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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PH—7200과의 첫 만남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PH—7200은 카트린이 탑승한 이름 모를 B급 기간트의 반 정도되는 크기였다.

하지만 단순히 크기가 작다고 해서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멋들어진 금속 재질로 몸체를 구성하고 있는 B급 기간트를 보고 당연히 다른 모든 기간트 역시 동일한 속성을 보유하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D급 기간트 PH—7200은 금속 재질이 아닌, 목재로 만들어진 녀석이었다.

때문에 박력이 B급에 비해 너무도 떨어졌다.

안면부 역시 B급에 비해 퀄리티가 많이 떨어졌다.

마치 자로 재서 만든 듯, 군 병기답게 얼굴에도 각이 칼같이 잡혀 있던 B급과 달리, PH—7200은 어린애가 숙제로 조각한 듯 엉성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얼굴을 본따 만든 B급 기간트의 안면부와 달리, PH—7200의 안면부는 마치 잠수부의 그것처럼 안면부 전체를 뒤덮는 커다란 렌즈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실 나무 재질로 만들었다 해도 모든 면에서 철제보다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목재에는 분명 목재만의 장점이 있고, 철제가 가질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욕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퀄리티.



나무로 만드는 건 좋다, 이거야.

왜 로봇을 만드는 데 나무 소재를 사용하는지 의문이지만, 그거는 이 세계만의 룰일 수도 있으니까 넘어가기로 하고.

기왕에 만들기로 했으면 좀 제대로 만들면 안 되나?

다른 곳도 아니고, 여기 군대잖아.

아무리 군대가 AM이나 날림이 판치는 곳이고 일단 굴러가면 OK주의라지만, 이거는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몸체를 구성하고 있는 목재의 마감처리 때문이었다.

옻칠이나 니스 마감까지는 기대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겉보기에는 말짱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PH—7200은 옹이구멍이 전면 플레이트에 대놓고 드러나 있었다.

그래.

이것까지도 넘어갈 줄 수 있다.

앤티크한 부분이라고 하면 되니까.

거듭 말하지만, 왜 로봇을 제작하는 데 목재를 썼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로봇은 기술력의 결집체 아닌가?

이게 무슨 고대 티탄의 어쩌고 전설의 저쩌고 그런 거야?

아니잖아.

로봇에 앤티크가 왜 필요하냐고!

할 말은 많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어찌되었든 나는 이제 막 전입 온 신임 소대장.

첫날부터 꼬장을 부리면 다들 안 좋게 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끝내 참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루퍼스 병장.”

“예, 무슨 일이십니까?”

루퍼스 병장을 한 번 쳐다본 후, 고개를 올려 PH—7200을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정비, 다 한 것 맞나?”

내 질문에 루퍼스 병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예에… 뭐어…….”

대화를 이어 나가기 전에 잠시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며 화를 약간이나마 가라앉혔다.

“지금 내 눈에는 PH—7200…….”

“보통 그렇게 부르지 않고 치리공공이라고 부릅니다.”

“그래, 치리공공. 정비를 다 했다 말한 것치고는 장갑이 너무 부실한 거 아닌가?”

내가 가장 크게 실망한 부분은 이거였다.

목재로 만들어졌다고 할지라도 병기인 이상 어느 정도의 방어력은 갖추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치리공공은 카트린이 탄 B급 기간트와 다르게 장갑이 전무했다.

골격으로만 이루어진, 나무 소재의 흉칙하고 기괴한 몰골의 기간트.

그게 바로 치리공공이었다.

“아, 혹시… 소대장님은 D급 기간트를 처음 보시는 겁니까?”

“그래.”

처음 본 건 사실이니까.

아멜이 이전에 D급 기간트를 봤든 안 봤든 그게 지금 상황에서 크게 중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D급은 B급 이상 기간트와 달리 룬에 주문을 새기지 않습니다.”

“그건 아까 들었다.”

“애시당초 D급은 광산에서 캐낸 마석을 코어로 해서 대충 만든 기간트입니다. D급에 장갑까지 추가한다? 움직이지도 못할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목재는 그렇지 않나?”

“목재 정도면 양호한 거지 말입니다. 진흙 같은 걸로도 만들어지는 거에 비하면 말입니다.”

…그 정도면 로봇이 아니라 그냥 골렘 아닌가?

그리고 여기 무슨 소련군이야?

일단 굴러만 가면 OK야?

[소대장님, 시간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안 가실 거면 확실하게 말해 주십시오.]

나무로 만든 D급 기간트를 처음 본 충격에 루퍼스 병장에게 자초지종을 묻는 사이, 시간이 제법 경과되어 었나 보다.

