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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슬금슬금 몰려드는 맛있는 냄새에 재인이 살며시 눈을 떴다. 주위가 어두컴컴한 것이 벌써 밤이 찾아왔는가 보다. 티끌 하나 묻어 있지 않은 깨끗한 화이트 계열의 벽지가 눈에 띄었다.
언제나 눈을 뜨면 야광별 스티커가 박혀 있는 자신의 방 천장이 보였다. 요 며칠 사이에는 눈을 뜨면 시멘트색의 찜질방 천장이었다. 몇 십 년을 봐 오던 집 천장에 비하면 낯설긴 하지만 찜질방 천장처럼 막막하진 않았다. 눈을 옆으로 돌렸다. 썰렁하다고 느낄 정도로 깔끔한 방이었다.
이곳인가? 그의 공간. 재인은 주위를 살폈다. 화이트 계열의 벽지, 브라운 액자에 들어가 있는 흑백 풍경 사진, 널찍한 창문, 깔끔한 서랍장 위, 그리고 그 위를 채우고 있는 귀여운 피규어 인형들. 모든 것이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어 보였고 모든 것이 깔끔하고 완벽한 그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푹 자서 개운함을 느끼며 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따뜻하게 푹 잤는지, 온몸이 땀으로 젖어 축축했다.
“이불을 빨아다 줘야 하나.”
그에게 축축하게 젖은 이불을 들키는 것이 쑥스러웠고 부끄러웠다. 이불을 걷고 일어난 재인이 어색한 걸음으로 걸어가 문을 살짝 열었다.
아담한 2인용 식탁에 음식을 꽉꽉 채운 그가 한 의자에 방석을 깔고 있었다. 굳이 따지고 묻지 않아도 그 자리가 재인, 자신의 자리가 될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
재인의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에도 여준이 반사적으로 행동했다.
“일어났어? 배고프지.”
여준이 돌돌 만 이불을 꽉 안고 있는 재인을 발견했다.
“추워?”
“아, 아니, 추운 건 아닌데. 그냥 좀 젖어서. 제가 빨게요.”
“아니야. 그러지 마.”
여준이 재인에게로 다가와 이불을 가져갔다.
“푹 잘 잤어?”
“네. 잘 잤어요.”
“그래. 푹 자고 일어나면 난 배고프던데. 너도 배고…….”
“좀 씻고 싶은데…….”
밥과 국이 식기 전에 먹었으면 좋겠지만 땀에 흠뻑 젖어 있는 그녀가 씻는 것을 먼저 하고 싶어 한다면 그렇게 해 주는 것이 마땅했다. 식은 밥과 국이야 다시 한 번 데우면 그만인 것이니까. 여준은 식탁 앞에 서 있다가 화장실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럴래? 좀만 기다려. 물 받아 줄게.”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이 정도는 내가 해 주고 싶은데. 너한테도.”
여준의 애틋한 시선이 재인의 배 쪽으로 향했다.
“내 아이에게도.”
재인이 몰려드는 쑥스러움에 배를 감쌌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갈아입을 옷 챙겨 와. 물 받아 놓을게.”
마지막 말과 함께 여준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재인은 소파 위에 있는 제 가방으로 향했다. 억지로 꾸역꾸역 넣은 옷들을 꺼내니 구깃구깃한 것이 아주 꼴 보기가 싫을 정도였다.
깔끔한 그의 성격에 이런 구질구질한 옷을 보면 얼마나 한심스러울까? 재인은 최대한 구김살이 없는 옷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며칠 동안 찜질방에서 머물었기에 마땅한 옷이 없었다.
찝찝하지만 그렇다고 옷을 안 입고 있을 수도 없고 그에게 옷을 달라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니.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선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라벤더 향의 입욕제를 녹이고 있는 여준의 모습이 보였다. 신중하게 입욕제를 붓던 그가 쓰읍 하고 숨을 들이마신다.
“다 부어야 하나?”
생각보다 나지 않는 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들고 있는 통을 냅다 들어 부으려던 찰나였다.
“어!”
여준의 돌발적인 행동에 재인이 화들짝 놀라자, 여준 역시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왜! 배 아파?”
“아, 아니요, 그게 아니고. 그거 다 부우면 향이 너무 진해질 텐데……. 그 정도면 될 거 같아요.”
“그런가. 이런 걸 써 본 적이 없어서.”
여준이 살짝 실없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에 매달려 있는 칫솔을 가리켰다.
