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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어?

하는 순간에 이미 눈앞이 핑 돌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

“야! 야야!”

다른 사람들이 급하게 소리를 지르는 게 귀에 들어왔다.

카트린이 휘두른 주먹은 상당히 매웠다.

눈에 눈물이 찔끔 고이게 할 정도로 강력한 펀치.

바닥에 쓰러진 채 얼얼한 턱을 어루만지며 카트린을 올려다봤다.

“이거 좀 놔 보십시오! 야, 아멜! 너, 안 일어나?!”

헬창들이 달라붙어 뜯어 말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공격 행위를 이어 나가려고 하는 카트린.

“소위님, 괜찮으십니까?”

맨 처음 나에게 지휘 막사 방문 목적을 물었던 해럴드 상사가 손을 내밀며 부축해 주었다.

도대체 이 몸의 원주인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카트린은 씩씩거리며 나를 죽일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카트린 하사, 그만해! 상대는 장교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루겐바인 후작가의 장남이라고. 뭐,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것도 같은데, 그래도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르면 쓰나.”

예?

아니, 아멜, 이 녀석 뭘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길래 평판이 이따구야?

카트린에게 주먹으로 맞은 것보다 해럴드 상사가 한 말이 더 큰 타격이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카트린! 가문의 부활을 꿈꾸는 거 아니었나? 자작가의 여식이 후작가의 장남을 때렸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어떻겠나? 그것도 진 루겐바인 후작님의 자식을 말이야!”

해럴드 상사의 말을 들은 카트린 하사가 호흡을 몇 번 거칠게 내쉬더니, 이내 분노를 가라앉히는 모습을 보여 줬다.

그제야 나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녀를 물리적으로 구속하고 있던 헬창들이 그녀를 풀어 주고 거리를 벌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언제 그녀가 급발진을 할지 모르니, 여전히 우리 둘을 두고 둘러싸고 있었다.

“후우,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분노에 눈이 멀었습니다, 소위님. 한 번만 봐주십시오.”

입으로는 사과하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분노가 서려 있는 카트린.

맞은 게 억울하기도 하고 열도 받지만, 몸의 원주인이 한 짓이 뭔지 모르니 따지기도 애매했다.

말하자면 이건 퇴직한 사수가 싼 똥을 부사수가 처리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IT 업계는 이직율이 높다 보니 의외로 똥을 몰래 싸질러 놓고 퇴사나 이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연히 그 똥을 치워야 하는 것은 새로운 들어오느 사람의 몫이었다.

그리고 내가 일하던 회사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수습이라면 이미 질릴 만큼 해 봤다.

살인 같은 범죄라도 저지르지 않은 이상 수습하지 못할 것은 없다는 자신감이 나에겐 있었다.

뭐, 여기는 신분제 국가이기도 하고, 황족을 모독하지 않은 이상 후작가의 자식인 내가 감당 못할 일이 뭐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몸의 원주인이 싼 똥을 치우기로 마음을 먹고, 카트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사.”

“…뭡니까?”

내가 말을 걸자, 카트린이 차가운 목소리로 내게 답했다.

“하사, 난 내가 자네에게 한 짓이 뭔지 잘 모르겠네.”

“…뭐어?”

나를 쳐다보는 카트린이 눈빛이 더욱더 험악해졌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우리는 같은 소대원이지. 아마도 자네가 부소대장이겠지?”

“…….”

“같은 팀끼리 앙금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난 생각하네. 등 뒤를 믿고 맡겨야 할 아군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면 그것만큼 엉망인 것도 없지.”

“…….”

내 말을 들은 카트린과 다른 부사관들이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오늘 이 부대에 전입해 온 사람은 아멜 루겐바인이 아니라 그냥 한낱 소위다. 내 경우에는 아멜 소위가 되겠지. 아무튼 내가 어떻게 살아왔든, 내가 어떤 사람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단 말일세. 후작가의 자식? 이곳에 발을 디딘 순간, 난 일개 소위에 불과한 군인이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알고 계십니까?”

카트린은 도저히 내가, 아니, 아멜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왔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그래.”

“하지만…….”

“좋다, 하사. 아무리 그래도 사내가 되어서 말 한 마디로 과거의 일을 청산하는 것은 우습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에게 쌓인 게 있다면 한 대 세게 때려라. 그동안 쌓인 감정을 싹 담아서 말이야. 완전히 잊으라는 소리는 안 하겠다. 대신 적어도 부대에 있는 동안 더 이상 사적인 감정을 가지지 않기로 약속해라.”

“하아, 좋습니다.”

카트린은 뭔가 내키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한 대 때릴 수 있다 생각해서 마지못해 승낙하는 모습이었다.

