과 크기가 비슷하길래 병사들이 탄 게 내 다른 선택지였던 또 다른 D급 기간트인 줄 알았는데, 음성채팅을 들어 보니 그게 아니었나 보다.

[생긴 거는 무슨 기생오라비같이 생겨 놓고서는 의외로 재주가 있었나 봅니다?]

[쉐인 상병, 말이 너무 많다.]

[에이…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치리공공은 무선 통신기능이 없어서 저희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할지 조금 고민에 잠겼다.

분명 병사들에게 약간의 풀어짐을 허용하는 것은 긴장감을 완하시킬 수 있는 좋은 장치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군기가 잡힌 다음의 이야기.

이제 첫날인데, 그것도 귀족인데 무시당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기도 좀 그랬다.

더군다나 카트린은 이미 자신과 한 번 통신을 주고받았기에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뭐라 말을 하는 게 맞아 보였다.

[글쎄… 그건 과연 어떨까, 쉐인 상병.]

[허억!]

갑자기 내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자, 쉐인 상병이 마치 만화 속 캐릭터마냥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소, 소대장님이십니까?]

[그러면 내가 소대장이지, 아니면 적일까?]

[죄, 죄송합니다!]

쉐인 상병이 누가 들어도 ‘아, 이 녀석 당황했네’라는 톤의 목소리로 대답을 한 뒤 침묵을 유지했다.

흐음… 뭐, 이 정도는 봐줄까.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치리공공에 타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신을 할 수 있다는 게 알려지자, 다들 많이 조심스러워진 것이었다.

소대원 중에는 카트린이랑 원래부터 친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여자라서 조금 만만히 봐서인지 몰라도, 마치 아는 누나처럼 대하던 다소 무례한 녀석들도 있었지만, 내가 통신을 듣고 있다는 걸 알자 그 모든 게 다 사라졌다.



얼마나 이동을 했을까, 어느덧 카트린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고 들려왔다.

[전원 정지해라. 작전 지역 도착. 작전을 시작한다. 목표 적성 마수는 3급 마수 둘, 5급 마수 아홉이다. 3급 마수는 내가 하나씩 상대할 테니, 너희는 5급 마수들을 정리해라!]

작전 지역은 야영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애시당초 마수들이 갑자기 야영지를 공격해 온 것을 퇴치하는 거니까 당연한 소리인가.

작전 지역에 도착하고 나자, 왜 이 세계가 기간트 기술이 발전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마수는 특촬물에서 볼 수 있는 괴수마냥 덩치가 매우 컸다.

C급이나 D급 기간트보다는 확실히 크고, 개체에 따라 B급 기간트보다 크기도 한 이 거대한 크리쳐들은 확실히 사람이 맨몸으로 상대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 보였다.

이번에 우리가 격퇴해야 할 마수들은 커다랗고 동그란 몸체에 기다란 목이 두 개가 나 있는 히드라형 마수 둘과 해파리처럼 속이 그대로 투과되어 보이는 부정형의 마수 일곱, 그리고 나무늘보처럼 팔이 기이하게 긴 기분 나쁜 마수 둘이었다.

카트린은 하사임에도 불구하고 분대전투 지휘 경험이 적지 않은 듯 매우 능숙하게 지휘를 했다.

카트린이 내리는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즉각적으로 움직이는 게 소대원들 간의 팀웍이 하루이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미 팀웍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는 팀이라 내가 여기에 잘 스며들 수 있을지 조금은 걱정이었다.

그래도 소대장이 된 이상 어떻게든 스며들어야 했다.

소대원들과 어울리지 못해 겉도는 소위는 군대에서 복무할 때 종종 본 적이 있었다.

그런 소대장들의 결말은 그리 좋지 못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관심장교로 등록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알렉스 일병, 5시 방향 50미터 지점에 적이다.]

[예, 예!]

나도 기간트에 타고 있는 만큼 전투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앞서 떨어져 있겠다고 말도 했고, 치리공공은 내 첫인상을 나쁜 의미로 배신하지 않았기에 그럴 수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녀석을 향해 검을 들어 슬쩍 휘둘러 봤는데, 계기판에 보이는 기체 파츠별 체력바가 조금씩 깎여 내려가고 있었다.

공격하면 할수록 오히려 이쪽의 데미지가 누적되어 가고 있는 기이한 상황.

별수 없이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포기하고 부대원들의 색적을 도와주기로 했다.

색적은 어렵지 않았다.

미니맵의 도움으로 녀석들의 기습을 하나둘 알려 주자, 소대원들은 손쉽게 공격을 막아 냈다.



카트린의 지휘와 나의 색적 지원 덕분에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가는 격퇴 작전.

마침내 모든 마수들을 분대전술에 맞춰 격퇴하고 나자, 소대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해치웠나?]

통신을 통해 들려오는 소대원 중 누군가의 목소리.

순간 불안한 느낌이 엄습해 왔다.

커뮤니티에서 흔히들 부활의 주문이라고도 불리는 그 말.

그리고 그 명성은 마치 거짓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갑자기 보라색 스파크가 튀기 시작하더니 새로운 마수들이 등장했다.

