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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3





관광객과 주민이 한데 엉켜 병자의 혈관처럼 꽉 틀어막힌 골목이 기어이 사람을 밀어 냈다. 린치앤은 꼬인 실처럼 복잡하게 얽힌 인파를 유연하게 헤쳐 나가며 등 뒤를 주시했다. 조금 전부터 그의 뒤를 밟는 은밀한 그림자가 있었다. 그는 주변을 살피며 인적이 드문 거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해가 어둑어둑 저물자 꺼져 있던 간판에 불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낮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거리가 저 먼 곳부터 서서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치앤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소리 없이 발가락 끝으로 땅을 밀듯이 내딛는 그 특유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그림자도 치앤을 따라 속도를 줄였다. 치앤이 모퉁이를 돌자 비좁고 음침한 골목이 나타났다. 그는 주변을 재빨리 살피며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골목 안으로 민첩하게 들어갔다.

그림자는 골목 어귀에서 잠깐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어둠 속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벽에 등을 붙인 채 숨을 죽이고 있던 치앤이 그림자를 덮쳤다. 순식간에 그의 손아귀에 잡힌 그림자가 지저분한 웅덩이로 맥없이 나뒹굴었다.

치앤은 그림자가 몸을 추스르느라 비틀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접이식 칼을 들어 그에게로 힘껏 내리찍었다. 칼날은 아슬아슬하게 그림자의 뺨을 스쳤다. 울퉁불퉁한 땅바닥에 내리꽂힌 칼날에서 불꽃이 튀는가 싶더니 칼끝이 무참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창백하게 질린 그림자의 손이 다급하게 치앤의 손목을 거머쥐었다. 어찌나 힘을 세게 줬는지 치앤의 손목뼈를 당장에라도 부러뜨릴 기세였다. 그러나 그림자 위에 올라탄 치앤은 별다른 동요 없이 상대방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남자의 얼굴이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린치앤, 너 날 죽일 뻔했잖아!”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골목에 쩌렁쩌렁 울렸다. 치앤은 가뿐하게 몸을 털고 일어나 욱신거리는 손목을 문질렀다. 쓰러진 남자는 따끔거리는 뺨을 문지르며 분에 겨운 듯 씩씩거렸다. 리윤이었다.

리윤은 치앤보다 키는 조금 작았으나 바위처럼 단단한 체격의 소유자다. 각이 진 이마로 쭉 뻗은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하고 선이 굵은 얼굴은 항상 화가 난 것처럼 보였고, 굳게 다문 완고한 입매는 그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적잖은 위압감을 주었다. 특히 상대방의 기를 꺾어 놓는 것은 그의 두 눈이었다.

치앤은 리윤의 부릅뜬 눈을 볼 때마다, 광목천왕*25의 위엄이 절로 떠올랐다. 리윤에게서는 언제나 절에서 태우는 묵직하고 그윽한 향냄새가 났는데, 그 향이 더더욱 그를 위엄 있는 천왕처럼 보이게 했다.

“넌 줄 몰랐어.”

“거짓말하지 마라.”

“정말.”

리윤이 건조하게 대꾸하는 치앤을 홉뜬 눈으로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목이 타는지 마른침을 삼키더니 주먹을 말고 제 어깨를 힘껏 두드렸다. 치앤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여긴 왜 왔어?”

“걱정돼서.”

리윤이 애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치앤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역시나. 리윤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치앤의 아무런 감흥 없는 얼굴은 마치 텅 빈 소라와 같아서, 망망대해가 오랫동안 불러온 서글픈 노랫소리만을 들려주었다.

“왜?”

흥분의 여운이 남은 공기 속에 치앤의 서늘한 물음이 작은 균열을 일으켰다. 리윤은 맥이 탁 풀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진 소릴 냈다. 그리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왜라니. 너무 차갑게 구는데. 내가 왜 널 걱정하지 않겠어?”

“그러니까 왜.”

“우리 사이는 각별하잖아.”

“…….”

“우리 사이는 말이야.”

리윤이 재차 강조했다. 그의 맹목적인 애증은 과연 어디서 비롯된 걸까. 치앤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래, 그런 거겠지. 난 아무래도 좋아.”

