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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지역 예선 (3)



드디어 한 선수가 뒤로 넘어지며 경기가 끝났다.

“그렇지! 진작 그랬어야지! 아, 맞다. 준혁아, 끝났다.”

격투기 시청을 끝낸 사부가 그제야 준혁에게 몸을 돌렸다.

“아, 눼~ 눼.”

소파에 앉은 채 바닥을 보며 의욕 없이 대답하는 준혁.

어딘가 삐친 것 같은 그 모습을 보고 이공자가 혀를 찼다.

“사내놈이 그렇게 소심해서 어디다 써먹으려고.”

“남녀가 무슨 상관인데요? 그리고 요즘 세상에 그런 생각 가지고 있으면 큰일 나요.”

“내가 요즘 사람이더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쳇, 됐어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가만히 준혁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공자가 입을 열었다.

“일단 네 질문을 생각해 보니, 다른 아이들과 너와의 큰 차이가 하나 있구나.”

“그게 뭐죠?”

이공자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바로 나 아니겠느냐?”

“…….”

우리 사부, 또 잘난 척을 하는 건가.

준혁의 생각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며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자 이공자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제자야! 너 체인지업 던질 때 눈썹에 힘주지 마라.”

“네?”

“그거 한두 번은 먹히겠지만, 그러다 버릇된다. 그걸 또 역으로 써먹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예 잘못된 길로는 가지 않는 것이 좋아.”

준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부를 바라봤다.

예리하군. 그건 또 어떻게 봤대?

나름 표정 연기를 하면서 힘주는 척한 건데.

하지만 또 생각이 얼굴에 드러난 듯 이공자가 말을 덧붙였다.

“네 나이 또래 애들이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뭐. 놀랄 필요 없다.”

“역시 싸부님입니다.”

주먹을 쥐고 포권 자세를 취하자, 이공자가 피식 웃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금처럼 네가 교본으로 연습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만, 내가 알려 준 호흡법과 스트레칭이 큰 도움이 된 것이야. 일어나 봐라.”

준혁이 소파에서 일어나자 이공자가 다가와 팔과 등을 주물러 댔다.

“어흐, 아하! 으으, 간지러워요. 아흐…….”

“쓸데없이 느끼지 말고. 근육량은 아직 부족하네. 그렇지?”

“네.”

“그래도 내 덕분에 근육의 유연성이 더해지고 질도 향상되었을 것이다.”

“그런가요?”

“그러니 잊어버리지 말고 꾸준히 해야 해. 그나마 넌 밤낮으로 훈련이 가능하니 남들보다 더 이득이지.”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공자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어찌 됐든 호흡법과 스트레칭을 병행하면서 몸 상태가 좋아진 것은 맞으니까.

“아직 근육은 적지만 유연함으로 인해 가지고 있는 힘을 끝까지 끌어낼 수 있는 것이지. 고무줄이 늘어나는 것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아, 네.”

“그리고 호흡법을 통해 근육의 밀도나 강도도 좋아지고 있으니, 나중에 근육량이 늘어난다면 더욱 큰 효과를 볼 수 있겠지.”

“그럼 저도 언젠간 무림인처럼 장풍도 쏘고,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있나요?”

딱!

“아야!”

그냥 가벼운 딱밤인데도 너무 아팠다.

눈물이 핑 돌은 준혁이 한 손으로 머리를 비빌 때, 이공자의 엄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무공을 제대로 시작하기엔 나이도 늦었고, 그걸 알려 줄 생각도 없다. 더군다나 텔레비전이란 것을 보니, 무공이 오히려 너에게 족쇄가 될 것 같아 가르치지 않은 것이 더 잘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구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마 무공을 배우게 된다면, 너는 더 이상 스포츠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가요?”

“그래.”

이공자는 며칠간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자신이 그동안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껏 생각해 온 것처럼 야구는 이상한 운동이 아니고, 나름 잘 만들어진 스포츠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곳엔 무공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래. 나도 마찬가지고…….”

자신의 자리도 허락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왜 이곳에 자신이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봤지만, 끝내 아무런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힘없이 중얼거리는 이공자의 말에 준혁의 눈이 동그래졌지만, 이내 애써 모른 척했다.

저런 이공자의 얼굴은 준혁으로서도 처음이었다.

‘그럼 사부는 비급의 요정이 아니었나?’

이공자가 들으면 경기를 일으킬 생각을 하던 준혁이 고개를 들었다.

이공자에게 우울한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척 소리를 질렀다.

“그럼 어서 제 훈련을 봐주세요! 내일 경기가 중요하다고요!”

이공자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준혁을 바라봤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자신을 졸라 대는 제자.

참 표정 연기 못한다.

“그래, 가자. 넌 체인지업부터 해결해야겠다. 아니, 그 얼굴 표정부터!”

일단 눈앞의 것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나중 일은 나중을 위해 남겨놓자.



***



[어느덧 대회도 오늘로 3일째에 접어들었는데요.]

[그렇죠. 특히 우리 대한민국 선수들의 선전이 전해지면서 리틀 야구에 대한 관심도 많아지고 있다고 하네요.]

