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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중국전 (2)



[이제 중국 팀의 선공으로 시합이 시작됩니다. 대한민국의 선발 투수는 신치열 선수가 올라왔습니다.]

[네. 남준혁 선수가 큰 인상을 심어 주었지만, 신치열 선수도 보통이 아닙니다. 현재까지 무실점 투구예요.]

[자료를 보니 남준혁 선수가 오기 전까지 팀에서 원투 펀치를 담당한 선수네요.]

치열이 마운드에 오르자, 준혁도 1루 베이스에 자리를 잡고 섰다.

치열은 허용된 연습 구를 던지며 서서히 몸을 덥혀 갔다.

‘오늘 공이 잘 긁힌다. 이 정도면 나도 노히트노런 정도는 할 수 있어.’

치열은 새삼 의욕이 넘치는 것을 느꼈다.

퍼펙트게임은 사실 팀원들의 도움도 필요하고 운도 따라야 하기에 혼자서 잘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노히트노런이 투수의 능력만으로도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기도 하다.

야수의 실책이나 포볼 같은 것이 있어도 가능하니까 말이다.

천수가 그만두면서 자신이 팀의 에이스가 될 거라 예상한 치열은 준혁이 나타나면서 다시 2인자가 됐다.

처음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세계 대회에 나갈 수만 있다면 만족했으니까.

하지만 어느덧 팀의 중심이 되어 버린 준혁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준혁이 퍼펙트게임을 달성하며 화제의 중심에 놓이자, 마음속에서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 버렸다.

모두가 노력해서 이 자리에 도달한 것인데, 갑자기 굴러온 돌이 모든 영광을 다 가져가는 느낌.

‘정작 한국 대표를 뽑을 때 고생한 것은 우리들인데…….’

치열은 오늘 그 평가를 뒤집어 줄 작정이었다.

오로지 본인의 실력만으로.



“플레이볼!”

주심의 선언과 함께 게임이 시작됐다.

그와 동시에 야수들과 덕아웃에 있는 선수들이 소리를 지르며 응원했다.

“신치열, 파이팅!”

그 와중에 준혁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치열은 무심한 표정으로 살짝 바라본 후, 오늘도 포수 박스에 앉아 있는 민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잘해 보자, 민수야.’

민수의 초구 사인은 패스트볼.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 자세를 잡자, 치열도 와인드업 자세를 취했다.

이내 힘차게 초구가 뿌려지고…….

퍽!

중국 선수는 방망이를 내지 않고 가만히 공을 지켜보기만 했다.

“스트라이크!”

[신치열 선수, 초구 스트라이크입니다.]

[네. 공이 좋아요. 우리나라로서는 행운이에요. 남준혁 선수와 신치열 선수, 그리고 투수가 가능한 다른 두 명의 선수까지 모두 공이 좋은 편이에요.]

[그렇군요. 말씀드리는 순간, 다시 이어지는 두 번째 공. 역시 스트라이크입니다.]

[지금 보면 시속 114㎞ 정도까지 속도가 나오고 있어요. 신치열 선수의 최고 구속이 116㎞인데, 초반부터 제대로 구속이 나오네요.]

중학생의 평균 구속이 115㎞인 상황에서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치열이 116㎞를 던진다는 건 꽤나 잠재력이 우수하다는 의미였다.

이어지는 세 번째 공.

“스트라잌!”

심판의 힘찬 선언과 함께 치열은 문제없이 중국의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아자!”

치열이 마운드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처음 느낌대로 오늘은 잘 긁히는 날인 듯했다.

[신치열 선수, 리듬이 좋아요.]

[네, 맞습니다. 대한민국, 이대로 준결승전을 문제없이 넘어가길 바랍니다.]

이어 타석에 들어서는 중국의 2번 타자는 호리호리한 체형에 키가 큰 선수였다.

타석에서 배트를 휘두르는데, 바깥쪽 끝까지 꽉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일단 안쪽을 공략하자.’

민수가 몸 쪽 공을 요구하자, 치열은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드업을 취했다.

퍼억!

“볼!”

선구안이 좋은지, 중국의 타자는 공 하나만큼 빠지는 투구를 잘 골라냈다.

타자를 살핀 민수는 이번엔 바깥쪽 낮은 코스를 요구했다.

타자의 눈에서 가장 먼 곳의 스트라이크 코스.

잘만 들어가면 공략하기 힘든 공이다.

슈우욱!

역시나 기분 좋게 뻗는 공에 맞춰 중국 선수의 배트가 따라 나왔다.

깡!

겨우 배트의 끝부분에 맞은 공이 둥실 떠올랐다.

1루 방향으로 휘어 나가는 파울볼.

그때, 미리 타구를 예상했는지 준혁이 공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파울 지역의 내야 펜스 방향으로 날아가는 공.

[남준혁 선수, 파울볼을 따라갑니다! 스타트가 좋았어요.]

