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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린치앤은 엄지를 꾹 눌러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은 응답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치앤은 일주일 전, 마지막으로 리양천의 얼굴을 보았던 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조금 더 매달릴걸.’ 하고 후회가 든다.

신호음이 다섯 차례 이어졌으나 양천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저씨, 연락 좀 받아요.”

대답 없는 그에게 치앤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애원했다.

“제발.”

양천은 침묵한다.

“저 죽을지도 몰라요.”

기어이 통화음이 멎었다.

음성 메시지를 남기라는 녹음된 목소리가 치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 치앤은 양천이 없는 세상을 상상한 적 없고, 양천이 자신을 내치는 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그가 지독히도 무서워하는 천둥소리도 양천이 없는 세상처럼 막막하고 무섭진 않았다.

“정말…….”

그러나 메시지를 남길 용기는 없어 치앤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는 눈을 비비며 조금 훌쩍였다. 아주 조금. 양천이 우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양천은 치앤에게 지나가는 말투로 눈물은 곧 독이라고 곧잘 말했다.

리양천의 묵묵부답에 치앤의 상심이 큰가 하느냐면, 아니다. 그는 오히려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절로 가슴을 치게 하는 가련한 분위기나 단정한 눈매에 가득 고인 애처로움과 달리 치앤은 연약한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겉보기와 달리 슬프지도 않았고, 누구보다 생존하고자 하는 본능이 강했으며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기꺼이 본능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치앤은 눈물을 그치고 곧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넘어지지 않도록 신발 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밑창이 납작하고 끝이 뾰족하게 빠진 새하얀 컨버스는 작년 생일 양천이 선물로 준 것이었는데, 아낀답시고 지금껏 단 한 번도 신지 않다가 오늘에서야 처음 신어 보았다.

치앤은 종일 돌아다닐 작정이었다. 말랑한 고무가 닳고, 새하얀 천이 지저분해질 때까지.



***



수조를 깨고 나오자 눈앞에 광활한 바다가 펼쳐졌다. 침몰한 여객선처럼 우뚝 선 빌딩, 손톱만 한 치어 떼, 날카로운 이빨의 포식자……. 치앤은 온갖 살아 있는 것들의 향연에 순수하게 전율했다.

밖은 흐렸다. 예년보다 조금 선선했다. 방황하기에 아주 좋은 날씨다. 치앤은 홧김에 제 뒤꿈치가 새 신발로 혹사당해서 물집이 잡히길 기꺼이 바랐다. 한편으로 양천에게 전화가 올지도 모른단 기대에 부풀었다. 그는 지금 절벽에 매달려 있고, 그를 지탱해 주는 유일한 밧줄은 어찌나 힘껏 잡았는지 뜨끈뜨끈한 핸드폰이다.

치앤은 소리 없이 사뿐사뿐하게 길을 걸었다. 길눈이 밝고 공감각이 탁월한 그는 한 번 지나친 길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다. 일주일 만에 나온 바깥세상이었지만, 바로 어제 온 것처럼 익숙하다.

롱탕 안은 시끌벅적했고, 벗어나도 시끌벅적했다. 금요일 낮의 거리는 외국인과 주민이 뒤섞여 소란스러웠다. 북적거리는 인파를 비집고 나아가며 치앤은 덩리쥔*12의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네(月亮代表我的心)」를 흥얼거렸다. 그의 어머니 쉬라이가 집안일을 할 때마다 늘 불렀던 노래다.

쉬라이는 울며 보채는 치앤을 달래고 재울 때도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치앤은 노래의 제목도, 노래를 부른 가수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저 어머니의 자장가인 줄만 알았다.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인 티엔즈팡에서 치앤은 흥얼거림을 멈추고 오도카니 섰다. 아상블라주*13라는 이름의 구불구불 꼬아 만든 네온 간판 앞에서였다. 아상블라주가 있는 건물은 꼭대기부터 검은색 페인트를 부은 것처럼 새카맸다. 린치앤은 2층 규모의 디저트 가게의 커다란 유리창 너머, 카운터에 서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천사.’

치앤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 남자를 인식하고 나니 굶주림에 둔해져 있던 감각이 서서히 살아난다. 일주일 전 롱탕 문 앞에서 치앤과 우연히 스쳤던 남자다.

