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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하, 하지 마요!”

앳된 여자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사방에는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고, 곳곳에 자동차와 탱크들이 파손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건물들은 모두 흉물스러운 모습을 하거나 파괴되어 있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세계가 멸망 직전인 것만 같은 모습.

곳곳에 인간의 시체와 알 수 없는 생명체의 파편들이 부패된 채로 남아 있는 것을 보니 무언가와 꽤나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것 같았다.

그런 기괴한 풍경 사이로 세 명의 남자가 지저분한 여성 하나를 덮치려 하고 있었다.

“제발, 제발 하지 마세요!”

“흐흐, 가만히 있어 봐. 뿅 가게 해 줄 테니까.”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안 그러면 무슨 재미로 살 거야?”

“말 잘 들으면 우리가 식량도 주고 그럴게. 너도 좋잖아?”

세 명의 남자는 더러운 농담을 지껄이며 여자의 옷을 강제로 벗기려 했다.

“그, 그만! 제발!”

여자가 울먹거리며 외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공허한 외침만이 이 폐허를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빨리빨리 하고 가자고. 그놈들이 이 주변에 아직 남아 있을 거야.”

“몇 마리 정도야 괜찮지 않겠어?”

“아서라, 괜히 잔뜩 불어나 있으면 우리만 죽는다. 빨리 하고 이동하자.”

남자들은 급한 지, 바지춤을 내리며 여자의 옷을 강제로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하지 마아!”

여자의 외침이 하늘을 찌르듯 높아졌을 때.

파직―

“응?”

전기가 튀는 소리가 사방에 들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천사들인가?”

남자들은 행동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거리 한가운데 블랙홀 같은 검은 구멍이 생겨나 푸른 전기를 내뿜고 있었다.

파직, 파직―

“야야, 전투준비 해. 뭔가 이상하다. 저거 뭐야?”

리더 격으로 보이는 남자의 말에 다른 두 명이 자세를 잡았다.

꿀꺽.

모두가 긴장한 표정으로 검은 구멍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저벅.

사람의 발 하나가 구멍에서 튀어나왔다.

저벅.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한 남자가 구멍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뭐, 뭐야? 사람이 나왔어.”

“저거 뭐야?”

구멍에서 걸어 나온 남자는 세 남자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하늘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푸른 하늘…….”

남자의 목소리는 매우 메마르게 들렸다. 마치 오랜만에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드디어…….”

남자가 고개를 다시 내리고 눈을 감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구로 돌아왔다.”





1화



남자의 몰골은 꽤나 기괴했다.

봉두난발의 머리에 다듬지 않은 수염. 피에 흠뻑 절었지만 멸망 직전의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검은 정장을 입고, 등에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메고 있었다.

“누나, 돌아왔어. 드디어 지구로 돌아왔다고. 크흐흐…….”

한참을 혼자 웃던 남자는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있는 것이라곤 폐허와 시체들뿐이다.

“결국 침공을 당한건가?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이래서야 그곳에 있을 때와 다를 게 없군.”

음울한 눈빛과 목소리로 혼자 말하던 남자는 주변을 다 둘러보고 나서야 세 명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어이, 당신 뭐야?”

“뭔데 이상한 구멍에서 튀어나와?”

세 명의 남자가 건들거리며 입을 열었다. 구멍에서 나온 게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란 것에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나? 나는… 그래, 내 이름은… 준영, 이준영…….”

“사는 곳은 서울특별시…….”

구멍에서 나온 남자, 준영은 갑자기 혼잣말을 시작했다.

“뭐야? 미친놈이잖아?”

“그 구멍은 뭐지?”

“요즘 같은 세상에 신기하고 놀랄 일이 한두 개냐? 알려고 하지 말자.”

세 남자는 준영에게 관심을 껐다. 요즘 시대에 정신이 나간 상태로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각성자라는, 소위 말하는 신기하고 마법 같은 능력과 슈퍼 히어로 같은 육체적 능력을 가진 초인들이 생겨난 뒤로 상식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한마디로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을뿐더러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생기니 다들 그러려니 하고 살고 있는 실정이었다.

다시 여자를 덮치려 세 명의 남자가 움직이자, 준영은 흥미롭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역시 인간들이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천사들이 있는데도 그런 짓을 하다니… 놀랍군.’

준영은 딱히 여자를 도와주러 가지 않았다. 단지 저렇게 더러운 여자와 그런 짓을 하려는 남자들이 그저 감탄스러웠을 뿐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사람이 살짝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여자가 당하는 것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욕구불만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자신이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 마요! 살려 줘요!”