“린치앤.”

“응.”

“네가 여자였다면 지금쯤 우리 애가 벌써 걸음마를 떼고 뛰어다녔을 거야. 당연히 널 신경 쓸 수밖에 없지.”

“헛소리.”

“나야 무슨 힘이 있겠어. 네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께서 결정하신 일인데.”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치앤에게 리윤은 코웃음을 치며 숨이 막힐 듯한 낮은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치앤은 다시 손목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리윤이 왜 자신을 미행했을까. 혹시 양천의 지시에 의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무섭고 끔찍한 이 휴가가 곧 끝이 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삐죽 솟는다. 그러다가 조금 전 난동에 바닥으로 떨어진 양메이가 눈에 들어왔다.

‘천사…….’

쓸쓸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던 레이옌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는 듯 웃는 듯 오묘했던 그 미소도. 낮고 부드럽게 울리던 목소리도. 그러자 치앤은 갑자기 휴가가 좋아졌고, 우쭐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리윤이 이대로 조용히 돌아갔으면 했고, 양천이 당분간 저를 계속 본체만체하며 내버려 두었으면 하는 바람마저 들었다.

양메이, 자두나무, 천사,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치앤의 가슴속에 비밀스러운 약속을 속삭인다. 어제와는 다른 오늘, 오늘과는 다른 내일……. 그의 견고한 수조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한다.

치앤의 얼굴에 보기 드문 생기가 스치자, 리윤은 아니꼬운 마음에 그를 좀 더 괴롭힐 수단을 모색했다. 궁지에 몰린 그의 초라한 모략은 두 사람의 기이한 관계가 출발했던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쉬라이가 치앤을 가졌을 때, 리양천은 곧 태어날 아이가 딸이라면 막 젖을 뗀 제 아들을 짝지어 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쉬라이는 그 말을 농담이라 생각하고,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응했다. 리양천은 대단히 기뻐했다. 쉬라이가 그렇게 여기도록 일부러 시시껄렁한 말투로 꺼낸 진심이었던 것이다.

리양천은 자식들을 통해 대리 만족을 꾀하고자 했다. 그러나 남자의 은밀하게 부푼 욕망은 불행하게도 태어난 아이가 사내아이여서 와해하였다. 그러자 양천은 구차하게 아이의 대부를 자처하며 쉬라이와 자신의 관계를 더 공고하게 하려고 했다.

쉬라이는 사그라질 줄 모르는 남자의 욕망에 환멸을 느끼는 한편으로, 십수 년을 저만 바라본 남자의 일그러진 순정에 마음이 약해져 그의 교활한 악행을 눈감아 주기로 했다. 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쉬라이가 망양원을 뛰쳐나와 린바이화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을 무렵에 리양천은 위로는 간부들의 신임을 얻고, 아래로는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며 입신양명(立身揚名)을 꾀하고 있었다. 망양원 내에서 리양천의 입지는 날이 갈수록 단단해졌고 그의 권력 또한 커지고 있었다. 만약에 자신을 향한 그의 집념이 잘못된 방향으로 구현된다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제 새로운 삶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리윤은 리양천과 쉬라이 사이에 오갔던 은밀한 약속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가 열두 살이었을 때의 일이다.

겨우내 살벌했던 추위가 자취를 감추고, 따스한 봄기운이 완연한 날이었다. 당시 리윤이 다니던 학교는 당원의 자녀를 비롯한 부자들의 자녀가 다녔는데, 그중에서도 리윤은 단연 돋보였다. 그래서 리윤을 쫓아다니며 콩고물을 주워 먹으려고 구는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 리윤은 그 게걸스러운 행색이 싫었지만, 어머니의 조언으로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적당히 어울렸다.

그날도 오후 늦게까지 또래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벌컥 열자마자 유리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리윤은 눈치를 보며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집으로 기어서 들어갔다. 소리의 출처는 식당이었다. 날카롭게 찢어지는 목소리와 호통치는 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리윤은 가슴을 졸이며 식당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가정에 애착을 보이지 않는 양천에게 분개한 장리앙이 드물게 악다구니를 쓰며 들고일어난 듯했다. 그녀는 화목한 부부 사이는 기대조차 하지 않으니 자식만은 제대로 돌보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양천은 무어라 항변했다. 부부는 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을 이어 갔다.