남자는 깨끗하게 다린 새하얀 셔츠의 손목을 걷어붙인 채, 몸에 딱 맞아떨어지는 검은 바지에 코르크로 바닥을 댄 샌들 차림이었다. 치앤은 서먹한 거리에서 유일하게 익숙한 남자를 향해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문에 매달린 종이 경쾌하게 방문자를 맞이했다. 그 소리에 3단 쇼케이스 안에 갓 구운 타르트를 정리하던 아르바이트생이 허리를 펴고 명랑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붉게 염색한 머리카락을 두 갈래로 땋아 어깨 위에 늘어뜨린 여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었다. 그녀는 160cm 정도의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는 매끄러웠고, 환히 웃을 때 드러나는 치아가 유독 하얬으며 아담한 몸집이 귀여운 인상이었다.

치앤은 스스럼없는 환대가 낯설어 쭈뼛거리며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어컨을 세게 틀어 놓은 가게 안에 달콤한 냄새가 진동했다.

가게의 고즈넉한 풍경은 치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천장을 노출하여 콘크리트 고유의 질감을 그대로 드러낸 거칠고 투박한 인테리어부터, 가게 안에 잔잔하게 흐르는 재즈 음악까지 전부 그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이곳에서 푸른 것이라곤 끝이 뾰족한 선인장밖에 없는 점도 신기했다. 구조는 말할 것도 없다. 건물 한복판에 마당을 트고 사면으로 둘러싼 모습이 흡사 쓰허위안*14을 방불케 했다.

뜰에도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담배를 피울 수 있게끔 재떨이가 마련되어 있었으나, 오후가 되면서 후텁지근해진 날씨 탓인지 사람은 없었다. 치앤은 잠깐 새로운 광경에 정신이 팔려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런 치앤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아르바이트생은 다시 쇼케이스 정리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치앤이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게 안은 손님이 제법 많았는데, 활기찬 아르바이트생을 기웃거리는 남자도 몇 명 있었다.

남자가 “오늘 마치고 뭐 해요?” 하고 과감하게 물어보면 아르바이트생은 “바빠요.” 하고 코웃음을 치며 매끄럽게 되받아쳤다. 이런 일에 퍽 익숙한 눈치였다. 치앤도 아르바이트생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정확히는 여자의 등 뒤로 팔짱을 낀 채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고 선 남자에게로. 그리고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사장님, 계속 그러고 계시면 방해되니까 어디 나갔다가 오세요.”

“…….”

“사장님.”

“…….”

“제 말 듣고 있어요?”

“…….”

“사장님.”

아르바이트생이 그에게 쌀쌀하게 내뱉었다. 남자는 미간을 더욱 찌푸리며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는 잔뜩 구겨진 얼굴로 여기서 한 발짝도 떼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휴.”

아르바이트생이 혀를 끌끌 차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일이 흔한 모양이었다.

아상블라주의 사장, 천레이옌(陈藟滟)의 기분은 요 며칠 동안 바닥을 쳤다. 그는 언제나 무뚝뚝했고, 퉁명스러웠고, 쌀쌀해서 그의 주변이 먹구름 낀 것처럼 우중충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으나 근래 더욱 심각했다.

레이옌은 빈틈없이 빚어낸 듯한 화려한 이목구비와 서구적이고 섬세한 골격이 주는 또렷하면서도 밝은 분위기와는 달리, 만사에 시큰둥했으며 제 외모를 크게 의식하지도 않았다. 워낙 듣는 얘기가 많다 보니 레이옌도 자신이 잘생겼으려니 생각하긴 했다. 그저 외모에 신경 쓰는 일이 없었을 뿐이다.

어디에서도 돋보이는 외모 덕분에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곧잘 꼬였으나, 그 가엾은 사람들은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옌의 유별나고 괴팍한 성미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오죽했으면 인근 상인들과 공방 주인들에게 걸어 다니는 재앙으로 불릴까.

그런 천레이옌이 심각한 까닭은 다름 아닌 어머니 때문이었다. 며칠째 틈만 나면 전화를 걸어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오지 않았는데 이번 중추절*15만큼은 꼭 집에 와야 하지 않겠느냐며 쉬지 않고 닦달하니 심란할 수밖에.