부웅! 부웅!

이미 한 대를 맞아서 두 번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녀가 팔을 돌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퍼억!

팔을 두어 번 휘두른 카트린은 그대로 체중을 실어 내 볼을 주먹으로 세게 강타했다.

두 번째로 맞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매서움이었다.

눈앞이 핑 돌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몸의 원주인이 싼 똥을 치우려면 더 이상 추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했기에 필사적으로 고통을 참았다.

거기에 내 후임이 될 사람에게 얕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입 안을 감도는 철분 가득한 핏덩어리를 살짝 고개를 돌려 툭 내뱉었다.

야전 막사라 다행이었다.

한편, 이 몸의 원주인이 보일 리 없는 터프한 모습에 막사 내의 다른 이들이 모두 놀라는 듯했다.

“그러면 소대장님, 언제부터 출근하십니까?”

“언제부터라니, 지금부터지. 아까 말했지 않나?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아멜 루겐바인이 아닌 아멜 소위라고.”

다시 한번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람들.

아니, 아멜, 이 녀석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사람들이 평범한 말 하나하나에 놀라냐고.

“도대체 이게 무슨… 후우, 잘됐습니다. 그러면 지금 바로 저랑 나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음…….”

아직 제대로 행정처리가 된 것이 아니었기에 해럴드 상사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해럴드 상사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예에, 뭐… 가셔도 좋습니다, 소위님. 행정처리야 뭐, 저희가 알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으음, 방금 모습으로만 봐서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소위님, 여기는 부대입니다. 군인이라는 신분으로 있는 이상, 문제를 일으키면 군법재판에 회부될 수 있는 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허튼 짓을 하면 바로 보내 버리겠다는 협박에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끄응…….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앞으로 더 눈치가 보일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꼬투리 잡히지 않게,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카트린이 먼저 앞장서자, 나 역시 그 뒤를 따라 지휘부 막사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일반 병사들이 짐을 나르고, 텐트를 치고, 작업하는 공간을 지나, 약간 인적이 드문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소대장님.”

주위에 보는 눈이 없어지자, 카트린이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뭔가?”

카트린이 쭈삣쭈삣 하면서 망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는 분위기상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 일을 아무렇지 않게 잊고 지내라는 것은…….”

“아직도 그 이야기인가?”

“하지만 소대장님, 소대장님에게는 그 일이 한낱 유희에 불과했을지 몰라도, 저한테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지금은 군인이긴 해도 전역하면 자작가의 여식입니다. 만약 소대장님이 그날 저지르신 일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전 시집도 못 갑니다.”

유희? 여자? 시집?

이 세 가지 키워드의 조합이 의미하는 바를 잠시 생각해 봤다.

“아, 혹시… 우리, 연인 사이였나?”

갑자기 카트린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런… 넌지시 물어봐야 했는데, 너무 대놓고 물어봤다.

이래서는 맞아도 문제고, 아니어도 문제였다.

“후우, 제가 미쳤다고 소대장님과 연애하겠습니까?”

내가 먼저 무례하게 굴었으니, 이 정도 쓴소리는 들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싫은 티를 내면 나도 좀…….

아니지.

어차피 이 몸은 내가 아니라 아멜이니까 마음에 상처를 받을 것도 없나?

아, 진짜… 돌아 버리겠네.

좀 얌전하게 살지, 무슨 사고를 그리 많이 쳤길래 평판이 이따구냐고.

그런 기억들이 없는 상태에서 아멜을 연기하려니 미칠 지경이었다.



잠깐 동안 이어진 침묵.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카트린은 정말 선녀가 따로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저 입에 튀어나오는 게 딱딱한 군인 말투만 아니라면 딱 좋을텐데.

하지만 여기가 군대인 만큼 그거는 어쩔 수 없었다.

“하사.”

“네, 소대장님.”

“내가 어떻게 해 주길 원하나?”

“잘… 모르겠습니다.”

“왜?”

“아까 지휘 막사에서 그러셨지요, 아멜 루겐바인이 아닌 아멜 소위라고.”

“그랬지.”

“솔직히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소리인가 싶었습니다. 정말 제가 알던 그 아멜 루겐바인이 맞나 의심이 될 정도로 말입니다. 그렇게 여자를 밝히고 맨날 술이나 먹고 망나니처럼… 아…….”

카트린은 어느새 튀어나오는 자신의 본심에 놀라 말끝을 흐렸다.

역시 아멜, 이 녀석… 망나니였구나.

망나니도 그냥 망나니가 아니라 완전 난봉꾼이었나 본데.