[네! 공이 배트에 맞자마자 움직였어요!]

[과연, 과연!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잡았어요! 아주 좋은 플레이입니다!]

펜스 앞에서 몸을 날려 공을 잡아낸 준혁은 무릎을 꿇은 채 글러브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아웃!”

1루심의 선언이 떨어지자, 준혁은 우익수에게 공을 던지고는 몸의 묻은 흙을 털어냈다.

멋진 파인 플레이에 관중석에서도 큰 박수가 쏟아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치열은 두어 번 박수를 치고 다시 공을 받았다.

준혁이 1루 베이스로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중국 팀의 3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하지만 글러브로 얼굴을 반쯤 가린 치열이 쓴웃음을 짓고 있는 것을 누구도 볼 수가 없었다.

잠시 민수와 사인을 주고받은 뒤, 치열의 투구가 이어졌다.

[아! 공 좋아요. 신치열 선수, 오늘 작정하고 나온 것 같은데요.]

[116㎞! 자신의 최고 구속을 기록합니다.]

[중국의 3번 타자, 신치열 선수의 강속구에 크게 헛스윙을 하며 삼진을 당합니다.]

심기일전한 치열이 문제없이 3번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삼자범퇴로 중국의 공격이 끝났다.

“치열아, 오늘 너무 잘한다!”

“굉장한데! 중국 애들이 꼼짝도 못했어!”

덕아웃으로 들어온 아이들이 호투를 칭찬하자, 치열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 피어났다.

“이러다 오늘 치열이도 사고 한번 치겠는데?”

“하하, 사고는 무슨. 우리가 이기는 게 중요하지.”

치열이 팀의 승리를 강조하며 겸손하게 대답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이 느낌이지.’

그 순간, 화제가 준혁에게 넘어갔다.

“근데 준혁이도 아까 멋졌어! 그 공을 그렇게 잡아 버리다니.”

“맞아! 투수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수비도 잘하네. 그것도 삼촌한테 배운 거야?”

인터뷰를 본 학부모와 아이들이 사부가 누구냐고 물어보는 통에 준혁은 존재하지도 않는 삼촌을 다시 등장시킬 수밖에 없었다.

“으응? 그렇지, 뭐. 하하…….”

멋쩍게 웃는 준혁에게 아이들이 몰려들며 연신 말을 쏟아 냈다.

“나중에 한번 특별 교습 같은 거 받게 해 줘. 우리도 배우고 싶다.”

“그러게. 그냥 원 포인트 레슨 같은 것도 괜찮아.”

“부탁이야, 응?”

준혁은 눈을 빛내며 달려드는 아이들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결국 다시 둘러댔다.

“아, 지금은 격투기 때문에 바빠서 안 될 거야. 혹시 나중에 시간 나면 이야기해 볼게.”

“그래, 꼭이야!”

“맞다! 치열아, 너도 가르쳐 달라 그래 봐. 그러면 너도 퍼펙트게임 할 수 있을 거야.”

느닷없이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치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지만,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난 괜찮아. 이미 따로 과외도 받고 있고.”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뭐.”

하지만 속마음은 결코 편하지 못했다.

‘아니, 이 정신 연령은 초등학생인 놈들이 뭐라는 거야? 이놈들은 자존심도 없나?’

순간, 마음속으로 짜증이 확 밀려왔다.

얼핏 생각해도 자신이 더 잘한 것 같은데, 준혁만 주목받는 것을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치열은 티를 내지 않고 얼굴에 웃음기를 유지한 채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세계 대회 출전이 가능할 것 같아 중학 야구부에 특별히 부탁을 했다.

학교 측에서도 치열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 허락했지만, 지는 순간 리틀 야구 탈퇴와 함께 야구부 복귀라는 조건을 걸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후회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준혁이에게만 몰리는 관심이 너무 싫은 탓이었다.

따악!

“와! 홈런이다!”

“나이스! 잘했다, 준혁아!”

그렇게 치열이 자신만의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준혁이 홈런을 때려 냈다.

단숨에 2점을 앞서 가는 상황이라 당연히 대한민국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치열의 마음은 복잡했다.

어느새 베이스를 돌고 덕아웃으로 들어온 준혁에게 아이들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반겨 줬다.

덕아웃 입구에서부터 아이들과 손바닥을 마주 치며 안쪽까지 들어온 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치열의 모습에 들어 올린 손을 어색하게 내렸다.

“아, 미안. 선발한테 내가…….”

프로 시합에서 선발 투수는 컨디션 유지가 중요하기에 방해를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준혁은 그 점을 떠올리고는 조용히 사과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표정이 이상해.’

물론 혈기왕성한 리틀 리그에서는 선수 모두가 어울리는 게 당연하지만, 준혁이 보기에 치열의 기색은 그리 좋지 못했다.

다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몰랐다.

그저 오늘 집중하느라 힘이 들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아웃 카운트가 셋이 되면서 대한민국의 1회 말 공격이 마무리되었다.