레이옌은 상하이 출신이 아닌 베이징(北京) 출신으로, 8년 전 이곳으로 왔다. 지금이야 설탕에 졸인 과일의 상큼한 냄새, 밀가루의 풋풋한 냄새, 뭉클한 생크림 냄새가 몸에 푹 배어 본래의 체취와 함께 기분 좋은 냄새로 가득하지만, 베이징에서는 전혀 달랐다. 거품기와 계량스푼이 아닌 차가운 펜을 쥐었고, 소독약 냄새가 진동했다.

천레이옌의 집안은 대대로 의사를 배출했다.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강희제*16니, 옹정제*17니, 황제에게도 알려진 유명한 의원이라는 명백히 과장 섞인 수백 년 된 이야기도 있다. 사회적 지위와 시선이 어찌 되었든*18, 레이옌의 아버지와 조부는 사람을 살리는 과업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장남인 레이옌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다. 집안 어른들의 뜻대로 베이징 대학 의학부(北京大學醫學部)에 입학하고, 연일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한 두려움과 함께 방대한 학습량이 가져오는 졸음과 맞서 싸웠다. 그는 꽤 좋은 성적을 받았고, 주변에서도 많은 기대를 했다.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레이옌이 아픈 사람이면 질색하고, 피를 무서워한다는 점이었다.

그가 병자를 꺼리는 까닭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던 세 살 터울의 여동생 천레이나(陈藟娜) 때문이었다. 레이옌은 제 동생만 보면 괴로웠다. 건강한 자신과 달리 아픈 동생을 보며 항상 죄책감에 사로잡혀야만 했다. 집보다 병실이 익숙한 동생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온몸에 힘이 쭉 빠졌고, 콧잔등은 늘 시큰거렸다. 켜켜이 쌓인 죄책감 탓에 병원이라면 넌더리가 났으며, 아픈 사람이 무서웠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나치게 엄격하고 융통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아버지의 위엄을 꺾기에 과거의 레이옌은 너무 여린 사람이었다. 눈물도 많았다. 지금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2006년 11월 7일은 레이옌이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는 그날도 어김없이 의자에 기댄 등이 뻣뻣하게 굳을 정도로 공부에 매진하느라 바빴다.

당시에 레이옌은 이대로 의자와 몸이 붙어 화석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망상에 시달렸다. 불안 때문에 속이 메스껍고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마음이 약한 아들이 늘 근심거리였던 천준지에(陈俊杰)는 학교 근처에 작은 방을 얻어 레이옌을 집어넣고, 일부러 소원하게 지냈다. 안부 전화도 대개 받지 않았으며, 학기 중엔 집에 들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학업에 전념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천준지에는 아들이 학문에 전념하여 훌륭한 의사가 되길 바랐고, 집안의 위신을 세우며 명성에 먹칠을 하지 않길 바랐다.

11월 7일은 레이나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천준지에는 레이나의 죽음을 레이옌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의 아내 양신위(杨馨予)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울고불고 만류했지만, 끝끝내 제 뜻을 고수했다. 그래서 레이옌은 두통에 시달리며 진통제를 털어 넣던 그해 11월 7일, 동생이 죽은 줄도 모르고 공부에 붙잡혀 있었다.









12) 邓丽君(1953.1.29 ~ 1995.5.8) 한국에서는 등려군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가수.

13) Assemblage 폐품이나 생활용품과 같은 물품을 모아 미술 작품을 제작하는 기법 혹은 그 작품.

14) 四合院 베이징 전통 건축 양식의 하나. 가옥 형태는 사면으로 나뉘는데 북방(正房), 남방의 도좌방(倒座房), 동서의 삼방(厢房)이 사면을 에워싼 사각형을 형성하고, 그 가운데 정원을 둔다.

15) 中秋節 중국의 추석. 음력 8월 13일로 중국의 4대 전통 명절 중 하나이다.

16) 康熙帝 청나라 제4대 황제(재위 1661 ~ 1722).

17) 雍正帝 청나라 제5대 황제(재위 1722 ∼ 1735).

18)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1966년부터 1879년까지 주도된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시기, 의사와 대학교수 등의 직업군은 노동자에 비하여 낮은 신분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의사의 오진으로 홍위병(紅衛兵)들이 오진으로 사망자가 다수 발생하자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신뢰도 역시 떨어졌다. 최근에는 인식이 점차 변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