“분홍색이 네 거야. 천천히 씻고 나와.”
여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재인을 지나쳐 나갔다. 재인의 시선이 거울에 매달려 있는 자신의 분홍색 칫솔로 향했다. 그리고 그 옆에 붙어 있는 파란색 칫솔을 빤히 바라보다가 가지런히 접혀 있는 수건과 새것으로 보이는 여자용 스킨과 로션도 발견했다. 자신이 잠든 사이에 사 온 모양이다.
재인이 스킨로션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이 쓰던 건 아니지만 분명한 건 자신이 쓰던 것보다 훨씬 더 비싼 화장품이라는 것이다.
화장품에서 손을 떼어 낸 재인은 은은한 라벤더 향이 나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입욕제를 써 본 적 없다고 했으니 이 향기로운 입욕제도 그녀를 위한 선물일 것이다.
따뜻한 물에 기분이 나른해졌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재인은 자신의 몸을 물 속 깊이 더 담갔다.

“먹자.”
실로 이것이 얼마 만인가? 제대로 된 집에서 제대로 된 밥을 먹는 것이 말이다. 찜질방에서 매일 구운 계란 아니면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육개장 같은 것만 먹어 신물이 난 참이었다.
재인은 낯가림 따위도 잊고 당장이라도 숟가락을 들어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망설여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먹고 싶은 게 없어?”
걱정스럽게 묻는 그의 질문에 재인이 수그리고 있던 얼굴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제가 여기 온 거 많이 당황스러우시죠?”
샤워를 하는 내내, 생각해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단 하루의 실수로 임신을 해서 책임지라고 짐까지 싸 들고 쳐들어온 자신을 그는 귀찮아할지도 모른다. 그에게 자신과 아이를 억지로 떠맡기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받아 주고 있지만 그 마음이 변하여 언젠가는 자신을 버리고 훌쩍 사라져 버릴지도 몰랐다. 그래서일까. 그에게 또 한 번 듣고 싶었다.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라 또 듣고, 듣고 싶을 때마다 또 듣고 싶었다. 지켜 주겠다는 그 말을.
“아니. 당황스럽지 않아.”
“그럴 리가 없잖아요.”
“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반가울 리도 없잖아요. 무언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건, 두려운 거니까…….”
재인이 차마 크게 말하지 못하고 옹알이처럼 중얼거렸다.
“네가 나를 찾아와야 하는 건 당연한 거였어.”
재인이 푹 수그린 자신의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여준의 목소리에 무릎 위에 두었던 손을 꽉 쥐었다. 당연하다고 말해 주는 그에게 끝도 없이 고맙지만 왜 그런지, 그 고맙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재인아.”
재인이 꽉 쥐고 있던 제 주먹에서 시선을 거두어 자신을 부르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오묘하다.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에도 잠시 스쳤던 그 눈빛처럼. 회식 자리에서도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봤던 그 눈빛처럼. 키스를 하던 자신을 뿌리치지 않고 힘껏 안아 주며 바라보던 그 눈빛처럼. 그의 눈빛은 여전히 묘했다.
“그래서 나는 너한테 고마워.”
그의 입술이 살포시 떨어짐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재인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를 잊지 않고 나를 버리지 않고 찾아와 준 너한테.”
뜨겁지만 차가운 눈물들이 막 샤워를 하고 나와 뽀얀 그녀의 볼을 타고 내려왔다. 아무 색도 첨가되지 않은 무표정이었던 여준의 입가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질 것 같은 미소가 스며들었다.
“고마워. 나는.”
재인은 멈추어지지 않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 주는 여준의 손을 꽉 잡았다. 여태 온몸을 장악하고 있던 불안감의 일부분이 녹아 안도되었다. 목이 꽉 메어 간신히 입술을 떼어 냈다.
“저도. 저도 고마워요.”
그의 손을 매만지고 또 매만졌다. 거칠하고 투박하지만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는 손길만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여준의 손을 그렇게 한참 동안 어루만졌다.

진한 갈색의 틀로 나누어진 영롱한 달빛이 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방 안의 고요함과는 다르게 그 갈색 창문을 두들기는 바람 소리가 상당했다.
