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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두 사람은 다시 침묵 속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노란빛 점이 떨어진 자리가 한산하고, 붉게 익은 열매는 옹송그린 채 평화로운 침묵을 이어 간다.

레이옌은 뻣뻣한 어깨를 반듯하게 펴고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 얘기가 나와서일까. 그동안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아버지의 쩌렁쩌렁한 불호령과 노여움으로 뒤틀린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방인의 등장으로 모처럼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고 울적해진다. 억지로라도 웃어 보이려고 했으나 도무지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이름이 할퀸 자리가 쓰라려서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냈다. 영업 중엔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철칙이었으나, 마음이 이렇게 무너졌는데 그따위 것쯤은 무시해도 좋았다. 레이옌이 담뱃갑을 손바닥에 탁탁 두드리며 치앤에게 넌지시 물었다.

“한 대 피울래요?”

치앤이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옌은 입에 담배를 물고, 그에게 깨끗하게 말린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 치앤이 담배를 입술에 물자 레이옌의 커다란 손이 두 사람의 입가를 가렸다. 담뱃불이 붙으면서 피어오르는 아릿한 연기를 핑계 삼아 레이옌은 조금 훌쩍거리다가, 치앤의 시선을 의식하고 머쓱해져서 얼른 눈물을 훔쳤다.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지도 않고 물었다.

“담배는 용케 피우네요?”

“배웠어요.”

치앤이 느리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누구한테요?”

“아저씨.”

“그것참 이상하네.”

어린애 같은 치앤의 말투에 레이옌이 혀를 찼다.

“그런가요.”

“말버릇이 뭐 이따위야? 심심하게.”

레이옌이 무심코 버릇대로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자 치앤은 풀이 죽어 눈을 내리깔았다. 아차 싶어 레이옌은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인상 좀…… 펴고.”

치앤이 반사적으로 웃었다.

“여기 앉아요.”

레이옌이 조금 전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를 가리켰다. 치앤은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레이옌의 미간에 도로 주름이 잡히자 얼른 의자에 앉았다. 레이옌의 체온이 느껴졌다. 그러니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치앤은 담배를 빨리 피웠고, 레이옌은 느리게 피웠다. 곧 치앤의 손가락에 걸려 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치앤은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를 발로 밟아 끄고 꽁초를 재떨이에 버렸다.

담배 한 대가 숨을 다하는 짧은 시간 내내 레이옌은 치앤을 지켜보았다. 치앤의 얼굴엔 내도록 무의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문득 시선을 느낀 양 치앤이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레이옌은 채찍에 얻어맞은 것처럼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치앤의 얼굴은 서글퍼진다.

“얼굴에 상처 말이에요.”

레이옌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치앤은 눈꺼풀에 난 흉터를 매만지며 “괜찮아요.” 하고 말했다. 레이옌은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에 황리가 주고 간 비닐봉지를 뒤적였다. 소금물에 담가 깨끗하게 씻은 싱싱한 양메이가 퍼뜨리는 상큼한 향기에 두 사람은 몸이 짜르르 울렸다.

“우리 양메이나 먹죠.”

“와.”

그가 봉지를 내밀자 치앤은 검붉은 양메이 한 알을 꺼내며 의미 없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을 흘기며 레이옌이 물었다.

“먹기 싫은데 억지로 좋아하는 척하는 거 아니죠?”

“아니에요.”

치앤이 대번에 반색했다. 그러자 레이옌은 샌들 끝으로 바닥을 툭툭 치면서 다시 물었다.

“정말이에요?”

“실은…… 양메이를 먹어 본 적이 없어요.”

치앤은 쑥스럽게 웃었다.

“그럼 이번 기회에 먹어 보면 되겠네요.”

레이옌의 말에 치앤이 고개를 끄덕이고 양메이를 입술로 가져갔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양메이가 으깨어지고 흘러나온 과즙이 마른 입술과 혓바닥을 적셨다. 처음 맛보는 달콤함에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 싱그러움은 제 옆에 있는 남자와 닮았다. 싱그러움이 서서히 감미로움으로 바뀌었다. 치앤은 천천히, 그리고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쓰며 새로운 감정을 음미했다.

“맛있어요?”

레이옌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처럼 희미하게 들렸다. 꿈결 같은 달콤함에 젖어 있던 치앤은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네.”

“맛이 없을 리가. 지금은 양메이 철이지. 이때가 아니면 맛볼 수도 없어.”

그 말은 치앤에게 지금이 아니면 사랑할 수도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있잖아요.”

레이옌이 들고 있는 비닐봉지로 손을 집어넣으며, 치앤이 입을 열었다.

“예.”

“당신은 꼭 천사 같아요.”

