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4화


“여기 보이시죠? 이쪽이 이마, 이쪽이 배, 이쪽이 발. 어? 손들고 있네요. 손가락 보여 드릴게요.”
의사가 초음파 사진을 확대하여 태아의 아직 뚜렷하지 않은 손가락을 보여 주었다.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여준이 옅은 탄식을 내뱉었다.
“와…….”
그 작고 연약한 공간에서 숨을 쉬고 존재하고 있는 아이가 신기했고 힘들고 고달팠을 텐데도 잘 버텨 준 것이 고맙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가도 엄마, 아빠 얼굴이 보고 싶은가 봐요. 얼굴을 이쪽으로 돌리고 있네요.”
“콧날이 정말 날카로운 것 같아요. 그렇죠?”
신이 나서 재잘거리는 여준을 재인은 침대에 누워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같이 일하던 시절엔 늘 침착하고 차가워 보여서 주방의 몇몇 사람들은 무서워하기까지 한 사람이 저렇게 말을 많이 하고 호들갑도 떨 줄 알다니…….
“눈도 크고 다리도 길쭉길쭉하고, 심지어는 발가락마저 예쁘네. 태아가 원래 이렇게까지 예쁜가요?”
“그러게요. 너무 예쁘네요.”
“엄마가 이렇게 예쁜데 애가 예쁜 건 당연한 거죠? 선생님.”
“호호. 그러네요.”
여준의 돌발적인 발언에 재인의 얼굴이 금세 붉어져 버렸다.
“아버님도 너무 잘생기셨어요. 처음 들어올 때 영화배우가 들어오는 줄 알았어요.”
의사의 칭찬에 머쓱하게 웃으며 여준이 모니터로 얼굴을 더 바짝 가져다 댔다. 그 상태에서 여준은 꿈틀대며 움직이는 아기를 한참 동안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았다.
초음파 영상검사를 끝내고 나오자 간호사가 캡처한 초음파 사진을 건넸다. 그 사진이 좋았던 모양인지, 여준은 그 사진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며 애틋하게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가 차에 먼저 도착했고 화장실을 들르느라 재인이 조금 늦게 나왔다. 그리고 오늘도 어제와 다를 바 없이 뒷좌석에 올라타는 재인의 벨트를 매 주고 담요를 덮어 주고 나서야 여준은 운전석에 올라탔다.
“널 닮았다면 정말 예쁠 거야. 자꾸만 보고 싶어서 아무것도 못 하게 돼 버리면 어쩌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얼굴 가득 스며든 여준이 물었다. 하지만 재인은 아가가 자신보다는 여준을 닮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코도 더 높고 얼굴도 더 작고 팔다리도 쭉쭉 뻗은 여준을 말이다.
“출발할게.”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태아 사진과 재인의 얼굴에서 시선을 간신히 떼어 낸 여준이 모는 차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여준의 배려를 한없이 느끼며 상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진 밖을 쳐다보던 재인의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며칠 동안 꺼 놨다가 진료실로 들어가기 몇 분 전 동생에게 여준과 함께 집으로 가고 있다는 문자를 보내면서 켜 뒀던 것이다.
- 누나!
전화를 받자마자 고막을 터트릴 것 같은 남자의 고함 소리에 여준이 의문을 가지며 백미러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재인이야 워낙에 익숙했지만 여준에겐 생소한 일이니 보이는 반응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디야, 너?”
- 누나 문자 보자마자 화끈하게 조퇴 내고 집으로 가는 중.
“뭐!? 미쳤어? 학교 조퇴는 왜 해?”
- 내가 미리 집에 가서 아빠한테 누나 온다고 귀띔도 좀 해 주고, 그리고 엄마 화나면 유일하게 말릴 사람이 누가 있어? 5대 독자인 나밖에 더 있어?
“그래도 그렇지.”
- 그분하고 오는 거 맞지?
“어? 어.”
