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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학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레이옌은 가장 먼저 동생의 안부를 물었다. 학기 중엔 엄한 아버지 때문에 눈치를 보느라 여동생에게 사사로이 전화를 거는 것도 어려웠으니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할 수밖에. 하지만 신위는 대답하지 못하고 울먹이기만 했다. 레이옌이 몇 번이고 다그치자 그제야 덜덜 떨며 자초지종을 말해 주었다.

동생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레이옌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일주일을 꼬박 앓았다. 밤잠을 줄여 가며 전공 서적을 달달 외고, 그토록 견디기 힘든 아픈 사람들과 역겨운 핏덩이를 아무리 참아 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레이나는 죽었다. 이 세상에 없다. 다시는 웃지 못한다. 그토록 좋아하던 달콤한 디저트도 먹지 못한다.

다음 학기, 천레이옌은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학업을 그만둘 것이라고 선언했다. 당연히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노발대발한 천준지에는 언성을 높이며 설교하다가 분을 못 이겨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재떨이에 이마를 맞은 레이옌은 자신이 그토록 무서워하던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피가 두렵지 않았고, 아버지가 두렵지 않았다. 죽은 이후에는 결국 무엇도 없다는 허무함과 동생의 죽음을 숨긴 아버지를 향한 분노가 그의 오랜 두려움을 넘어섰던 것이다.

레이옌은 지독한 슬픔으로 감정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였다. 그런 아들의 심상치 않은 변화에 신위는 딸을 잃은 것도 모자라 아들까지 잃을까 봐, 남편 몰래 돈을 마련하여 레이옌을 상하이로 보냈다. 베이징에서 계속 지낸다면 제 아들은 남편에게 맞아 죽거나 스스로 목을 매달거나, 불운한 사고를 가장하여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신위는 가슴이 찢어져도 아들을 내보내야만 했다.

평생 전업주부로 살아온 양신위 혼자서 해내기엔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의 수중에 있는 돈이라고 해 봤자 남편이 매달 주는 생활비에서 조금씩 저금한 돈이 다였다. 그래서 신위는 남편의 동생인 천하오(陈豪)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일찌감치 가업을 박차고 뛰쳐나온 덕분에 집안의 망나니 취급을 받던 천하오는 레이옌이 상하이에 정착하는 걸 기꺼이 도왔다. 천하오 역시 레이나의 죽음을 뒤늦게 알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에 자긍심을 느낀다면서 정작 제 가족들은 말려 죽이려 들었던 비정한 부친과 형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업으로 제법 많은 돈을 모은 숙부의 도움 덕분에 레이옌은 그리 어렵지 않게 상하이에 녹아들었다. 상하이에서의 삶은 여러모로 베이징보다 나았다. 지금껏 몰랐던 평온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레이옌은 이따금 자신이 너무 편하게 사는 건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죄책감은 그의 가슴을 콱 움켜쥐고 손톱을 박아 상처를 냈다.

도망치듯 상하이로 온 레이옌은 동생이 좋아하던 디저트를 만들어 팔겠노라 결심했다. 낮이면 디저트를 팔고, 밤이면 동생이 살아 있는 동화 속 세상을 그렸다. 과거 팅즈지엔 문인*19처럼.

레이옌이 만들어 낸 세상 속에서 레이나는 건강했고, 좋아하는 디저트에 둘러싸여 행복하게 살았다. 거기엔 치명적인 병도 없고, 죽음도 없었다.

상하이에서 레이옌의 삶은 육체적으로는 평탄했으나 정신적으로는 혹독한 속죄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동생의 손을 잡고 웃으면서 작별 인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동생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죽은 이후의 세상을 약속했을 것이다. 아니, 진작 동생과 도망쳐 싯누런 먼지로 뒤덮인 지긋지긋한 베이징의 흐린 하늘과 작별했을 것이다.

레이옌은 아버지의 냉대와 무관심이 동생을 죽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방관이 동생의 죽음을 재촉했노라고 확신했다.