카트린의 차가운 목소리를 듣자, 지금은 군말 없이 골렘인지 기간트인지 분간이 안 되는 치리공공에 타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격납슬롯에 보관 중인 치리공공 한 대 앞으로 다가갔다.

4층 높이 건물의 크기였던 B급 기간트와 달리, 치리공공은 그 절반 정도 되는 크기라 그런지 유난히도 별로 커 보이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치리공공에 올라타기 위해 페어리 클로를 치리공공의 가슴팍에 있는 콕핏에 조준했다.

그러자 루퍼스 병장의 부사수가 허겁지겁 나를 막았다.

“아이고, 소대장님. D급 기간트는 내구도가 좋지 않아 페어리 클로로 올라타면 파손됩니다.”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페어리 클로로도 피해를 입힐 수 있다면, 이건 기간트가 아니라 그냥 커다란 표적지에 불과한 거 아닌가?

“소대장님, 페어리 클로로 타셔도 되는데, 정비반장이 전투 중에 파손된 거냐고 물으면 전 사실대로 말할 겁니다.”

약간의 뼈가 담겨 있는 루퍼스 병장의 말.

…건물 2층 높이 정도의 로봇이니 그냥 기어 올라가서 타자.

길거리에 있는 가로수도 타 본 적이 없는 나인데, 과연 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이 몸은 송창수가 아니고 아멜 루겐바인이지만, 후작가의 자식인 아멜이 나무를 능숙히 탈 것 같지는 않았다.



…라는 것은 내 착각이었다.

소프트웨어도 하드웨어도 나무를 타 본 경험이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치리공공의 외피를 타고 올라가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치 내가 원숭이가 된 것 같은 기분.

“오오…….”

내가 쉽게 올라가 치리공공에 타는 것을 본 루퍼스 병장이 나지막히 감탄사를 날렸다.

콕핏에 탑승하기 전, 고개를 돌려 루퍼스 병장을 내려다보니 어디선가 사다리를 가져온 상태였다.

아무래도 루퍼스 병장은 내가 치리공공을 기어서 올라탈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나 보다.

내가 콕핏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본 루퍼스 병장이 부사수를 시켜 가져온 사다리를 원래 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했다.

가져온 건 자신이 아닌데 돌려놓아야 하는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부사수가 살짝 짜증난 듯 했지만, 어쩌겠나.

여기는 군대인데.

억울하면 너도 장교로 재입대해.

해치를 열자, 안에서 목재 특유의 냄새가 물씬물씬 흘러나왔다.

IT 업계에 취업한 이후, 여유가 없어 자연의 냄새를 맡지 못한 상태라 그런지, 나무 냄새를 맡자마자 기분이 좋아졌다.

콕핏 안에 마련된 것은 기체 컨셉을 그대로 따라한, 나무로 만든 조종간과 의자였다.

안으로 들어가 앉으니 밖에서 볼 때는 불투명하던 안면부가 그대로 시야가 되어 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애시당초 장갑도 달지 않은 D급 기간트인데, 카메라 장치가 있을 리가 만무하겠지.

출력되는 정보도 없이 내 육안으로 시야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은 통상적인 로봇의 개념을 깨는 듯했다.



[오딧세이 시스템 접속확인.]

[사용자 확인되었습니다.]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입니다.]

[신규 저장데이터를 작성합니다.]

[3… 2… 1… 완료되었습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여자 목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치리공공의 안면부를 장식하고 있는 대형 렌즈가 반전되며 온갖 정보가 유리창에 출력되기 시작했다.

날림으로 만들어진 치리공공의 상태와는 명백하게 어울리지 않는 화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좀 더 확실한 확인을 하기 위해 루퍼스 병장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루퍼스 병장.]

“예, 소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치리공공은 시야 확인을 내가 직접해야 하나?]

“예. 말씀드렸잖습니까. D급 기간트는 그냥 코어에 마석만 대충 때려 박아서 굴리는 녀석들이라고 말입니다. 소대장님께서 아시는 기간트와는 많이 다르실 겁니다. 많이 충격받으셨겠지만, 이게 바로 양산형입니다.”

예상한 그대로의 답변이 돌아왔다.

장교수첩 때처럼 이것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아마도 오직 나한테만 적용되는 특수한 상황.

우우우웅―

그러자 마치 내 생각에 동조한다는 듯 장교수첩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참나, 이게 무슨 S사의 G노트도 아니고… 그리고 난 사과파였는데…….



[아크 시스템 기동완료.]

[오딧세이 시스템과의 연결 완료.]



― 오딧세이 시스템 동기화 100% 완료.



순간적으로 강한 위화감이 드는 듯 하더니, 나를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무형의 파장이 원형으로 퍼져 나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응?”