- 그럼 그분이 이제 내 매형이 되는 건가? 맞지, 호칭? 매형?
밀폐된 차 안에 워낙 큰 재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예기치 못하게 재현의 입에서 나온 ‘매형’이라는 말에 재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볼륨을 낮추려 했지만 어느새 갓길에 차를 세운 여준이 뒤를 돌아 재인과 눈을 마주친 후였다.
매형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낯선 명칭과 아직 명확하게 정리되지 못한 관계에 어딘가 모르게 부끄럽기만 한 재인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집에 엄마랑 아버지 다 계셔?”
- 다 계셔. 누나 그렇게 뛰쳐나가고 엄마 앓아누우셨거든. 그런 엄마 걱정돼서 아버지는 며칠 동안 가게 문 닫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꾹 다문 입술을 비집고 저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엄마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못된 계집애라는 것을 알면서도 재인은 여전히 배 속에 아이를 지울 생각이 없었다.
- 어쨌든 매형 될 그분한테 우리 집 올 때 사 들고 올 것들은 맞아도 좀 덜 아픈 걸로 사 오라고 해 줘. 특히 엄마가 좋아하는 사과나 배, 이런 거 사 오면 자기가 고생할 거라고 말해 주고. 웬만하면 작은 과일들 있잖아. 포도나 딸기 이런 거. 이런 걸 사 와.
재현의 농담 같은 걱정을 들으며 전화를 끊은 재인이 앞에 앉아 있는 여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금세 불안감이 스며든 것을 여준은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 못한 말들을 가슴 깊숙한 곳에 응어리로 남겨 스스로를 자책할 모습을 생각하니, 여준은 마음이 미어지게 아팠다. 그래서 더 웃어 주고 싶었다. 나는 괜찮다고. 나는 상관없다고.
“어머니가 포도나 딸기 좋아하셔?”
“아니요.”
“그럼?”
“사과랑 배를 많이 좋아하시긴 하는데…….”
“그럼, 그걸로 사 가자.”
왜 솔직하게 말했을까? 그냥 포도나 딸기 좋아한다고 할걸. 후회하는 재인의 시야로 여준의 차가 천천히 다시 도로로 들어서는 것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차는 언제나 따뜻했던 공간에서 무서운 곳으로 바뀌어 버린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중간에 내려 시장을 들러 품질이 좋고 가장 비싼 사과와 배를 골라서 샀다. 그것도 매우 많이 샀다. 재인은 여준이 들고 있는 상당한 양의 배와 사과가 엄마의 손에 의해서 그의 고운 얼굴로 날아올 것을 예감하며 노심초사한 눈길로 보느라 정신없었다. 하지만 여준은 덤덤하게 과일들을 차에 싣고 재인의 집 앞까지 왔다.
하지만, 막상 집 앞에 와서 느껴지는 살벌한 한기에 여준이 마른침을 몰래 삼켰다. 추운 날씨로 인해 더욱 차가워 보이는 회색빛이 감도는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안에서는 욕을 퍼부으며 무언가를 때려 부수는 듯한 소리가 여과 없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재현이 도착해 말을 전해 놓은 모양이었다.
“오기만 해 봐. 내가 그놈! 사지를 다 찢어 놔 버릴 거야! 여기가 어디라고! 뭘 잘했다고 찾아온대! 뭘 잘했다고! 그 어린애를 가지고! 내가 생각만 하면 열불이 다 나서! 못된 놈!”
여준이 겸연쩍게 웃었다. 멀쩡한 사지가 찢어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아픔이 몰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배를 너무 큰 걸 골랐나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의향은 없었고 부딪히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한 그날 밤에 대한 후회는 없으니 지금 이곳에 온 것 또한 후회는 없다.
“여보! 그건 안 돼! 그거 비싼 거잖아! 그냥 내려놔요. 응?”
“내가 못 살아! 내가!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여보…….”
