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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너는 왜 하필 건축이야?’

‘잘 보여서.’

‘눈에 잘 보인다고?’

‘어. 건축물은 실재하잖아. 말이나 글로만 떠드는 게 아니라.’

그제야 나는 항복하듯 너를 떠올리고 만다. 세월의 바위 아래 꾹꾹 눌러둔 너는 어느새 홀연히 내 눈앞에 서 있다. 활기에 찬 이십 대 청년. 깔끔하게 다듬은 머리칼과 계절에 비해 가벼운 옷차림. 젊음의 생기와 열기를 껴안은 눈동자.

‘철학이니 문학이니, 난 그런 건 영 골치 아파서.’

계속하여 나는 너를 생각한다. 시간 속에 묻힌 너를 파헤치는 동안 나의 몸은 빠르게 너를 기억해 낸다. 모습과 목소리, 냄새, 온도. 생생한 감각으로 되살아난 너는 예전에 그랬듯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너는……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그리고 나는 또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너 진짜로…… 나한테 할 말 없냐고.’

그러나 나는 아직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짧았던 시간과 길었던 세월, 냉정히 끊어 내고 당기듯 이어지길 반복해 오던, 그럼에도 끝끝내 어긋나고 말았던 사람. 너에 대한 이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나는 어른이 된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것은 갈망이었을까. 끝내 충족되지 않아 여태 살아 있는 끈질긴 에로스인가. 그 긴 시간 움켜쥐고 놓기를 반복하면서도 너를 향한 갈망이 채워지지 않았다면, 내가 너로부터 얻기를 갈구한 것은 또한 대체 무엇이었을까.

‘소크라테스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소유하지 못한 것만을 갈망할 수 있어.’

나는 긴 숨을 뱉으며 창가로부터 시선을 되돌린다. 일찌감치 부팅이 완료된 모니터에는 익숙한 바탕화면이 떠 있다. 나는 작업 중인 논문이 든 폴더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길게 뱉는 한숨. 언뜻 콧김이 더워진 것 같은 착각이 인다.

실감하지 못하는 사이 시간이 흘러 날짜는 다시 십일월. 이도 저도 아닌 계절의 갈림길에서, 변덕스러운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가을과 겨울의 기로에서 나는 또다시 번거로운 생일을 맞았다.



-



너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원 첫해 가을이었다. 그때 나는 석사과정에 돌입한, 덕분에 인생의 진리를 대강은 알았노라 착각에 여념 없던 철학도이자 첫사랑 실패의 대충격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스물네 살이었다.

두 번째 학기에 들어서며 나는 대학원 생활에 완전히 적응한 상태였다. 낯선 캠퍼스의 지리와 건물 위치, 사 년간 몸에 익은 버스노선에서 몇 정거장 더 가 내리는 것도 이제 어색하지 않았다. 지도교수나 동기들과도 필요한 만큼 적당히 친밀해져 있었다.

대학원 동기 네 명 가운데 동 대학 학부 출신이 아닌 건 나 하나뿐이었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지만 엄연히 타교 출신이라 따돌림이라도 당하는 거 아니냐며 엄마는 걱정했지만, 어차피 박사과정을 독일에서 할 거면 일찌감치 나가라고 아빠도 권했지만, 다행히 내가 장담한 대로 왕따 같은 불미스런 일은 전혀 없었다. 동기들이 철학도답게 성숙한 인격을 연마했기 때문은 물론 아니고, 아마 정원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는 비인기 학문을 하는 입장에서 일종의 호혜 정신이 발휘된 덕일 것이다.

석사과정은 대체로 재미있었다. 우리 과는 학부 규모도 소박한 데다 지도교수의 인격이 훌륭해서 남들처럼 조교 노릇 하느라 심신 다칠 일이 없었다. 나는 첫 학기에 잔뜩 독이 올라 죽어라 공부만 했는데, 본격적인 학문 세계에 발 들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실연의 괴로움을 누르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익숙한 모교 대신 굳이 길 건너 타교로 진학한 까닭은 사실 남자 친구 때문이었다. 대학교 연합 동아리를 통해 만나 삼 년 넘게 사귄 그는 내 첫사랑이다. 행위를 포함한 것만을 사랑으로 친다면 그는 의심의 여지 없이 첫사랑이다. 사랑에 빠진 모두가 그렇듯 나는 그것이 내 일생의 사랑이라 생각했다. 신탁을 받은 무녀처럼 굳게 굳게 그리 믿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나를 떠나기로 결정한 뒤, 필연적으로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을 때, 나를 덮친 배신감과 실망과 충격이란 가히 인생 최대의 타격이었을밖에.

그와 나란히 진학하기로 했던 대학원에 기어코 혼자 입학한 것도 이를테면 허영심이었다. 너 따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내 삶은 흔들림 없다는 선언. 나의 결정은 순전히 나의 의지였을 뿐 너와는 상관이 없었다는, 드높은 자존감을 뽐내려는 유치한 과시욕.

‘워낙 사주가 좋대잖니. 너 이름 지으러 작명소 갔을 때부터 다 그 소리 했어. 워낙에 팔자가 너무 좋다고. 평생 맘고생 몸 고생 할 일 없는 팔자라고.’

어릴 때부터 엄마는 꼭 나를 세뇌시킬 것처럼 자주 그 말을 했다. 워낙에 팔자가 너무 좋다고. 그러니까 만일 사람마다 운명의 행로가 기록된 ‘팔자’라는 책이 있고, 그 책에 일생 일어날 모든 일들이 미리 적혀 있는 거라면, 전 남친의 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은 것이나 실연의 늪에 빠져 갖은 청승을 떤 것, 학교 앞 카페에서 돌연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것도 모두 내 원래 팔자에는 없던 일일 것이다.

