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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
이사벨라를 위하여



· 일러두기
본 작품은 꾸며 낸 가상의 이야기로, 실존 인물 및 실제 기관과 관계없는 허구임을 밝힙니다.




1화







Chapter Ⅰ. 에로스

1. 최민주





한번 흘러간 강물이 되돌아온다고? 내가 물었다.

오지 말란 법 있어? 네가 되물었다.

나는 너를 비웃었다. 무슨 연어도 아니고.

너는 계속 억지를 부렸다. 물고기도 돌아오는데.



그 순간에도 우리의 눈앞에서 강물은 흐르고 있었다.

고요한 강.

침묵하는 강.

유유히 흐르는 강.

그 강물 속에 섞여 들던 너의 목소리.

‘돌아와.’

나는 못 알아들은 척, 대꾸하지 않았다.



-



나는 십일월에 태어났다. 가을도 겨울도 아닌 애매한 계절이라 생일날은 매년 날씨가 변덕스럽다. 이른 첫눈이랍시고 진눈깨비가 날린 해가 있는가 하면 봄날처럼 푹해져서 스웨터 소매를 팔뚝까지 걷고 보낸 해도 있었다.

일관성 없고 변화무쌍한 생일의 날씨는 이를테면 내 인생의 전조 같은 게 아니었나 싶다. 휘청휘청, 삐걱삐걱, 갈팡질팡, 중심 못 잡고 덤벙대다 호되게 넘어지는. 경솔하게 달려들었다 보기 좋게 나가떨어지는. 돌이켜 보면, 중요한 길목을 만날 때마다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혹은 조금만 더 용감하게 솔직했더라면, 장담컨대 내 인생은 지금과 사뭇 달랐을 것이다.

간밤에 모처럼 밤샘을 하고 새벽녘에 겨우 잠들었다. 덕분에 이렇게 느지막이 깨어나 반질반질 닦아 놓은 듯 파란 하늘을 본다. 나는 뻑뻑한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였다. 방 세 개짜리 아파트는 몇 달째 고요하다.

올해의 생일은 화창하다.

헤드테이블로 팔을 뻗어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눈뜨자마자 전화기부터 확인하는 건 전 인류가 함께 앓는 의존증이니까. 화면에는 새로 들어온 메일과 메신저 알림 네댓 개가 떠 있었다.

[교수님, 다음 주 강의자료 올려 뒀습니다.]

검지 끝으로 화면을 넘겨 가며 클라우드에 새로 올린 자료를 확인했다. 조교의 솜씨는 취합도 정리도 늘 그렇듯 깔끔하다. 수고했어요. 간단히 답을 보낸 뒤 이메일을 열었다. 주말에 열릴 학회 일정 안내 메일을 건너뛰고 가장 최근 도착한 신규 메일부터 클릭했다.



법무법인 진입니다. 이혼신고 완료됐습니다.



나도 모르게 잠깐 숨을 멈췄다. 활자가 귀에 꽂힌 것 같았다. 변호사의 간결한 말투는 앓던 이라도 뺀 것처럼 속 시원해 차라리 축하 메시지처럼 들렸다.

숙려기간이 끝나고 확인서를 받은 지 두 달이 지났는데도 신고가 미뤄진 것은 순전히 저쪽 변호사가, 공사에 심히 바쁜 제 의뢰인의 스케줄상 도무지 시간 빼기 곤란하다며 뻗댄 탓이었다. 내 변호사는 황당한 눈치를 숨기지 않았으나 나는 그냥 두어라 했다. 삼 년 넘게 함께 산 남자가 원한다면, 그가 내게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이 고작 그 정도의 인내력이라면 그쯤 해 주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삼 개월이라는 신고 시한을 찰랑찰랑 채우고서 하필 내 생일날 접수를 완료한 건 일종의 생일 선물인 건가. 아니면 남은 평생 이혼기념일을 꼬박꼬박 기억하라는 건가. 어느 쪽도 그답지 않았지만, 살다 보면 누구나 답지 않은 짓을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당신은 날 사랑한 적이 있어?’

그가 이혼을 요구했던 날, 대뜸 내민 서류보다 날 놀라게 한 것은 그 질문이었다. 날 사랑한 적이 있어? 남편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말. 그 말이 놀라웠던 까닭은 여러 가지였지만 그중 가장 먼저 나를 건드린 건 그의 목소리였다.

날 사랑한 적이 있어? 어린애 속살처럼 연약하고 말랑한, 무방비 상태의 토끼 같은 그 말에서 나는 분명한 떨림을 들었다. 그로부터 나는 그가 나를 원망하고 있으며, 나로 인해 상처 받았고, 또한 나를 사랑한다고 믿는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날 사랑한 적이 있어?

그건 무척이나 간단하고 쉬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대답하기에 몹시 어려운 질문이기도 했다. 나는 무어라 답하지 못한 채 그의 눈만 마주 보다가 서류 봉투를 받아 책상 끝에 올려 두었다. 반쯤 완성된 논문이 떠 있는, 커서가 깜빡이는 모니터 화면만 쳐다보고 앉은 나를 향해 남편이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당신은 참…… 한결같네.’