절규하는 숙자를 만류하는 아버지, 동봉의 소심한 목소리가 한데 엉켜 들려왔다. 재인은 겁이 나 죽을 것 같았다. 저게 싫어서 도망친 건데. 또다시 부딪힐 생각을 하니 자신이 없었다.
재인이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현관문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자, 여준이 어깨를 꽉 감싸 안았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들어가자.”
“저…….”
지레 겁을 먹은 재인이 여준의 옷자락을 살짝 부여잡고 끌어당겼다.
“그냥 가지 말까요? 그래요. 가지 말아요, 우리. 그냥 집으로 가요.”
급기야 재인이 여준의 품에서 벗어나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재인아.”
“저 걱정돼요. 그래서 여기 온 거 지금 후회하고 있어요. 어쩌면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질지도 몰라요. 그때 다시 와요, 우리.”
여준은 적어도 그녀가 자신과 함께하겠다고 온 순간부터는 더 이상 그녀를 위태로운 경계선에 방치해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아니. 들어가야 돼.”
그랬기에 언젠가가 아닌, 지금 당장 꼭 부딪혀야 할 일이었다. 재인이 좀 더 편안하고 안전한 곳에서 몸을 살피기를 간절히 바라는 여준은 배를 들고 있지 않은 다른 손을 뻗어 재인의 붉은 뺨을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떨어지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난 지금까지의 일들 중 단 하나도 후회하는 것이 없어. 그러니까, 여기 온 것도 후회 안 해.”
“…….”
“어머니께서 그러시는 거 당연한 거야. 그러니까 절대로 어머니한테 말대꾸해서는 안 돼. 알았지? 그리고 어머니가 뭘 던지셔도 가만히 있어야 돼. 알지? 나 맷집 좋은 거.”
재인의 손목을 들어서는 자신의 어깨 언저리를 툭툭 치며 꿈쩍 안 한다는 것을 보여 준 여준이 씩 하고 웃었다. 자꾸만 줏대 없이 코끝이 시큰해진다. 벌써부터 약해지면 안 되는데, 무너져 버리면 안 되는데, 더 강해져야 하고 더 단단해져야 하는데.
“춥다. 들어가자.”
재인의 뺨에서 거두어진 여준의 손이 그대로 재인의 손을 꽉 잡았다.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라는 듯, 빠져나갈 틈도 없이 꽉 잡았다.

“일단 들어오게.”
길길이 날뛰는 숙자를 말리느라 기력을 다 쏟아부은 동봉의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준은 공손하게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정중히 인사를 했다.
“이렇게 찾아 뵙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여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오른 숙자가 벌떡 일어나 득달같이 소리쳤다. 여준은 신발을 막 벗으려다 말고 멈췄다.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요! 이딴 거 사 오면, 내가 아이고 좋네! 우리 딸 데려다가 잘 사세요, 할 줄 알았어요?”
숙자가 보란 듯이 여준의 코앞에서 과일 바구니를 탈탈 털었다. 큼직하고 둥근 배와 사과들이 거침없이 대굴대굴 굴러 여준의 발치 쪽으로 나동그라졌다.
“엄마!”
미처 말리지 못한 숙자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재인이 반사적으로 발을 떼어 냈지만 곧 여준에게 제지당했다.
“재인아.”
여준은 한쪽 팔로 재인의 앞을 막고서는 그러지 말라고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재인은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꽉 깨물고 주먹을 꽉 쥐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아, 엄마는. 대체 먹을 거 가지고 왜 그러시는 거예요…….”
재현이 눈치를 살피며 엉금엉금 기어가 텅 비어 있는 바구니에 배를 주워 담으며 눈치를 살폈다.
“매형이 엄마 생각해서 아주 싱싱하고 비싼 걸로만 골라서 사 온 거 같은데…….”