― 전방위 감지 시스템 Check : Green

― 천공무기고 연결 Check : Red

― 파일럿 센스 어시스던트 시스템 가동 Check : Green

― 크래프트 어시스던트 시스템 Check : Red

― 오버부스트 시스템 Check : Red

― 화이트 제너럴 모드 Check : Unknown



이해할 수 없는 명령어들이 순식간에 화면에서 지나갔다.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명령어들은 화면에서 금새 지워졌고, 남은 것은 전방위 감지 시스템(Omnidirectional Detection System)과 파일럿 감각 보정 시스템(Pilot sense Assistant System)뿐이었다.

“이건… 미니맵인가?”

전방위 감지 시스템이 무엇인지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커다란 렌즈에 투영되는 화면 오른쪽 하단에 마치 게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미니맵이 표기되었으니까.

특이할 만한 점은 미니맵이 한 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화면 왼쪽 하단에 역시 무언가가 투영되었는데, 사각의 미니맵이 아닌, 중앙이 조금 볼록한 원형의 레이더였다.

중앙에 Z축이 있는 걸로 봐서 오른쪽 미니맵이 2차원적인 지도라면 왼쪽 미니맵은 3차원적인 공간 좌표를 알기 위한 미니맵으로 보였다.

“이게 전방위 감지 시스템이라 하면… 파일럿 센스 보조 시스템은…….”

사실 그것 역시 무엇인지 아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치 내가 기간트가 된 듯 감각을 공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간트는 조종간이 콕핏에 설치되어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지만, 원래는 중장비처럼 기계장치를 통해 조종하는 병기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PAS의 도움을 받자, VR기기를 착용하고 게임을 하듯 움직임이 내 실제 움직임에 딱 맞춰 반응을 해 줬다.

그건 그렇고, 뭔가 익숙한 느낌인데…….

어디선가 겪어 본 듯한 느낌에 잠시 기억을 더듬어 봤다.

아 맞다! <하르마 로얄>!

화면 UI(User Interface : 사용자와 시스템 사이의 의사소통 매개체.)나 로봇 조작감이 내가 대학생 시절 즐겨했던 VR 대전 격투게임 <하르마 로얄>과 유사했던 것이다.

아니, 완전히 똑같았다고 표현하는 게 오히려 더 정확할 정도였다.

혹시 여기 <하르마 로얄> 속인가?

그런데 하르마 로얄 PVP 게임이라 스토리 모드 같은 거는 없었는데…….

종종 이벤트 형식으로 열리는 난투 모드에서 세계관에 대한 짤막한 정보가 공개되기는 했어도, 그리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다.

일이 이리 되니, 이벤트 때 잠깐 열린 PVE 컨텐츠를 보상만 받고 더 이상 플레이하지 않은 게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소대장님, 저 먼저 출격하겠습니다.]

좌석 아래 쪽에서 카트린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마이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큰 소리로 말하면 통신이 되지 않을까?

[나도 지금 준비 완료됐어. 같이 가지.]

하르마 로얄을 접은 지 몇 년이 되었지만, 그래도 클로즈 베타 때부터 해 왔던 고인물에 헤비 게이머였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그때 그 감각을 되살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물론 랭킹 상위권을 하던 시절보다 실력은 떨어질지는 몰라도, 이런 기본적인 움직임 자체를 구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치리공공 옆에 놓여져 있던 버클러를 왼손목에 장착하고 치리공공 기준으로 롱소드보다 조금 작은 목검을 오른손에 집어든 채 통로를 따라 격납고 밖으로 나갔다.



***



아멜이 치리공공을 타고 떠난 격납고 안.

일지를 작성하고 있던 루퍼스 병장이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무언가를 적기 망설이고 있었다.

“루퍼스 병장님, 왜 그러십니까? 저희도 여기 적당히 정리하고 쉬시지 말입니다.”

기간트들이 떠나고 난 뒷자리를 다 정리한 루퍼스 병장의 부사수 로이 일병이 정비 물품을 창고에 넣으며 말했다.

“어? 어어, 그래야지.”

“무슨 일 있으십니까?”

부사수의 질문에 루퍼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방금 자신이 본 장면이 정확한 게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십니까?”

망설이던 루퍼스는 부사수에게 자신이 보고 들은 걸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아, 실은 소대장님이 출격하시기 전에 치리공공으로… 실버하운드랑 통신한 것처럼 보였거든.”

실버하운드는 부소대장인 카트린 하사가 타고 출격한 B급 기간트의 약칭이었다.

정확한 명칭은 B—14 실버하운드였다.

“에이, 루퍼스 병장님. 재미없는 농담 그만 하십시오. 여름도 다 지났는데, 그게 무슨 무섭지도 않은 괴담입니까?”

“…그렇지?”

“D급 기간트 코어에는 룬이 새겨져 있지 않는데, 어떻게 통신기능이 작동한다는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