저렇게 크게 고함을 지르면 주변의 천사들이 다가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남자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희롱하듯이 팔과 다리를 잡고 옷을 살짝살짝 벗기고 있었다.

‘각성자군.’

준영은 지구에서 처음 본 이 세 남자가 각성자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아직 인류가 멸망하지 않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여자에 비해 꽤 깨끗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생활도 어느 정도 유지되는 것 같았다.

“크흐, 정찰 나왔다가 이렇게 지저분하면서도 예쁜 여자를 보다니.”

“그런데 냄새가 좀 심하지 않나?”

“뭐, 어때. 난 여자한테 냄새나는 게 좋더라.”

“미친 놈, 크큭.”

“킬킬킬.”

남자들은 낄낄거리며 여자의 옷을 드디어 다 벗겨 냈다.

“나 먼저 한다!”

덩치가 꽤 큰 대머리 하나가 옆 사람들을 밀치며 여자의 다리를 잡았다.

저벅저벅.

그때, 준영은 천천히 걸어갔다. 으스스한 폐허에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남자들은 행동을 멈추고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저거? 왜 이쪽으로 오는데?”

“그런데… 등에 여자 맞지? 시체 같은데?”

“혼자 다니다니 각성자인가?”

남자들은 인상을 쓰며 그제야 준영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피에 절은 정장, 산발한 머리, 다듬지 않은 턱수염과 콧수염. 그리고 붉은 드레스를 입은 채 매달려 덜렁거리는 여자였다.

“얼라? 진짜 미친…놈 같은데? 등에 멘 건 여자 시체가 맞는 거 같아.”

“으하하하! 미친놈이 여자를 메고 다니네?”

“저 여자 그냥 덜렁거리는 것이 시체가 확실한 거 같은데? 성욕에 미친 일반인인가?”

혼자인데다 미친놈이란 확신이 들자, 다시 대머리 사내가 건들거리며 준영에게 다가갔다.

“어이, 형씨? 우리 재미 좀 보려는데 끼려고 왔어?”

“필요 없다. 너희끼리 즐겨라.”

준영은 몰랐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는 그의 목소리가 아주 메마르다고 느꼈다.

감정의 고저조차 없는, 음산하고 무언가 목에 꽉 찬 듯한 어색한 음성이었다.

“필요…없다? 즐겨라? 반말? 님, 지금 반말?”

“으하핫핫!”

남자들이 다 같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지저분한 정신병자 같은 놈이 건방지게 말하니 웃음이 터져 버린 것이다.

“형씨, 정신이 살짝 나가서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모르나 본데, 요새는 아무나 그냥 막 죽어 나가도 되는 거 모르지?”

“모른다.”

준영은 정말로 몰랐다, 요새는 아무나 그냥 죽어 나간다는 것을. 그에게는 요새가 아니라 일상이었으니까.

툭툭.

대머리가 준영의 뺨을 살짝살짝 치며 점점 강도를 높여 나갔다.

“어이, 형씨. 뻣뻣하게 서 있지 말고 네발로 개새끼 흉내 내면 우리가 한 번은 즐기게 해 줄게, 마지막으로. 어때?”

‘…죽일까?’

그제야 준영은 이게 시비란 것을 깨달았다. 오랜만에 인간을 보니 감이 좀 늦게 온 것이었다.

“누나, 어떻게 하지?”

지구에 와서 처음 본 인간이라 죽이고 싶지 않았다. 현재 상황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었고 친구도 사귀고 싶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등에 매달려 있는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뭐야! 진짜 미친놈이잖아! 시체랑 말을 해! 으하하!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이나 한 번 보자!”

대머리 사내가 ‘시체’라고 말을 하며 여자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려는 순간.

푸슉―

대머리 사내의 목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어느 순간 준영의 손에 한 자루의 검이 들려지며 순식간에 목을 베어 버린 것이었다.

“으허헉!”

“뭐, 뭐야!”

남은 두 남자는 화들짝 놀랐다. 분명 준영은 아무런 무기가 없었는데 갑자기 손에 검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대머리 사내는 일행 중 가장 강한 자였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쉽게 죽을만한 등급이 아니었다.

엘리트로 분류되는 C등급 각성자였으니까.

“저, 저 미친놈이… 그러면…….”

“최소 B등급 이상인가?”

저벅저벅.

준영이 앞으로 걸어갈 때마다 두 남자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오, 오지 마.”

“우리는 건드리면 안 돼. 우리는…….”