재현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숙자는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내려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와, 크다! 이건 무슨 메론 같네! 엄마, 이거 봐. 깎아 먹으면 시원하고 맛있겠다. 그치? 매형이 엄마 기분 좋으라고 사 온 거야.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재현이 큼직한 배를 들자마자 숙자가 거칠게 뺏어서는 여준에게 냅다 집어 던져 버렸다. 큼직하고 단단한 배는 숙자가 분개한 무게만큼이나 육중하고 거칠게 날아와 여준의 어깨를 치고 바닥으로 툭 떨어져 박살이 나 버렸다.
여준은 피하려고만 했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피하지 않고 거세게 날아온 배를 일부러 맞았다.
이렇게 해서라도 장모님의 노여움이 풀릴 수 있다면 지금 바닥에 뒹굴고 있는 배와 사과를 다 맞는 것은 물론이고, 던질 것을 더 사다 드릴 수도 있었다.
“아, 엄마!”
재현이 기겁하며 여준의 곁으로 다가가 안절부절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딸아이 곱게 키워 놨더니, 형식적인 의례도 없이 애를 가지고 들어오지를 않나, 나가라고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진짜 나가 버리지를 않나! 재인의 부모에 대한 배신으로 억장이 무너져 내린 숙자는 더 이상 그 감정을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지 해 달라는 거 다 해 주지는 못했어도 지 사 달라는 거 다 사 주지는 못했어도! 불면 꺼질까, 쥐면 사라질까 금이야 옥이야 키웠다고! 그런데, 그런 엄마한테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네가!”
가슴이 미어지는지, 주먹으로 가슴 쪽을 퍽퍽 치며 울부짖는 숙자를 보며 재인 역시 꾸역꾸역 참고 있던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때, 여준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환영받지 못해서 차마 거실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로 냉랭하며 딱딱한 현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고개를 조아렸다. 지저분한 현관의 신발들 사이에 머리가 닳도록 조아리고 또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숙자가 앉은 자리에서 발버둥 치며 통곡했다.
“내 명에 못 살아. 내가! 내가!”
“당신이 왜 못 살아……. 손주도 보고 저렇게 훤칠한 사위도 얻었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좋게 좋게 생각합시다, 우리.”
목소리가 확 쉬어 버린 동봉의 달램에도 숙자의 울음은 끊길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에도 재현은 또다시 숙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있는 대로 과일을 집어 던질세라 그녀의 어깨를 살짝 누르며 달랬다.
“그러니까 엄마가 왜 못 살아. 저렇게 반듯한 사위 얻고 귀여운 손주 재롱떠는 것도 봐야 되는데. 저러다가 매형 이마 닳겠어. 엄마…….”
재인이 그만하라고 애원하고 싶을 정도로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던 여준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동봉이 이제 그만하라고 막 말리려던 참이었다.
“죄송하다는 말은 딱, 이번 일 하나로만 하겠습니다.”
여준이 반쯤 고개를 들고 차분하게 말했다.
“앞으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죄송할 일이 없도록 재인이에게도…….”
살짝 고개를 더 들어 불안하면 나오는 증세로 손톱을 탁, 탁. 소리 내 만지고 있는 재인을 눈에 담아 넣었다.
“어머님, 아버님에게도 처남에게도 잘하겠습니다. 제가 잘하겠습니다.”
여준은 재인의 아버지, 어머니, 동생을 차례대로 바라보며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재인은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바득바득 참고 있었다. 그리고 배를 부여잡고 머리로 억지로 좋은 생각만 했다. 아가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되니까 아가가 울면 안 되니까.
숙자는 목에 핏줄을 세우고 집이 떠내려가라 우짖듯이 울던 것을 은근슬쩍 그치고선 원망스러운 눈으로 있는 힘껏 여준을 노려보았다.
틈조차 보이지 않는 여준의 강한 결단이 딸로 인해 갈기갈기 찢기고 문드러져 있는 상처를 오히려 위로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숙자는 눈물을 참으려고 턱을 실룩거렸다.