밖은 추울 것이다. 자신이 짐을 싸 들고 무작정 집을 뛰쳐나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막연하게 헤매던 날도 그랬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그 싸늘함에 방치되어 있지 않다.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이곳은 따뜻하다. 자신이 누워 있고 여준의 향기와 온기가 묻어 있는 이곳은, 그리고 앞으로 그와 함께 있게 될 이곳은. 꿈이라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누군가가 억지로 끌어낸다면 악착같이 버티면서 나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온화하고 안락했다.
재인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을 몸을 뒤척였다. 그러자 으깨고 싶을 만큼 복잡한 생각과 심경들이 재인을 억눌렀다.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다만, 도망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기왕 아이를 낳는다면 모두에게 축복을 받으면서 아이를 낳고 싶었고 모두가 사랑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그에게 말해 볼까? 반대가 극심한 우리 엄마를 어떻게든 설득시켜 달라고. 그러는 과정에서 그가 쉽게 포기해 버리면? 목에 핏대를 세우고 반대를 하며 그에게 달려드는 엄마에게 지치고 지겨워져서 두 손 두 발 다 들어 버리면? 자존심을 내세우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면?
도통 쉽게 떨어지지 않는 심란함에 재인이 뜨거운 숨을 후, 하고 내 쉬었다.
“그만, 그만.”
나쁜 생각은 태아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의사에 말마따나 나쁜 생각은 일단 거두기로 했다.
혼자 끙끙거린다고 될 일도 아니니, 내일은 하나밖에 없는 남매인 남동생에게 전화를 해서 버거 세트를 미끼 삼아 집안 분위기가 좀 어떤지 탐색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낮잠을 너무 많이 잤나.”
나른한 몸이 포근한 이불에 감기는 느낌이 좋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온 신경이 거실로 쏠렸다.
“잠이 안 와.”
혼잣말을 내뱉으며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던 재인이 저를 덮고 있던 이불을 거두어 내고 침대에서 막 내려오려던 참이었다.
“잘 자고 있나…….”
방 쪽으로 다가오는 여준의 미세한 중얼거림과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난 김에 들어오면 담담하게 맞이하면 될 것을 재인은 저도 모르게 침대에 얼른 돌아가서 누워 잠을 자는 척을 했다. 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그리고 그가 들어왔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여준은 아까 재인이 나가려고 걷어차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이불을 집어 들어 다시 꼼꼼히 덮어 주었다. 그리고 침대 귀퉁이에 살짝 걸터앉아서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얼굴을 가리고 있는 재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 주었다. 재인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도통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미칠 것만 같았다.
왜, 괜히 쓸데없이 자는 척을 해 가지고……. 뺨에 살짝 스친 그의 손끝이 오랜 주방 생활로 인해 까칠했지만 결코 거북스럽지 않았다.
“잠이 안 와. 네가 자꾸만 보고 싶어서.”
피곤함이 역력한 그의 목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내일은 나랑 같이 애기 보러 산부인과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고, 그리고…….”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무슨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지, 재인은 실눈을 뜨고 몰래 쳐다보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어머님이랑 아버님 뵈러 가자.”
녹녹한 그의 음성이 여태 혼자 끙끙 앓고 있는 재인을 위로하고 다독여 주기라도 하듯 보드랍게 들려왔다. 그는 다시 한 번 재인을 덮고 있는 이불을 다듬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자, 재인아.”
여준이 소란스럽지 않은 발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고 멀찌감치 사라지는 그의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재인이 눈을 떴다. 그의 손이 잠시 머물었던 머리를 매만졌다.
“우리 부모님을 뵙고 나서도 이렇게 내 머리를 매만져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치? 아가야.”
재인은 살짝 불룩한 자신의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간절하게 바랐다.
아가, 제발 엄마와 아빠가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렴! 하고 말이다.



2.


감은 눈 위로 찾아온 다사로운 햇살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는지 재인이 잠에서 깨어났다. 찌뿌드드한 몸을 공중으로 쭉 폈다. 그러고선 조심스럽게 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잘 잤어? 엄마는 잘 잤어. 엄마가 원래 엄마 집 말고는 잠을 잘 못 자는데, 여긴 많이 편한가 보다. 푹 잘 잔 것 같아.”
어색했지만 싫지 않은 혼잣말이었다.
“고장 났나……. 아! 아, 뜨거워.”
방문을 사이에 두고 어수선한 여준의 기척이 들려왔다. 몽롱하게 자리 잡고 있던 잠이 여준의 옅은 고함 소리에 순식간에 확 달아나 버렸다. 재인이 방에서 나오자 거실에서 담요를 깔아 놓고 엉성하게 다리미로 정장 바지를 펴고 있는 여준이 보였다.