하나의 죽음은 한 사람의 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타인의 심기를 유독 신경 쓰며 신중하고 예민한 성격이었던 레이옌은 동생이 죽은 후로 주변에 무관심해졌으며 만사에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또, 다른 사람의 이목을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고, 겉으로는 태연자약한 한편으로 속에 든 불덩이를 꺼내는 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었다. 그는 누구도 믿지 않았고 누구와도 가까워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에겐 세상 모든 사람이 내일 죽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



벽에 걸린 시계의 시곗바늘이 정확히 오후 3시를 가리켰을 무렵이었다. 아상블라주의 아르바이트생, 빨간 머리의 우샤오핑(吴小萍)은 부조처럼 벽에 붙어 꿈쩍도 하지 않는 치앤을 힐끔 쳐다보며 레이옌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 벌써 한 시간째예요.”

“돈이 없어 보이진 않는데.”

레이옌은 고개를 기울이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남자가 신고 있는 신발이며, 입고 있는 옷이며 대충 보아도 싸구려는 아니었다. 게다가 손목에 찬 오토매틱 시계는 한눈에 봐도 비싸 보였다. 그러니 무작정 먹을 것을 달라며 소동을 일으킬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샤오핑의 시선을 따라 치앤을 훑어보며 레이옌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남자의 얼굴이 묘하게 낯이 익었다. 그리운 느낌마저 들었다. 레이옌이 우수에 젖어 있는 것이 못마땅한지 샤오핑이 채근했다.

“무서워서 죽겠어요. 얼굴에 흉터도…….”

“네가 더 무섭다. 호들갑 좀 떨지 마.”

샤오핑을 나무라며 레이옌은 뻐근한 목덜미를 주먹으로 힘껏 두드렸다.

“사장님이 가서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 봐요.”

“성가신 일은 죄다 내 몫이지.”

한숨을 쉬며 레이옌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불쾌함에 씰룩이는 그의 입술을 두고 샤오핑은 비아냥거렸다.

“원래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책임이 따르는 법이에요.”

뼈가 실린 말이었다.

“알았다. 알았다고.”

볼멘 목소리로 대꾸하더니 레이옌은 깍지를 낀 양팔을 앞으로 쭉 뻗고, 굳은 얼굴을 억지로 폈다. 그는 모처럼 우울함에 잠긴 자신을 훼방 놓는 수수께끼의 남자가 못마땅했다. 그러나 그는 밥벌이의 고단함을 잘 안다. 예기치 않은 일에 기꺼이 마음을 팔며 웃을 줄도 안다. 덜떨어진 주정뱅이며 걸핏하면 으름장을 놓는 건달은 제 아버지에 비하면 아무렇지도 않다. 누구라도 자신의 아버지를 겪으면, 크고 작은 소동에 무덤덤해질 것이다.

카운터를 빠져나온 레이옌은 시원스러운 걸음으로 순식간에 치앤에게 다가갔다. 벽과 하나가 된 양 정지해 있던 치앤은 갑자기 앞에 나타난 레이옌 때문에 깜짝 놀라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생생한지, 여느 사람이라면 똑같이 놀랄 법도 했다.

그러나 레이옌은 그리 녹록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사람이 시들해지는 모든 과정을 뼈저리게 겪었고, 지금 이 순간 자신만의 안전한 감옥에 갇혀 우울하길 원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처럼 안락한 제 머릿속을 침범하는 이물질을 조금이라도 빨리 걷어 내고 다시 거기에 잠겨 숨을 멈추고자 했다.

“저기, 혹시 지갑을 두고 오셨나요? 그런 거면 크게 연연하지 않아도―”

꾸며 낸 부드러운 말씨로 레이옌이 말을 걸자 치앤은 급히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보여 줬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봤을 고급 브랜드의 가죽 지갑이었다.

“아.”

레이옌은 잠깐이라도 남자를 오해한 것이 머쓱해서 목덜미를 긁적이며 탄성을 내뱉었고, 이어서 “죄송합니다.” 하고 짤막하게 사과했다. 치앤은 그가 왜 자신에게 사과하는지 연유를 몰라 빤히 응시하며 지갑을 열었다.

“더 필요한가요?”

“아니, 그 정도면 넘치는데요. 뭐든 골라 봐요.”

레이옌이 어깨를 으쓱하며 쾌활하게 웃었다. 그 얼굴이 꼭 천사 같다고 생각하며 치앤은 고개를 푹 숙였다. 가까이서 본 남자는 롱탕 문 앞에서 봤을 때보다 더 예뻤다.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였다. 치앤은 자신이 이러는 사이 레이옌이 도로 가 버릴까 봐 조바심이 나서 얼른 우물쭈물 말문을 열었다.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키가 저보다 큰 남자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모양새가 꼭 어린애가 칭얼거리는 것 같아서 레이옌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었다. 오래간만에 느낀 천진함이 그리 나쁘진 않으니, 모처럼 진심으로 친절하게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선선히 입을 열었다.