급기야 장리앙이 눈물을 터뜨리자 양천은 그녀를 진정시키고자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다. 그러다가 리윤과 린치앤 사이의 혼담을 꺼내고 말았다. 그러면서 망양원 요원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거듭 피력했으며, 그러므로 망양끼리 의지하고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 주는 일이 허다하다고 말했다. 또한, 쉬라이의 죽음을 막지 못한 건 자신의 책임이므로 그녀의 하나뿐인 아들인 치앤을 더더욱 보살펴 주어야 한다고 아내를 설득했다.

그는 정말이지 너무 많은 말을 했다. 리양천의 의도대로 장리앙의 분노는 식었다. 그녀는 대번에 눈물을 그쳤다. 그리고 난도질당한 여자의 가슴엔 경멸이란 이름의 새살이 돋았다.

부부의 싸움이 진정되자 리윤은 발소리를 죽이고 도망치듯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복도 끝에 서 있는 잠옷 차림의 치앤과 마주쳤다.



‘린치앤, 너…….’

‘응…….’



이제 막 낮잠에서 깬 모양인지 치앤은 가물가물 졸음이 담뿍 쏟아진 눈을 하고서 어색하게 리윤에게 인사를 걸었다. 리윤은 그를 사납게 뿌리치고 얼른 방으로 숨었다. 그리고 이불을 푹 덮어쓰고 오들오들 떨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리윤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치앤을 못마땅한 눈으로 보며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죽은 듯이 눈치를 보며 기생하는, 가증스럽게도 순진한 이물질이 자신과 부부가 될 뻔했다는 사실을 안 뒤로 마냥 미워하는 것이 꺼림칙해졌다.

그날부터 리윤은 점차 치앤의 색다른 면모를 훔쳐보게 되었다. 기다랗고 밋밋한 팔다리, 아랫배가 납작한 가느다란 허리, 늘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단정한 얼굴, 예컨대 사타구니를 뜨겁게 만드는 것들을.

‘이건 나만 손해 볼 일이군.’

리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과거를 떠올리는 것을 멈췄다. 그러나 한번 의식하기 시작한 비밀스러운 열정은 그의 감정을 간질간질하게 부추겼다.

보이는 것만 두고 얘기하자면, 린치앤의 단정한 용모는 리윤을 매료시켰다. 치앤은 단숨에 눈길을 사로잡기보다는 서서히 스며드는 사람이었다. 예컨대 어느 쓸쓸한 저녁, 불쑥 떠올라 가슴이 저릿해지는 그런 사람. 특히 리윤은 쉬라이를 빼닮아 꼭 수심에 잠긴 듯한 치앤의 슬픈 눈매와 오묘하고 유약한 분위기에 마음이 이끌리는 것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가 실제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줄 빤히 알면서도 그랬다.

린치앤은 리윤의 가슴속에서 점점 이상화되었다. 그보다 더 완벽한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보다 더 환상적인 사람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리윤은 자신의 미움과 아집의 상상이 만들어 낸, 존재하지 않는, 존재할 수도 없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그래. 아이는 씩씩하게 자라고, 난 매일 너한테 매를 맞고 있겠지.”

리윤이 홀린 눈으로 저를 응시하자 치앤은 침묵을 깨고 입술 밖으로 목소릴 흘려보냈다. 냉정하게 현실을 읽어 내는 말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리멸렬한 다툼에 번번이 패하는 쪽은 리윤이었다. 그가 아무리 악다구니를 쓰며 흠집을 내려 해도, 치앤은 끄떡하지 않았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리윤은 치앤의 그런 태도에 사족을 못 썼다. 언제나 안달이 난 쪽은 리윤이었다.







25) 廣目天王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사대천왕(四大天王) 중 하나로 서방의 수호신이다. 광목천왕은 불교에서 말하길, 세계의 중심에 솟아 있다는 수미산(須彌山) 중턱의 서방을 지키며 불법을 보호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