[오늘도 앞서 나가는 대한민국입니다.]

[네. 대한민국의 리틀 야구가 아시아에서는 강호입니다. 아마 이런 부분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았을 텐데, 오늘을 시작으로 많은 분들이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맞습니다. 그나저나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다고 할 수 있겠네요.]

중계진의 칭찬과 함께 치열이 다시 마운드에 섰다.

상대는 좌투 좌타의 4번 타자.

경기 전에 받은 자료에 따르면, 거포형 슬러거라고 했다.

변화구에 약하다는 약점이 있다지만, 투수들이 제대로 변화구를 구사하지 못하는 지금 나이 대에서는 거의 무적의 타자였다.

1구 와인드업.

강력하게 들어간 패스트볼이 홈 플레이트를 통과하는 순간, 타자의 방망이가 강하게 돌아갔다.

까앙!

1루 방향 펜스로 크게 넘어가는 파울.

그 말인즉, 배트가 공보다 빨리 돌아갔다는 뜻이었다.

타구의 방향을 본 타자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맴돌고, 상대적으로 치열의 표정은 살짝 어두워졌다.

그런 기색을 알아차린 민수는 2구를 바깥쪽으로 빠지는 유인구로 요구했다.

치열은 고개를 끄덕인 후, 힘차게 공을 던졌다.

슈욱!

퍽!

공이 강하게 미트로 틀어박혔지만, 타자가 잘 참고 걸러냈다.

‘더 강하게, 더 빠르게.’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듯 중얼거린 치열은 다시 세 번째 공을 던지기 위해 와인드업을 했다.

이번엔 약간 낮은 공이었다.

깡!

배트의 윗부분에 맞은 공은 포수의 머리 뒤로 날아갔다.

치열의 패스트볼에 배트의 타이밍이 맞아 가고 있다는 신호였기에 타자는 아쉽다는 듯 타석에서 방망이를 강하게 휘돌렸다.

그러자 새 공을 건네받은 치열이 민수에게 먼저 사인을 건넸다.

‘하, 이 투수 놈들 진짜…….’

민수는 기시감을 느끼며 말없이 미트를 내밀었다.

곧 치열이 와인드업 자세로 다리를 뻗으며 오른팔을 휘둘렀다.

이전과는 조금 다른 자세로 힘차게 뿌려진 공은 홈 플레이트 한 복판을 향해 날아왔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중국의 타자가 자신감 있게 방망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걸렸다!’

부웅―

순간, 방망이가 크게 헛돌며 헛스윙을 했다.

마치 타자의 눈에는 공이 도망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슬라이더?”

물론 아직 완전하게 가다듬어지지 않은 슬라이더이지만, 허를 찌르기에는 충분했다.

아니, 분명 지금 수준으로도 어느 정도 통할 수 있는 공이었다.

“스트라잌 아웃!”

[앗! 신치열 선수의 슬라이더! 강력한 4번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냅니다.]

[하하, 우리 선수들이 마구 하나씩은 숨기고 있는 것 같아요. 어찌 이렇게 필요한 순간마다 새로운 무기를 꺼내는지요.]

[해설위원님 말씀대로라면 정말 만화 같은 이야기인데, 그것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네요. 하하!]

치열의 놀라운 공에 중계진뿐 아니라 관중석까지 환호를 보냈다.

한껏 우쭐해진 치열은 준혁을 힐끔 바라봤다.

준혁도 밝게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흥, 두고 봐라. 나도 한다, 퍼펙트게임.’

치열은 이후의 타자들도 강속구와 슬라이더를 적절히 사용하며 손쉽게 요리해 나갔다.

B조 2위의 중국 팀은 대만 팀과 비교해서도 실력이 떨어졌고, 한껏 기세가 오른 치열의 공을 공략하기 어려웠다.

이후의 공격에서 한 점을 더 보탠 한국은 3대 0으로 5회를 맞이했다.



자신의 차례가 되자 글러브를 들고 일어서는 치열.

이번 예선에서 더 이상 던질 일이 없는 치열은 감독에게 끝까지 던지고 싶다는 부탁을 한 상태였다.

“그래. 일단 던져 보고 상태를 봐서 교체하도록 하겠다.”

이미 준혁에게도 퍼펙트게임의 기회를 준 감독으로서는 지금 치열의 호투를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

조건부 승인을 받은 치열이 마운드에 올라섰다.

중국의 공격은 4번 타자부터 시작되는 타순이었다.

치열은 허리를 굽히고 민수와 사인을 교환했다.

초구는 몸 쪽 꽉 찬 패스트볼.

가슴 앞으로 글러브와 두 손을 모은 후, 패스트볼 그립을 잡은 치열이 힘차게 다리를 뻗어 오른팔을 휘두르고…….

찌릿!

“스트라이크!”

심판의 목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지만, 치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자신의 팔꿈치에서 이질적인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