“절 믿어 주시고 재인이와의 결혼, 허락해 주세요.”
간절한 자신의 심정이 닿길 바라며. 여준이 또다시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

플라스틱으로 된 원형 탁자가 일정한 간격 없이 아무렇게나 비치되어 있는 동네 포장마차에 자리를 잡고 앉은 동봉은 여전히 긴장감을 풀지 못한 표정이 역력한 여준의 앞에 놓인 잔에 술병을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나이도 모르고 있네.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나?”
“32살입니다.”
“적당한 나이구만, 자네는.”
두 손으로 공순하게 술잔을 받고 동봉의 잔을 채워 준 여준이 건배를 하고 몸을 옆으로 틀어 술을 단박에 쭉 들이켰다. 술이 쓸 만도 한데, 미간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앉아 있는 여준을 동봉은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짙고 위로 뻗은 눈썹하며 쌍꺼풀 없는 야무진 눈매와 반듯하게 뻗은 오뚝한 코, 무표정임에도 불구하고 웃고 있는 것처럼 살짝 치켜 올라간 입술. 누가 보아도 부정하지 못할 잘생긴 외모였다.
10개월 전쯤인가, 재인이 남자친구라고 데리고 왔던 놈은 괴상스런 샛노란 머리카락에 귀를 뚫은 모양새를 하고는 밥 먹는 내내 다리를 떨어 댔다. 심지어 담배 찌든 냄새까지 났던 그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다.
“요리를 한다고 들었는데, 어디서 일하고 있는 건가?”
“이태리 레스토랑입니다.”
“이태리 레스토랑……. 기업에서 하는 곳인가?”
“아닙니다. 개인 사업입니다. 아는 형이 사장으로 있는 곳입니다.”
“그렇군. 개인 사업이라면 안정적인 직장은 아니겠어. 요즘에 하도 불황이라고 해서 문을 닫는 가게가 하루에도 몇 백 개가 된다고 하더라고. 장사는 잘 되나?”
“네. 불황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제가 오고 나서부터 줄곧 매출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년도에 3호점을 오픈할 예정입니다.”
동봉은 자신의 말이 기분 나쁠 법한데도 웃음을 잃지 않고 대답하고 남자로서 가져야 할 자신감까지 겸비한 여준이 오늘 처음 봤는데도 참 마음에 들었다. 동봉은 술병을 들어 여준의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우며 넌지시 물었다.
“그래. 우리 재인은 어떻게 만났었나?”
“그전에 일하던 레스토랑에서 만났습니다.”
“전에 일하던 레스토랑이라면, 우리 재인이 남자친구가 있었을 때였는데.”
“네. 그래서 뒤에서 혼자 아무것도 못하고 끙끙거렸습니다.”
동봉이 고개를 나지막이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아기까지 가지게 된 거냐고 묻고 싶은 것을 애써 침묵했다. 아무리 자기 자식이고, 원하지 않게 사고를 친 예비 사위지만 그들에게도 지켜야 할 프라이버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자네, 아까 죄송하다는 말은 딱 이번까지만 하겠다는 그 말 지킬 수 있는 거지?”
“네. 두 번 다시는 죄송하다는 말로 어머님과 아버님 실망시켜 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동봉은 처음 집에 들어오는 순간 보았던 여준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탁하지 않고 반짝반짝 빛나며 거북하지 않고 깊게 빠져드는 그 맑은 눈빛이. 그래서 그가 고개를 들고 있을 때면 계속 그 눈빛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 약속 꼭 좀 지켜 주게.”
“네. 걱정 마세요, 아버님.”
“아버님은 무슨 일 하시나?”
이제 곧 딸과 결혼할 사위이니 기본적인 것들은 알아야 된다고 생각한 동봉은 망설이지 않고 물어보았다.
“저 10살 때쯤, 차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아…….”