퓻―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남자의 미간에 작은 구멍이 뚫리더니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다.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고 죽은 것이었다.

“아쉽군.”

겨우 만난 인간들이기에 조금은 아쉬웠다. 그래도 누나한테 함부로 한 놈들을 살려 둘 수는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놈들에게 당할 뻔한 여성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여자는 비명을 질러 댔다.

“꺄악! 살려 주세요!”

세 남자가 실랑이를 하는 동안 옷을 챙겨 입은 여자는 쭈그리고 앉아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부들부들 떨어 댔다.

“아직 한 명이 남았군.”

준영의 나지막한 그 말이 여자에겐 공포로 다가왔다.

“사, 살려 주세요.”

여자를 자세히 보니 상당히 꾀죄죄했다. 긴 머리는 때가 껴서 헝클어져 있고, 얼굴이고 몸이고 땟국물이 가득했다.

옷도 다 헤져서 거지도 이런 상거지가 없었다. 그래도 눈이 크고 오밀조밀한 얼굴의 예쁜 미소녀 스타일이다. 만약 세상이 이렇지만 않았다면 상당히 미인이라는 소리 들으며 대접받고 살 만한 얼굴이었다.

“음.”

방금 사람을 죽여 놓고도 다시 살아 있는 사람을 보자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변덕도 이런 변덕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음…….”

한참 동안 바라만 보고 있자, 극도의 공포에 질린 여자는 손을 들고 천천히 일어났다.

“사, 살려 주세요. 제, 제가 드릴게… 모, 몸밖에…….”

여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울음을 참은 채 넝마가 된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이 비 맞은 강아지 꼴이었다.

“응?”

준영은 그런 여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위기에서 벗어났는데 왜 다시 옷을 왜 벗는단 말인가.

“흑, 으흑…….”

이제는 울기까지 했다. 자신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으려고 꾹꾹 참는 게 눈에 보였다.

‘아하!’

준영은 한참의 생각 끝에 알 것 같았다. 이런 세상에서 젊고 예쁜 여자가 살아남으려면 매우 힘들고 고달플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는 필요하다면 이런 행위를 반복하거나 당하면서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해 왔을 것이었다.

저 눈물은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집착이 보내는 신호였다.

“그만.”

“으으…….”

준영의 메마른 목소리를 들은 여자는 너무도 무서웠다. 처음 그를 봤을 때 시체 하나 더 치우게 될 줄 알았다.

여자는 일행이 천사라는 괴물들에게 당할 때 그 틈을 타 겨우 도망을 왔지만, 재수 없게 당할 위기에 처해 버렸다. 필요하면 충분히 몸을 제공할 수 있지만, 갑작스런 덮침에 거부하며 발버둥 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달랐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세 명의 각성자를 순식간에 죽였다. 그리고 모습과 분위기 자체도 기괴했다.

그 때문인지 이때까지 살아남은 본능이 위험신호를 보냈고 스스로 벗게 만든 것이었다.

‘미친놈이야.’

그녀는 세상이 이렇게 된 후 수많은 미친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위험했다. 게다가 저 눈. 저 누렇고 탁하게 변한, 언뜻언뜻 붉은빛을 보이는 저 눈동자는 절대 정상이 아니었다. 눈빛과 몸짓, 행색. 확실한 미친놈이었다.

그리고 한 번 더 미친놈이라 확신하는 증거는…….

등에 메고 있는 건 여자 시체가 아니었다. 정말 예쁘고 아름답지만, 실제 사람처럼 만들어진 인형인 것이었다. 그것도 놀라울 정도로 사람과 흡사한 인형.

기본적으로 빠른 눈치와 살기 위해 항상 주변을 관찰하는 습관이 아니었다면 쉽게 알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인형이었다.

짙은 갈색의 롱 웨이브 펌의 머리. 그리고 그 사이로 살짝 드러난 인형의 아름다운 얼굴은 눈을 감고 있었다. 미소 짓고 있는 그 표정은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분위기였다.

‘각성자인데 미쳤다니…….’

각성자는 무섭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녀에게 각성자는 사람들을 지켜 주는 존재가 아닌, 그저 힘과 공포로 군림하는 괴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살려 주세요. 제발요. 뭐든지 할게요. 흑흑.”

여자는 무서워서 벗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선 채 눈물만 흘렸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이렇게 죽기는 너무 억울했다. 게다가 이 근처에는 괴물들까지 있었다. 빨리 도망가야 하는데 눈앞의 미친놈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준영의 메마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너는 냄새나고 더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