[네, 그렇습니다. 전 세계의 어린 꿈나무들이 흘린 땀과 열정이 많은 분들을 감동케 하고 있는 이곳 화성 드림 파크에서 잠시 후 대한민국의 세 번째 경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경기는 대만과의 대결인데요, 사실상 미리 보는 결승전이라는 말처럼 치열한 경기가 펼쳐질 거라 예상되네요.]

[네. 말씀드린 것처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린 이번 경기, 잠시 광고 후에 시작되겠습니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1루 측 덕아웃에서 시합 시작을 기다렸다.

총감독과 두 명의 코치, 그리고 열세 명의 선수. 모두가 눈을 빛내는 가운데, 털보 코치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준혁아, 몸 상태는 괜찮지?”

이미 한차례 몸을 푼 준혁은 포수인 민수와 함께 의자에 앉아서 사인을 점검하고 있었다.

“네, 좋아요.”

“그래. 대만은 앞선 두 팀보다 전력이 좋다. 그러니까 투구 수는 크게 신경 쓰지 말고, 초반에 기선을 잡는 쪽으로 게임을 진행하자. 알았지?”

“네.”

“만약 예선에서 우리가 1위, 대만이 2위를 하고 결승 토너먼트에서 이기면 다시 만날 수도 있다.”

“아, 그렇다면 오늘 확실히 눌러 주는 것이 도움이 되겠네요.”

“그렇지. 우린 다른 투수도 괜찮으니까 뒤는 걱정 말고. 그럼 오늘도 잘 부탁한다.”

“네, 감독… 아니, 코치님.”

털보 코치가 이야기를 마친 후 다른 아이들 쪽으로 이동하자, 옆에 있던 민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전사여, 드디어 봉인 해제인가?”

준혁이 그런 민수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민수야, 이제 중학생쯤 됐으면 만화 좀 그만 봐라.”

“만화가 뭐 어때서? 다른 거 보면 뭐가 달라지나?”

“당연하지. 무협 영화를 보면 말이야… 아니다, 됐다.”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비급 이야기를 할 뻔했다.

물론 믿지도 않겠지만, 항상 비밀 엄수에 만전을 기해야 했다.

“얘들아, 가자! 시작이다!”

마침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자, 준혁은 자연스럽게 글러브를 챙겨 들었다.

[오늘은 1일 차에 이어 남준혁 선수의 두 번째 선발 등판입니다.]

[맞습니다. 첫날은 선발로, 둘째 날은 마무리로 큰 인상을 심어 준 남준혁 선수였는데요, 이틀 동안 투구 수 조절을 참 잘했어요.]

[네. 오늘도 기대가 됩니다. 난적 대만을 맞이하여 좋은 모습을 보여 주길 기대합니다.]

마운드에 올라 심판에게 공손히 인사한 준혁은 문득 카메라가 자신을 잡고 있는 것을 느꼈다.

사부가 말했지.

사내자식이 너무 티 나게 그러는 거 아니라고.

사실 카메라를 보고 무심결에 손을 흔든 것인데, 이공자는 그것을 자신에 대한 반가움의 표현이라 여긴 듯했다.

물론 굳이 나서서 정정해 주지는 않았다.

준혁은 카메라를 힐끔 본 후, 눈썹을 찌푸렸다.

일명 체인지업 표정.

사부라고 한 명 있는데, 어지간히도 손이 많이 간다.

“뭐, 이 정도면 알아봤겠지.”

중얼거리는 준혁의 귀로 심판의 플레이 볼 선언이 들려왔다.

잠시 포수와 사인을 나눈 후, 와인드업 자세를 취한 준혁은 오늘도 힘차게 공을 던졌다.

뻐엉!

“스트라잌!”

준혁의 강력한 패스트볼이 포수의 미트를 파고들었다.

대만의 1번 타자가 방망이도 휘두르지 못한 채 멍하니 공만 바라보았다.

초구는 125㎞.

역시나 부담스러운지, 타자가 잠시 타임 요청을 한 후 타석 밖으로 나갔다.

방망이를 두어 번 휘두르고 다시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

배트로 헬멧을 콩콩, 치더니 바로 타격 자세를 잡았다.

타자의 상태를 살핀 민수는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는 공을 요구했다.

고개를 끄덕인 준혁은 다시 힘차게 공을 뿌렸다.

뻐억!

부웅!

민수가 요청한 위치로 공이 빨려들 듯이 파고들었다.

이번엔 타자도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지만, 공보다 많이 늦었다.

“아으, 아쉽다.”

으응?

타자의 아쉬워하는 표정을 본 준혁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어린애라지만, 어찌 저리도 긍정적인가.

안 되겠다.

힘을 잔뜩 주며 타석에서 공을 기다리는 타자의 얼굴을 보며 준혁이 민수와 사인을 나눴다.

그래, 이 타이밍은 누가 뭐래도 체인지업이지.

준혁의 손에서 떠난 공이 홈 플레이트를 통과하기도 전에 방망이가 돌아갔다.