그 마수들은 이전에 우리가 토벌한 마수들과는 전혀 다르게 생긴 놈들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나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카트린 하사, 현재 총 적의 수를 말해라.]

[3급 마수 하나에 4급 마수 셋, 5급 마수 넷으로 총 여덟입니다.]

[분명히 적은 총 여덞 마리가 맞나?]

[예, 맞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적의 수를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이번에는 미니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미니맵에 표기되는 붉은색 원은 아홉.

전투를 진행하면서 이 붉은 색 원이 적이라는 건 이미 확인했다.

즉, 지금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아홉 번째 적이 하나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정황상 이 보이지 않는 마지막 녀석이 적의 수를 계속해서 늘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카트린 하사, 설명은 나중에 하겠다. 잠시 내가 지휘를 맡겠다.]

[안 됩니다.]

[왜지?]

[그거야 당연히 소대장님이 낙하… 아, 죄송합니다.]

[내가 낙하산이라고?]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막상 그 단어를 직접 듣자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실수한 것은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소대장님과 저희 소대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입니다. 뭐, 저는 개인적으로 소대장님과 일전에 만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신뢰가 쌓여 있지 않은 상황에 팀플레이를 기대한다는 것은 가장 해서는 안 될 행동 중 하나라고 배웠습니다.]

카트린이 나를 보고 있을 리는 없지만, 합리적인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말도 맞다, 카트린 하사. 하지만 우리는 행정이 아닌 야전 쪽이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임기응변을 발휘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은가?]

[그렇기는 합니다만…….]

[지금 내가 짚히는 게 있어서 그러네. 아주 잠깐이라도 내 말을 따라 주게. 혹시라도 문제가 발생할 것 같다면 언제든지 지휘권을 넘겨 주겠다는 조건은 어떤가?]

[후우, 알겠습니다. 그 정도 조건이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러면 다들 내 말에 따라 움직여 주기 바란다.]

카트린에게서 지휘권을 건네받자마자 소대원들과 카트린의 움직임을 통솔하며 위치를 계속해서 바꿨다.

그러자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미니맵에는 탐지되는 마지막 적이 거기에 호응하듯 자리를 바꿔가며 우연히라도 눈먼 검에 맞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이동을 했다.

아무래도 적은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무언가의 장치를 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한참을 전투를 해 가며 보이지 않는 심리전이 계속 이어졌다.

[지금이다! 볼보 일병! 그대로 창을 뒤로 뻗어라!]

약 20분간 이어진 배치 싸움 끝에 마침내 소대원 하나를 보이지 않는 적의 근처에 배치시킬 수가 있었다.

[응? 무언가 있습니다!]

볼보 일병의 보고를 들은 카트린이 그제서야 왜 내가 그리도 소대원들의 움직임을 통제했는지 눈치채고 볼보 일병의 창이 향한 곳을 향해 뛰어들어 검을 휘둘렀다.

깡!

냉병기들끼리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잠시 스파크가 튀었다.

우웅—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대기가 잠시 진동을 하더니 마치 카멜레온마냥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

모습을 드러낸 적을 보자, 소대원들과 카트린 하사가 급히 진형을 갖췄다.

[뭐지? 저 기간트는?!]

은신이 걷히고 강제로 모습이 드러나게 된 적의 정체는 카트린이 탄 B급만한 크기의 기간트였다.

원형의 투구로 두부를 보호하고 있는 그 기간트는 마치 골무를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고, 어깨와 연결이 되어 있는 나무잎으로 짜여진 망토는 마치 우의를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움직임이 심상치 않길래 이상하다 느꼈건만… 설마 이 댄들라이온을 감지했을 줄이야. A급 기간트도 아닌데 감지당하다니… 참나…….]

적 기간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냐?!]

곧바로 적의 정체를 묻는 카트린 하사.

뭐, 그런다고 해서 적이 정체를 순순히 알려 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부소대장님! 놈의 흉갑부에 마크가 있습니다!]

알렉스 일병의 말에 나 역시 시야를 돌려 적성 기간트의 흉갑 부분을 살펴봤다.

그러자 놀랍게도 화면이 줌인되더니, 따로 그 부분만 네모 창으로 분리되면 좌측 상단에 출력되었다.

분리된 창 화면에 나타난 것은 검정색의 배경에 흰색의 늑대머리 모양이 새겨져 있는 엠블렘이었다.

[서, 설마 저 부대마크는!]

카트린이 적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했다.

[늑대교단이다! 통신! 지원 요청해!]

카트린의 다급한 목소리가 음성채팅을 통해 모두에게 전달되었다.

통신병을 맡고 있는 상병 하나가 타고 있는 기간트 뒤에 메고 있던 백팩에서 도구를 하나 꺼낸 후 불을 붙였다.

그러자 노란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귀찮게 됐네.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 뭐. 네놈들은 전원 여기서 죽어 줘야겠다.]

갑자기 기간트가 자세를 낮춰 지면에 양 손바닥을 얹었다.

그러더니 기간트의 코어에서 녹색의 빛이 일더니 땅이 요동쳤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순식간이었다.

놈을 중심으로 거대한 나무 줄기들이 일어나며 우리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