그런즉슨, 나를 고생길로 이끈 모든 사건들은 내 완벽한 팔자에 낙서를 끄적인 주변인들 탓이라는 뜻.

‘딱 일주일만. 알바생 구할 때까지만 도와주라. 이 가엾은 이모 좀 동정하면 안 되겠니, 조카야?’

막내 이모가 선처를 호소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길어야 일주일, 이모가 자리를 비운 오전 세 시간 동안만 가게를 지키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일주일이면 찾아낼 줄 알았던 알바생은 삼 주가 되도록 감감무소식이었고 나는 차츰 각종 커피 제조가 손에 익게 되었다. 이번 주까지만 해 주라, 제발 조카야. 그리고 이모의 우는소리를 더는 신뢰하지 않게 되었을 때 즈음,

‘그, 오늘의 커피는 뜨거운 거예요?’

내 앞에 네가 나타났다. 아무런 예고도 징후도 없이. 너무나도 평범한 어느 보통 가을날.

‘금요일부터 일하시나 봐요.’

완벽한 나의 팔자에 또다시, 큼지막한 낙서가 주욱 그어진 순간이었다.





2. 유진욱



자정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모니터 앞에서 손가락만 꼼지락대고 있다. 흰 바탕 위 끈질기게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았다.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참 많았는데, 막상 쓰려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까마득하다.

네게 마지막으로 이메일을 보낸 게 언제였나 헤아려 보았다. 꼽아 볼 것도 없이 나는 팔 년이 지났다는 걸 안다. 팔 년. 초등학교에 입학한 꼬마가 사춘기의 절정을 보내고 있을 시간. 큼직하게 맞춘 교복을 입은 중학생이 전방을 지키는 군인 아저씨가 되어 있을 시간. 그때는 영원처럼 느리던 시간이 언제부턴가 차창 밖 풍경처럼 휙휙 지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든다는 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기하던 풍경이 익숙해지고, 조금씩 아무렇지 않아지다가, 결국 서서히 권태롭게 표정이 굳어 가는 것.

팔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그때도 한참을 망설이다 이메일을 보냈다. 길지도 않은 내용을 썼다 지웠다, 치밀하게 궁리하여 간신히 전송 버튼을 눌렀지만 네가 답장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그랬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해 본다. 네가 꼭 바지 주머니 깊숙이 굴러다니는 모래 알갱이처럼 까끌거려서, 라고 하면 넌 웃을까.

너는 내게 그런 사람이다. 작고 단단하고 까끌대는 결정. 한때는 바윗덩이처럼 숨통을 막았던, 막대한 질량에 눌려 어쩔 줄 모르게 했던, 오랜 세월 깎아 냈으나 아직도 다 털어 내지 못한 모래 알갱이.

그게 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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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나이가 쌓일수록 나는 독재자처럼 나를 검열한다. 감시하고 통제하고 압박한다. 위험한 것들은 상자에 담아 커다란 자물쇠를 철컥 채운다. 불온한 그 어떤 것도 튀어나오지 않게. 잔잔한 웅덩이가 진흙탕이 되지 않게. 간신히 이뤄 놓은 이 온건한 세상을 함부로 뒤집어엎어 버리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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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전 모처럼 틈이 생겨 서점에 들렀다. 외부 미팅 때문에 느긋하게 머물 시간까진 없어서 베스트셀러 코너나 둘러보다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국내에서 꽤 인기 있는 독일 철학자의 신작. 원색을 쓴 표지에서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저자가 아닌 역자의 이름이었다.

혀가 꼬이는 발음의 저자명 오른쪽, 작은 폰트로 박힌 이름을 본 순간 나는 대번에 너인 줄 알았다. 너는 꽤나 흔한 이름이다. 학창 시절 한 학년에 동명이인이 꼭 있었을 정도로 흔한 이름이지만 나는 알았다.

그건 분명 너였다.

설렘과 긴장을 동시에 끌어안고 책 표지를 열었다. 책날개 하단의 역자 프로필에서 너의 근황을 찾아내려 나는 탐정처럼 눈을 빛냈다. 원하던 박사과정은 무사히 마쳤는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 귀국한 건 아닌지.

그리고 너의 이름 아래 박힌 교수 직함을 본 순간, 재직 중인 교명이 너무나 익숙한 것을 알아챈 순간, 너와 나의 모교이기도 한 그 학교가 내가 일하는 곳에서 불과 오 분 거리라는 사실을 돌이킨 순간,

어찌해 볼 겨를도 없이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차분하려 애를 쓰며 계속해 프로필을 살폈다. 네 이름 아래엔 저서 한 권과 역서 여러 권의 타이틀이 나열돼 있었지만 사적인 내용은 전혀 없었다. 남편의 직업이라든가 자녀의 숫자, 얼마나 행복하게 깨 볶으며 살고 있는지 따위의 정보야말로 내가 진정 알고 싶은 내용이었는데도.

건조한 프로필에서 너의 흔적을 찾는 것은 옷 위로 네 몸을 애무할 때처럼 감질이 났다. 너는 감쪽같이 책장 너머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렇게 떡하니 대형 서점에 진열된, 가장 좋은 위치에 여봐란듯이 놓인, 이 책을 발견한 내가 역자 프로필부터 뒤질 줄 분명히 알고 있었을 텐데도 너는 의미 있는 단어 하나 챙겨 넣지 않았다.

한국에 있단 말이지. 교수가 됐단 말이지. 소리 소문도 없이 돌아와 버젓이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단 말이지. 하. 저절로 입술이 일그러졌다. 치사한 계집애. 치사한 여자 같으니라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너는 원래 그런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