“큼.”
재인이 괜한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심혈을 기울여 정장 바지 펴는 것에 집중하고 있던 여준이 고개를 돌렸다.
“잘 잤어?”
그가 무엇을 하고 있고 그것을 왜 하고 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았기에 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준의 곁에 와 앉았다.
“제가 해 드릴게요. 이리 주세요.”
“뜨거워서 위험해.”
“제가 보기엔 셰프님이 하는 게 더 위험해 보이는데…….”
“나 뜨거운 거에 강해. 맷집도 좋고.”
“안 그래도 오늘 가서 엄청 두들겨 맞을지도 모르니까 지금은 몸 조금 사리고 계세요.”
살벌한 말들을 아무 표정 없이 하는 재인에 여준이 놀라 몸이 얼음처럼 굳어져 버렸다. 여준이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데도 그 모습이 살짝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인은 여준의 손에 잡혀 있는 다리미를 뺏었다.
“오늘, 너희 집에 갈 거야.”
“알아요.”
“어떻게?”
“잠결에 얼핏 들었어요.”
“그럼, 내가 들어가서 말한 걸 다 들었다는 소리가 되나?”
“네. 얼핏.”
당황했는지, 여준은 벙찐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재인은 다리미질을 멈추지 않고 조바심을 감추며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저희 엄마 화 많이 나셨어요. 각오 단단히 하셔야 해요.”
능숙하게 옷을 펴는 재인의 손길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는 여준의 얼굴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응.”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크게 결심한 모양인지 야무진 표정을 짓고 꼭 쥔 주먹으로 여준이 제 어깨를 툭툭 쳤다.
“저희 엄마 진짜 때리실지도 몰라요.”
“가짜로 때리시면 좋겠지만 진짜 때리시면 진짜 맞지 뭐.”
“안 무서워요?”
“응.”
담담하게 대답하는 여준이 재인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안 무서워요? 난 맞기 싫어서 도망 나왔는데…….”
“사실, 하나도 안 무섭다는 건 거짓말인데. 근데…….”
근데요? 하고 재인은 말 대신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지금 나한테는 너랑 떨어진다는 게 더 무서워. 그래서 그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참아 낼 수 있어.”
솔직한 심정으로는 왜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잘해 주는지 묻고 싶었으나, 은연중에 원하고 있는 대답을 듣지 못할까 봐 겁이 났고 옹졸한 의심으로 그를 실망시킬까 봐 걱정되었다.
나중에, 조금만 더 이따가 물어봐도 늦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지금, 그가 해 주는 이 배려가 싫지 않고 지금으로써는 가장 큰 위로가 되니까.
재인이 바지 펴는 것에 집중을 했다. 그러자 어느샌가 찾아온 이 무거운 침묵이 여준은 싫었다. 그녀를 보면 자꾸만 말을 걸고 싶고, 자꾸만 그녀의 눈을 마주하고 싶고, 자꾸만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고 자꾸만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재인아.”
“네.”
“근데 셰프님 말고 다른 걸로 불러 주면 안 돼?”
“어떤 걸로요?”
“음…….”
그가 살짝 고민하는 척하다가 망설임 없이 입을 떼어 냈다.
“오빠?”
활짝 웃으면서 말했는데, 재인이 별로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자 여준이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꾸만 속으로 드는 욕심을 쉽게 버릴 수가 없었기에 여준은 고개를 살짝 기울여 용기를 냈다.
“아니면…….”
여준이 잠시 숨을 고르다가 최대한 가볍게 들릴 만한 톤으로 입을 열었다.
“자기?”
이번 역시 반응이 좋지 않다. 혼자서 너무 앞서 간 것이 분명하다고 느끼는 순간, 여준은 더 이상 자리를 잡고 있을 수가 없어서 허겁지겁 일어났다.
“미안. 밥 준비할게. 다치지 않게 조심히 해야 돼!”
주방으로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는 여준을 눈에 가득 담아 넣던 재인의 수평이었던 입술이 살포시 웃음을 지었다.
기분이 묘했다. 완전히 친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낯을 가리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말을 잘 안 하게 되는데, 그가 편안하게 해 줘서 그런 걸까? 방금 전 여준과 앉아 있을 때 자신은 편안하게 그와 대화할 수가 있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낯설지만 싫지는 않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