“스트라잌 아웃!”

“아쉽다. 이번 공은 칠 수 있었는데…….”

비록 말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정말로 아쉬워하며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타자의 모습에 준혁은 어이가 없었다.

그런 감상은 비단 준혁만의 것이 아니었다.

[굉장히 아쉬워하는데요, 대만 선수.]

[하하, 역시 다른 팀과 달리 대만의 선수들은 호락호락하지 않네요. 뭔가 긍정적이고 열정이 보여요.]

[그에 반해 우리 남준혁 선수는 아주 의젓하네요. 오늘은 표정 변화도 별로 없습니다.]

[네. 정말 믿음직스럽습니다. 오늘 아주 기대가 됩니다.]

이어서 2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이 선수의 이름은 준혁도 알고 있었다.

감독님이 시합 전 주의하라고 말해 준 선수 중 한 명.

린즈인.

슬러거형 타자는 아니지만, 배트 컨트롤이 좋고 주루 센스도 뛰어나 주의하라고 전달받았다.

타석에 들어선 린즈인은 마치 시위라도 하듯 방망이를 크게 휘둘러 댔다.

얼마나 힘이 넘치는지, 마운드까지 그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그런 후, 린즈인은 배트를 잡은 그립을 귀 높이로 올리며 타격 자세를 잡았다.

그 상태로 준혁을 노려보며 눈에 잔뜩 힘을 주는 린즈인.

바로 옆에서 사인을 보내려던 민수도 그 기세를 느꼈다.

‘체인지업, 아래로 떨어뜨려. 다시 한번 속이자.’

체인지업을 요구하는 민수.

초구 체인지업은 분명 허를 찌를 것이다.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이려던 준혁의 눈에 린즈인의 표정이 들어왔다.

잠깐!

‘저건 어제까지 체인지업을 던지기 직전의 내 표정이잖아.’

타자도 저런 표정을 짓나?

잠시 생각하던 준혁이 글러브로 얼굴을 가린 채 씩 웃었다.

‘땡큐, 사부!’

어젯밤, 얼굴 표정에 대해 강의받은 것이 도움이 됐다.

민수와 사인을 주고받은 준혁은 와인드업 자세를 취했다.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는 린즈인의 모습에 준혁도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준혁이 왼쪽 다리를 힘차게 들어 올릴 때, 갑자기 린즈인의 타격 자세가 바뀌었다.

[아! 린즈인, 갑자기 번트 자세로 바꿉니다. 드래그 번트!]

일명 기습 번트.

아나운서의 말대로 린즈인은 귀 옆까지 올린 방망이를 내리며 번트 자세를 잡았다.

순간, 당황한 수비수들이 허둥대며 커버가 늦어졌다.

일단 살아만 나가면 이후의 도루는 쉽다.

아무리 리드 폭에 제한을 두는 리틀 야구라지만, 도루를 저지할 만한 능력을 가진 포수는 이 나이 대에서 그리 많지 않았다.

준혁의 강속구를 감안한다 쳐도 이전 경기에서 봐 둔 민수의 도루 저지 능력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덕아웃에서 그 장면을 바라보던 대만 팀 감독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이 모든 것은 린즈인의 도루를 성공시키기 위한 대만 팀의 빌드 업이었다.

1번 타자의 과장된 행동도 모두가 계획된 연기였다.

준혁에게 체인지업을 강요한 후의 기습 번트.

그 와중에 던지기 전의 눈썹을 찌푸리는 버릇도 확인한 터였다.

하지만…….

[엇! 남준혁 선수. 저게 무슨 폼인가요? 갑자기 언더핸드예요!]

이번에는 해설자가 놀란 목소리로 와락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변한 투구 폼에 린즈인도 당황했다.

준혁이 언더핸드로 던진 공의 구질은 투심 패스트볼.

휘둘러진 팔의 궤적에 따라 가라앉은 공이 위로 떠오르며 흔들렸다.

‘치지 말아야 하지만…….’

문제는 이제 기습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비수들도 번트에 대비를 할 것이고, 무엇보다 준혁은 지금보다 더 빠른 공을 던질 것이다.

어떡하지?

순간, 머리가 복잡해진 린즈인은 자신도 모르게 날아오는 공에 방망이를 갖다 댔다.

깡!

크게 흔들리며 위로 솟구치던 공은 린즈인의 의도와는 반대로 배트 위쪽에 맞아 높이 솟구쳤다.

민수가 빠르게 마스크를 뒤로 넘기며 일어났다.

“포수! 포수! 머리 위!”

달려오며 손가락으로 떠오른 공을 가리키는 준혁.

민수가 준혁의 콜에 따라 하늘을 바라보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고는 이내 정점을 찍고 떨어지는 공을 가볍게 미트로 받아 냈다.

“아웃!”

심판의 콜이 떨어지자 대한민국 팀 응원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놀랍습니다! 기습 번트 작전도 놀랍지만, 그에 순간적으로 대응한 남준혁 선수도 참 대단합니다.]

[투구 폼을 저렇게 바꾼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참 놀라워요.]

하지만 놀랄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