“괜찮네. 아무래도 자네는 나를 때릴 수 있는 권한보다 내 진정성 어린 사과가 필요한 듯하군. 미안하네. 그때에 저지른 일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네. 여러모로 피해를 준 것 같아 미안하군.”

그렇게 말하며 카트린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카트린이 머뭇거리더니 내 손을 잡아 악수를 해 주었다.

순간 온몸이 찌릿했다.

와.

사람 손이 어떻게 해야 이렇게 말랑말랑할 수가 있는 거지?

흡사 아기들의 볼딱지를 만지는 것마냥 말랑한 살의 감촉에 나도 모르게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 시간이 영영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카트린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아, 중요한 장면인데…….

표정이 풀어질 것만 같았다.

왜 이러지?

내가 연애경험이 없는 모태솔로라서?

하지만 연애경험만 없다뿐이지 여자에 대한 면역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대학교 신입생마냥 사소한 스킨쉽 하나에 마음이 설레이자, 나도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설마 몸이 반응하고 있는 건가?

망나니인 이 몸이?

“큼큼…….”

괜히 몸이 멋대로 움직여 실수를 저지를까 싶어, 서둘러 손을 거둬들였다.

카트린은 만감이 교차하는지 다소 복잡해 보이는 시선이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다시금 찾아왔다.



말없이 걷다 보니, 어느덧 소대가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응?”

그런데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저 멀리에 4층 높이 정도 되어 보이는 큰 창고가 눈에 들어왔다.

텐트인 지휘부 막사나 생활관이 역시 게르인 것처럼 창고 역시 목조로 급하게 만든 티가 확연했다.

하지만 4층 높이의 간이 목조 건물은 특이하다 할 만큼 이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었다.

그리고 카트린은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설마 저기가 소대 생활관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B급 이하 기간트를 보관하는 격납고입니다.”

기간트.

분명 연대장의 입에서도 언급된 단어였다.

내가 생각하는 그 기간트가 맞다면…….

“단결.”

그때, 간이 목조 건물에 가까워진 우리를 향해 병사들이 경례를 했다.

정비 중이었는지, 그들 앞에는 냉병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래, 단결. 임벨 병장, 다른 애들은?”

“근무 지원 나갔습니다.”

외부인인 내가 봐도 병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병사가 대답했다.

다른 병사들은 작업시켜 놓고 혼자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배터리 네 칸짜리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일단 인사 드려. 새로 오신 소대장님이시다.”

그제야 모든 병사들이 작업을 일시 중단하고 나를 향해 경례했다.

“단! 결!”

“단결. 만나서 반갑다. 난 아멜…….”

내 소개를 하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칙대로라면 이름을 말하는 게 맞겠지만, 워낙에 아멜의 평판이 안 좋은데다가 후작가라는 뒷배를 내세우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위라고 한다.”

아까 카트린과 한 약속을 지키듯 이번에도 아멜 소위라 스스로 소개하자, 카트린이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일반 병사들 앞에서까지 약속을 이행하는 게 놀라운 모양이었다.

“아멜? 어디서 들어 본 이름같은데…….”

켁.

성을 말하지 않고 이름만 말했는데도 알 정도냐?

거의 뭐, 이 정도면 매일 연예계 뉴스에 오르는 탑급 연예인 수준인데?

어지간한 사람은 다 알아.

“소대장님, 아쉽게도 인사를 나눌 시간이 없습니다. 늦게 가면 중대장님이 화내실 겁니다.”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 같자, 카트린이 화제를 전환시키듯 나를 데리고 간이 목조 창고로 나를 데려갔다.

“루퍼스! 정비 다 끝났지?”

열려 있는 어두컴컴한 창고의 안을 향해서 소리치는 카트린.

“예! 다 끝냈습니다! 출격 준비 완료입니다!”

그러자 창고 안에서 들려오는 한 병사의 목소리.

카트린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대체 이 안에 들어 있는 기간트라는 게 정말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을까 하는 마음으로 카트린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흠……!”

창고 내에 있는 기간트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감탄 어린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4층 높이의 건물 천장에 닿을 정도로 큰 높이.

얼굴 크기와 거의 일대일 비율의 기다란 길이를 자랑하는 금속제 뿔.

투구를 쓴 사람처럼 후두부를 감싸는 철갑과 노출된 철갑 앞 부분을 통해 드러나는 매서운 눈매.

심장부에 위치한 사자 갈기 모양의 코어 덮개.

쉽게 고장날 것 같은 관절부 및 프레임.

그런 관절부와 프레임을 보호하기 위해 그것들을 덮고 있는, 단단해 보이는 금속제 보호덮개들.

기간트의 정체는 내 예상대로 남자의 가슴을 뛰게 하는, 남자의 로망인 거대 로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