그 말만을 남겨 둔 채 몸을 돌려 그는 퇴장했다. 이혼 서류와 나를 남겨 둔 채로 서재의 문을 정중히 닫았다. 그런 상황에서마저 침착한 태도에 나는 속으로 조금 감탄했던가. 끝까지 훌륭한 매너와 온도 없는 대화. 한결같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사 년 차로 접어든 결혼 생활은 그것으로 종료되었다.



-



실패가 두렵지 않은 건 청춘의 특권이다. 등에 짊어진 것이 별로 없을 때, 무릎이 까지고 발목을 삐어도 가벼이 털고 일어설 수 있을 때, 왕성한 회복력이 보장된 그런 시절에나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 노릇을 할 수 있다.

삶의 어느 지점을 지나고 나면 넘어지는 것이 점점 두려워진다. 덤불 같은 생을 지나며 어렵사리 얻어 낸, 자꾸만 늘어나는 등짐을 지고서 아슬아슬 조심스레 걷게 된다. 이제는 한 번의 헛디딤만으로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자각. 그 자각이 생기고 나면 단 한 번의 실패도 충분히 인생의 종말이 된다.

그러니까 솔직히 인정하자면, 나는 조금 두려운 것이다.

나의 두려움이란 누구에게나 그렇듯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들, 어쩌면 영영 벌어지지 않을 일들에 대한 때 이른 걱정이다. 시가의 후광을 업고 얻은 교수 자리를 곧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보수적인 학계에서 이혼 경력이 혹 오점이 되지는 않을까. 이혼한 딸에 대한 친정 부모의 실망과 동정은 또 어떻게 다뤄야 하나.

겉으로는 냉정한 척 담담히 굴어도, 나는 이미 온갖 잡다하고 시시하고 치사한 걱정들을 하고 있었다.

나의 결혼은 대단히 순조로웠다. 맞선이라는, 참으로 구태의연한 그 시장에 진출하자마자 첫 상대로 만난 것이 남편이었으니까. 모난 곳 없는 외모에 나무랄 데 없는 매너를 갖춘 그는 한마디로 잘 재단된 사람이었는데, 무엇보다 학계와 연줄이 없는 우리 집과 달리 대를 이어 교수들이 포진한 학자 집안 출신이었다.

내 눈에 그가 매력적으로 비친 결정적 이유가 현직 국립대 학장인 부친이라는 것을 나는 처음부터 부인할 생각이 없었다. 종신 교수로 정년 퇴임하고 싶다는 장래 희망도 숨기지 않았다. 아닌 척 내숭 떨 재간이 없어 솔직할 수밖에 없던 것을 순수함으로 오해했으니, 그때 남편은 이미 내게 지나친 호감을 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명백한 속물근성이 보기 드문 순박함으로 둔갑한 순간 나는 자연스레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저는 생각하시는 것만큼 괜찮은 여자가 아닐지도 몰라요.’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집에서 결혼을 재촉하시나요?’

‘독신주의자는 아니니까요.’

‘낭만주의자도 확실히 아니신 것 같네요.’

‘죽을 만큼 사랑한다, 그러니 결혼하자, 이런 말을 듣고 싶습니까?’

‘저는 아직 낭만에 미련이 있는 모양이죠.’

‘아시다시피 애정에는 여러 갈래가 있죠. 단기간의 열정에 국한한다면, 사랑은 연애의 충분조건이지 결혼의 필요조건은 아닐 겁니다.’

나는 내가 모르던 시절 남편이 몹시도 뜨거운 사랑을 해 보았다고 확신한다. 제 몫의 열정을 모조리 소진해 버리고 깡마른 껍데기만 남았다고 믿는다. 불가해한 충동. 무모한 정열. 이성과 이지마저 활활 태워 버리는 감정의 불꽃. 그가 결혼 상대로 하필 나를 택한 까닭은 아마 그 또한 내게서 같은 것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가 서로에게 원한 건 유대의 대상이었다. 안정적인 제도로서의 결혼. 애정에 대한 기대도 상실에 대한 걱정도 없는 안전하고 건전한 부부 관계.

‘당신은 날 사랑한 적이 있어?’

그러니 그가 나를 사랑한다 믿게 되었다면, 나로부터 사랑받길 원하게 되었다면, 우리의 암묵적 계약을 위반한 것은 오히려 남편 쪽이다. 당신은 참 한결같네. 어쩌면 그 말은 나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찬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러지 못했는데 당신은 잘 해냈네. 내게서 끝까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네. 나만 혼자 기대하고 또다시 괴로워했네.

‘당신은 참…… 한결같네.’

그는 숙련된 외과의사다. 가망 없다 판단되는 상황에 미련하게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다. 남편은 자신이 변한 것에 당혹한 만큼 내가 변하지 않을 것을 확신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미 돌이킬 수 없도록 변해 버린 관계는 지속될 수 없다.

그가 나를 움키어 시작된 관계는 그가 나를 놓음으로써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