양메이를 우물거리던 레이옌은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놀란 눈으로 치앤을 쳐다보았다. 당황한 그가 허둥지둥 입에 든 과일을 삼키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갈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아, 씨, 깜짝이야. 잠깐만.”

“네.”

“……내 어디가?”

“얼굴이.”

천진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치앤에게 레이옌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그의 미소가 무의미하지 않다는 확신이 들어 또다시 눈이 시큰거릴 뿐이다. 더는 핑계 댈 것이 없어 레이옌은 바닥만 거칠게 차며 딴청을 피웠다. 문득 잊고 살던 삶에 대한 끝없는 애착이 되살아난다.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천레이옌을 처음 본 순간부터 생각했던 말을 꺼내 놓으니 치앤은 마음이 후련했다. 그래서인지 내내 열이 잔뜩 올라 붉었던 얼굴이 본래의 밋밋한 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이제는 반대로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말에 놀란 레이옌의 얼굴이 붉어졌다.

낯빛을 맞바꾼 채로 두 사람은 앉은 자리에서 양메이를 절반이나 먹어 치웠다. 거의 치앤의 몫이었다. 레이옌은 고작 두 알만 맛보고, 이후로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치앤이 먹는 걸 지켜보느라 바빴다.

레이옌이 살아오며 읽었던 그 어떤 책도 지금 같은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가 아는 어떤 사람도 이럴 때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속 시원하게 말해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레이옌은 순전히 마음 가는 대로, 드물게 진솔하고 담백한 태도로 치앤을 대하리라 마음먹었다.

“진짜 맛있나 보네요. 계속 먹네.”

“네, 맛있어요.”

치앤은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는 시종 순종적이고 유순하다. 행동을 유도하면 즉각 나타나는 기계적인 반응은 융통성조차 없었다. 레이옌은 그 모습에 애틋함이 일었다.

“당신, 좀 힘들겠다.”

“뭐가요?”

“사는 게.”

치앤은 레이옌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곤경에 처할 때면 늘 그랬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올렸다. 레이옌은 그 미소에 먹먹한 동정이 일었고, 가련하단 생각마저 들었다. 차마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막막했다. 그렇다고 덩달아 웃을 수도 없었다.

레이옌은 난처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을 보고 치앤은 호기심이 생겨났다. 그를 좀 더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예전에 리윤과 함께 보았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레이옌에게 스스럼없이 물었다.

“퇴근하고 뭐 해요?”

“특별히 할 일은 없는데.”

“그럼 같이 아침 식사해요.”

“저녁 식사가 아니라요?”

“네.”*24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 의미 모를 묘한 미소를 짓는 치앤을 두고 레이옌은 망설였다. ‘데이트 신청인가? 남자가? 나한테?’ 그는 린치앤의 의도를 나름대로 재어 보았으나 또렷하게 떠오르는 이유가 좀처럼 없었다.

“……아침엔 바쁜데.”

겨우 한다는 말이 에두른 거절이었는데, 그러자 치앤의 얼굴에서 의식적인 미소가 사라지고 풀이 죽은 아이처럼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순간 레이옌은 치앤을 붙잡아야 한다는 강력한 확신이 섰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를 이대로 보낸다면, 분명 후회할 터였다.

“가게는 아침 여덟 시에 여는데, 일곱 시면 있거든.”

“네.”

“그때 와요. 변변찮아도 대접하지.”

“그럴게요.”



***



카운터에 문지기처럼 서 있던 샤오핑이 레이옌이 돌아오자마자 그를 껴안을 기세로 한걸음에 쪼르르 달려왔다.

“너 왜 아직도 있어?”

레이옌은 몸을 뒤로 슬쩍 젖혀 피한 다음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샤오핑은 레이옌이 아는 사람 중 가장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약속 시각에 단 1분도 늦은 적이 없으며, 단 1분도 일찍 온 적이 없다.

“궁금해서요. 그 사람 갔어요?”

샤오핑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물었다.

“응.”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옌은 끈적끈적한 손을 씻으려고 싱크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단숨에 수도꼭지를 비틀고 콸콸 쏟아지는 차가운 물줄기에 손을 넣었다.

“이상한 사람은…… 아니죠?”

어느새 졸졸 뒤따라온 샤오핑이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이어 질문을 던졌다.

“아니야. 이상해도 너만큼은 아니야. 그리고.”

“그리고?”

“데이트 신청 받았어.”

레이옌은 수도꼭지를 잠그며 농담조로 태연하게 말했다. 샤오핑의 턱이 호두까기 인형처럼 쩍 벌어졌다.

“꽃이라도 사야 하나?”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 내며 레이옌이 중얼거렸다. 자기 자신에게 묻는 것인지, 샤오핑에게 묻는 것인지 모호한 말투였다.