“그럼 블루베리 타르트는 어떤가요? 마침 블루베리가 신선하거든요.”

쇼케이스를 손으로 가리키는 레이옌의 모습도 천사처럼 보였다. 치앤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레이옌이 빙그레 웃었다. 치앤은 허둥지둥 지갑에 든 지폐를 잔뜩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스운지 레이옌은 그만 폐가 팽팽하게 부풀고 말았다.

“이만큼은 필요 없고. 넘쳐요. 그리고 계산은 나중에 하면 돼요. 마실 건?”

레이옌이 손을 내저으며 친절하게 묻자 치앤은 눈을 재차 깜빡이며 대답했다.

“따뜻한 차…….”

“자리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곧장 레이옌이 빈자릴 가리켰다. 작은 빔 프로젝터가 흑백 사진에 총천연색 틴트를 입힌 듯한 사진들을 내내 쏘아 보내는 벽을 마주 보고 있는 테이블이었다. 치앤은 고개를 들고 유순하게 웃었다. 그는 레이옌의 권유를 명령처럼 받았고, 즉각 따랐다. 그리고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자리에 앉아 시시각각 변하는 사진을 골똘히 쳐다보며 빠져들었다.

“어때요?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레이옌이 카운터로 돌아오자마자 샤오핑이 야단이었다.

“이상한 사람은 너고.”

레이옌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매몰차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주문받아. 가향차 있지, 네가 비취 산이라 부르는 거. 그리고 블루베리 크림치즈 타르트. 차는 따뜻하게.” 하고 말하며 슬쩍 자리에 앉은 치앤에게 시선을 돌렸다.

처음 만난 묘한 남자의 첫인상은 싱그러웠다. 이른 여름의 싱그러운 연둣빛 잎사귀처럼 말이다. 레이옌이 이처럼 생각하는 것을 알 리 없는 치앤은 목이 빠져라 벽만 쳐다보았다. 그의 기다란 목을 스친 커다란 흉터가 레이옌의 눈에 아프게 박혔다.

‘죽을 뻔했었네, 저 사람.’

경동맥을 아슬아슬하게 비켜 나간 상처에 레이옌은 혀를 내둘렀다. 아픈 사람은 싫다. 다만……. 레이옌은 도로 울적한 마음이 드는 터라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잠시 후, 샤오핑이 진하게 우린 차와 타르트를 쟁반 위에 담았다. 카운터 밖으로 나서는 그녀를 가로막으며 레이옌이 손을 까딱였다.

“이리 줘.”

“네?”

샤오핑은 찬물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반문했다. 사람과 얽히는 일이라면 누구보다 질색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는 천레이옌이었다. 그가 사람을 밀어 내는 것은 마치 철옹성 같아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그가 두른 무장을 뚫지 못하고 항복을 선언하곤 했다.

세상에 그를 무장 해제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샤오핑은 이대로라면 혼자 늙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레이옌이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레이옌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일하는 가게 사장이지, 각별한 사이라고 말할 수 없는 터라 괜한 오지랖이었다. 또, 자신이 저 무뚝뚝한 남자를 데려갈 마음은 조금도 없으니 이처럼 걱정하는 것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내가 갈 거야.”

샤오핑이 뜸을 들이자 답답한지 레이옌은 아예 쟁반을 가로챘다.

“사장님이 직접요?”

떨리는 목소리로 샤오핑이 물었다. 크고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지내다 보니, 어느새 1년을 이곳에서 일했다. 그동안 레이옌을 쭉 곁에서 지켜본 샤오핑은 처음 보는 그의 이런 모습이 낯선 나머지 두렵기까지 했다.

“그래.”







19) 亭子間文人 스쿠먼의 계단 사이에 있는 골방을 팅즈지엔(亭子間)이라고 한다. 근대 시기 상하이에 정착한 문학가들은 주로 이 팅즈지엔에서 거주하며 활동하였다. 따라서 팅즈지엔 문인은 당시 상하이 문학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