하지만, 곧 그것이 실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봉이 머쓱해하며 미안하게 바라보자 그게 더 마음에 걸리는 여준이 입가에 웃음을 크게 걸쳤다.
“그래서 늘 아버지가 그리웠는데, 아버님을 아버지처럼 따르고 싶습니다.”
“허허. 좋네, 나는! 그럼 나는 사위도 얻고 아들 하나 더 얻는 건가?”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저야 너무 감사드리죠.”
어머님은 살아 계시나? 묻고 싶었으나, 더 뭔가를 물었다가 또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다른 것들은 차차 물어보기로 하고 동봉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부인에게도 잘하지 못하고 딸인 재인에게도 하지 못했던, 오래도록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말이다.
“내가 우리 재인이 어렸을 때는 사업이 꽤 잘돼서 부족한 거 없이 키워 보려고 했는데, 친구 보증을 잘못 서 주는 바람에 살던 집도 뺏기고 갖고 있던 상가도 뺏기면서 쫓겨나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지. 그때 우리 재인이 나이가 고작 5살이었어.”
여준은 먹먹하게 동봉의 말을 들었다.
“찜질방 전전하면서 곰팡이 잔뜩 껴 있는 여관에서도 묵다가 하는 생활이 이어졌지. 우리 재인이 5살엔 1년 내내 감기가 떨어지질 않았어. 미안했지, 참.”
동봉은 그때의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나날이 떠올랐는지, 씁쓸한 표정으로 빈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확 치솟아 오른 서글픔이 예비 사위 앞에서 절제되지 못하고 터져 버렸다.
“바쁘면 바쁘다고, 쉬면 피곤하다고 핑계 대면서 아빠 노릇 한 번 제대로 못 해 줬어, 내가.”
울컥함이 목을 타고 넘어와 끝내 눈물을 머금기 시작했다. 그런 동봉을 여준은 말없이 안타까움이 서린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울고불고 떼쓰는 애를 내가 때렸어. 참 모자라고 못난 애비지, 내가.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여기가 싸한 게. 여태 그게 마음에 걸리고 또 걸리네.”
동봉은 제 가슴 언저리 쪽을 어루만졌다. 자신의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부인과 자식을 고생시킨 것이 한이 되었는지, 동봉은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볼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에 화들짝 놀라, 고생해서 나이에 비해 주름이 많이 진 손등으로 눈물을 허겁지겁 닦아 냈다.
“내가 주책이야. 창피하게 예비 사위 앞에서 눈물이나 흘리고.”
“주책도 아니시고 모자라고 못난 분도 아니십니다. 재인이가 저렇게 예쁘고 예의 바르고 곱게 자라난 것에는 다 훌륭한 아버님과 어머님의 공이 크시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옛날 일을 더 이상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제가 재인이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여준을 보며 동봉은 기분이 좋아져 큰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
“꼭 젊었을 때 나를 보는 거 같네.”
“제가 그 정도로 잘생겼습니까? 아버님.”
웃자고 던진 말을 여준이 넉살 좋게 받아치자 동봉은 기분이 더 좋아져 술을 채우고 단숨에 마셔 버렸다.
“어! 딱 잘생긴 게 날 보는 거 같아, 날. 거울인가? 하하하!”
동봉이 여준의 볼을 양손으로 꽉 감싸고 호탕하게 웃으며 좌우로 살짝 흔들었다.
“아버님 젊었을 때 같다고 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영광까지야. 하하.”
여준은 그대로 동봉에게 얼굴을 내어 주며 크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재인이 그 녀석이 남자 보는 눈은 좀 있어. 그치? 기분 좋으니, 술 한번 쭉 따라 봐.”
여준의 볼에서 손을 떼어 낸 동봉이 빈 잔을 높게 치켜 올렸다. 쌀쌀하다 못해 옷을 목 끝까지 여며야만 하는 추운 겨울밤이 동봉과 여준, 오로지 두 사람에게는 따뜻한 밤이 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