“아니요. 사장님은 될 수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말도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해요. 입 열고 떠들기 시작하면 걸어 다니는 재앙이니까.”

간신히 빠진 턱을 도로 끼운 샤오핑이 싸늘하게 정색했다.

“말이 좀 심한데.”

기분이 나빠진 레이옌이 팔짱을 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잠시 마주 노려보더니 샤오핑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아니었다니. 나한테 관심 있는 게 아니었어.”

“응, 너 말고 나.”

나름대로 자신의 인기를 자부했던 샤오핑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확실히 여느 사람과는 좀 다른 손님이긴 했지만, 키가 늘씬해서 옷 태가 좋고 묘하게 위험해 보이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다. 만약에 자기한테 데이트 신청을 했다면 수락할 의사가 있었다. 레이옌은 일부러 능청스레 웃었다. 간만에 자존심이 땅에 떨어진 샤오핑의 꼬락서니가 퍽 재밌었다.

“제가 조금 전에 사장님은 되도록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약이 잔뜩 오른 샤오핑이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그랬었나.”

“진짜 재수 없어. 껍데기가 아깝다.”

레이옌이 심드렁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하자 약이 잔뜩 오른 샤오핑은 무어라 씨근덕거리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사람 신경을 갉작거리는 것에 도통한 레이옌과 싸워 봤자 자신만 손해다. 그녀는 화를 잠재우려고 연신 씩씩거리며 “덥네, 더워. 에어컨을 틀어도 덥네.” 하고 날씨 핑계를 대며 손으로 부채질을 해 댔다. 그러다 보니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 핑계 삼아 부산스럽게 레이옌의 어깨를 때렸다.

“참! 그 손님 계산 안 했는데.”

레이옌은 싸늘한 얼굴로 말없이 제 어깨를 툭툭 털어 내며 샤오핑을 노려보았다. 샤오핑은 슬금슬금 눈을 옆으로 돌렸다. 그의 시선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샤오핑은 슬쩍 등을 돌리며 패배를 인정했다. 레이옌은 한숨을 푹 쉬며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긁었다.

“자, 됐지.”

그러면서 성가시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샤오핑이 눈을 데구루루 굴리고는 “그래요, 뭐. 가게 주인은 사장님이니까.” 하고 빈정거렸다. 그때, 제빙기에서 얼음을 꺼내 컵에 담던 신웨이가 끼어들었다.

“샤오핑, 그만 가. 네가 있으니까 정신이 산만해.”

“네가 보채지 않아도 갈 생각이었어.”

자신을 짐짝 취급하는 말투에 기분이 나빠진 샤오핑은 앞치마를 거칠게 벗어 던졌다. 그리고 레이옌에게 말을 돌렸다.

“사장님, 진짜 데이트할 거예요?”

“응.”

레이옌은 쓸데없는 질문을 받은 것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제빙기가 얼음을 캑캑 뱉어 내는 소리가 부산스럽게 들렸다. 그렇게 한 개, 두 개, 세 개…… 여섯 개째 얼음을 토해 내는 순간, 신웨이가 엄숙하고 진지한 태도로 레이옌에게 말했다.

“사장님, 안 됩니다.”

“얘는 또 왜 이러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레이옌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 남자랑 가까워지면 틀림없이 불행해질 거예요. 저한텐 다 보입니다. 저는 알 수 있어요.”

신웨이는 계시라도 받은 광신자처럼 진지한 모습이었다.

“어, 그래. 알았다.”

천레이옌은 귓등으로도 담아 듣지 않았다.

“그 사람이 불행해지면 몰라, 사장님이 불행해지진 않을 것 같은데.”

샤오핑이 끼어들었다. 그러자 신웨이가 “넌 이만 가.” 하고 말하며 소금 뿌리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며 한바탕 싸우기 시작했다. 성격이 물과 기름처럼 달라 걸핏하면 치고받는 두 사람이니, 레이옌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그는 카운터 밖으로 빠져나와 치앤이 앉아 있던 구석 자리를 응시하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그러고 보니…… 꼭두서니꽃이 필 때네.”

7월이면 덩굴진 줄기에서 자란 길쭉한 꽃대에서 연한 백록색 꼭두서니꽃이 핀다. 다섯 장의 작은 꽃잎은 요요(寥寥)하게 몸을 웅크리고 앉아 무심코 저를 지나치는 사람들을 유유히 지켜본다. 그 뿌리를 캐어 천에 물을 들이면 한창 무르익은 양메이처럼 붉은색이 된다. 그로부터 천레이옌은 린치앤의 촌스러운 붉은 뺨과 싱그러움을 상기했다. 사무치도록 눈이 부신 여름이다.







24) 장 르노(Jean Reno) 감독의 영화 「니키타(La Femme Nikita)」의 한 장면 오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