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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리비아가 친정에서부터 데려온 일손들이 아니면 접근조차 불가능한 포웰 별저는 그야말로 그녀의 하렘이었고, 그녀는 포웰의 유일한 주인이며, 여전히 모든 귀부인의 교본으로서 존재한다. 설령 더 이상 막을 수조차 없는 난잡한 성생활로 모두의 입을 오르내리더라도.



기실, 리비아는 이 모든 것이 우스웠다. 자신은 그저 귀부인의 소양으로서 여겨지는 후원 이상의 그 무엇도 한 적이 없었다. 제가 특별히 맘을 고쳐먹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럴 텐데 저들 멋대로 머리를 굴리고 망상의 끝에 달해 눈을 까뒤집고 바닥에 드러눕는 것들이 이다지도 많았다. 재능이 있다면, 그에 걸맞은 작품과 실적이 있다면 응당 대우하겠지만 그녀에게 몸을 바치러 기어든 것들은 그런 예술가로서 능력을 입증할 생각일랑 조금도 없었다. 그저 자발적으로 씨를 대러 온 종마 떼들에 불과했다.

질릴 무렵이면 언제든 새로운 것이 기어들어 온다. 감히 공작가를 집어삼키려고 드는 귀족들보다야 상대하기가 수월하니 가지고 놀기에도 좋았다. 적어도 원하는 입질이 올 때까지는 얼마고 더 칩거할 생각인 그녀로서는 심심치 않게 재롱을 떨러 오는 것들을 내칠 이유가 없었다. 남들이 불편해하건 언짢아하건 살펴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을 어쩌겠는가. 이곳은 이제 오롯이 리비아 모브레이만의 집인데.

제법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중에도 부드러운 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들며 커튼을 흔들었다. 파니에처럼 둥글게 부풀다 쓸려 나가며 가라앉는 천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아래에서 소란한 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부인께서는 휴식 중이십니다, 심란하신 분을 성가시게 하지 마십시오.”

“심란? 그 여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쓰는군. 비켜.”

흘긋 듣기만 해도 무슨 일인지 알 만했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느른하게 턱을 괴며 불청객이 들이닥치길 기다렸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미슐레가 놓칠 리 없겠지만, 상대가 녹록지 않았다.

“심란이라니.”

코웃음을 치며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뇌까린 남자가 테라스의 문턱을 밟으며 사뿐하게 내려앉는다. 그가 부린 바람이 커튼을 산만하게 뒤흔들었으나 리비아는 그저 흐트러진 머리칼을 무던하게 귀 뒤로 넘길 뿐 무례를 책잡지 않았다.

낮게 하나로 묶은 중단발 길이의 붉은 머리칼, 바로 그의 머리 위에 드리운 가지에 매달린 이파리와 꼭 같은 녹색 눈, 황동색 테를 두른 단안경과 초여름에도 계절을 잊은 듯 겹겹이 둘러 입은 품 넓은 마법사 특유의 옷가지들. 무엇보다 포웰의 유일한 주인 앞에서도 목을 빳빳이 드는 그 오연함.

“구르디예프 경.”

“이거 실례, 정말 쉬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부인.”

“미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답니다.”

앉겠어요?

뒷말은 구태여 붙이지 않고 우아하게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자 요한은 제 몸뚱이를 싸매듯 옷자락을 단정히 다듬고는 거절도 승낙도, 하물며 보통 의례적으로 할 만한 인사말도 없이 덜컥 자리를 꿰차고 앉으며 냉랭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부라렸다. 남자의 노골적인 무언 시위는 차라리 귀엽기까지 했다.

“용건이 있다면 가감 없이 말씀하세요.”

“제 말을 들으실 시간은 있으십니까?”

“그럼요, 다른 사람도 아닌 구르디예프 경의 말씀이라면 시간을 쪼개서라도 귀 기울여 들어야지요.”

“주제는 아시니 다행입니다.”

그는 퍽 다정한 어투로 말하는 리비아에게 노골적으로 가시 돋친 말을 꾹꾹 눌러 뱉으며 제 팔짱을 끼고 입매를 비틀었다. 남이 들었더라면 어떻게 포웰 공작 부인에게 감히 이런 말을 지껄일 수 있는지 경악했겠지만, 그의 정체를 안다면 리비아가 그랬듯 입을 다물 수밖에 없으리라.

그의 이름은 요한 바이뎀 구르디예프, 5대 전 공작가에 기용되어 지금껏 20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살며 공작의 고문이자 모브레이의 가장 큰 힘으로 자리매김해 온 마법사였다. 조르주의 죽음으로 가주의 자리가 빈 지금의 포웰이 이토록 굳건할 수 있는 것도 전부 그의 덕이었다. 무엇보다 비단 공작가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마법계 전반에 폭넓게 영향력을 뻗쳐 온 선학으로서도 널리 존경받는 사람이니 리비아라 해도 한 수 접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요한 역시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으므로 체면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그간은 자신의 공방에 틀어박혀 참아 주었으나.

“남편이 죽은 지 보름도 안 되어 새 남자를 들이더니, 이제는 온 나라의 입에 오르내리는 호색한이 되어 계시기에 조르주를 잃은 슬픔에 실성이라도 한 줄 알았지 뭡니까. 제정신으로 제 공방까지 부인의 정도를 모르는 추문이 흘러들어 오는 데에 대한 사죄 한마디 없이 이렇게 한가하게 계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리비아는 그의 신랄한 말본새에도 개의치 않고 그저 조용히 자세를 가다듬은 채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마치 다른 세상처럼, 혹은 그의 존재 따윈 전혀 인지조차 못 하는 것처럼 테이블을 사이에 둔 그들은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남자는 언짢은 것보다도 비위가 상한 듯한 기묘한 경멸을 만면에 내두르고 눈썹을 추켜세웠다.

“이제는 타인의 매도마저 즐거우십니까?”

“아뇨, 설마요. 그저 다른 누구도 아닌 구르디예프 경께서 제게 행실을 바르게 하라는 고루한 조언을 주시기 위해 바쁘신 몸을 이끌고 정반대 방향으로 마주 보고 있는 별저에까지 걸음 해 주실 줄은 몰랐던 까닭이지요. 그저 감사한 마음에 미소 지었을 뿐이랍니다.”

요한은 그녀의 말에 목에 핏대가 올라올 정도로 화가 치밀었으나 길게 말을 섞어 줄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다독이고는 싸늘하게 일갈했다.

“포웰의 체면이 있습니다. 한동안 근신하며 꼬락서니를 다듬으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명령이신가요?”

내내 눈을 감은 채 노래하듯 무게감 없이 대꾸하던 리비아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서늘하게 가라앉은 녹안으로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남자의 하악에 억센 힘이 들어갔다. 서로가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천적 사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듯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서늘함이 서로를 할퀴었다. 그저 채도가 조금 다를 뿐 궤를 함께하는 녹색 눈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없는 평행이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물음을 받은 요한이었다. 그는 비웃음을 참는 듯한 태도로 악의로 비틀린 입을 놀렸다.

“설마. 저는 어디까지나 조언을 드렸을 뿐입니다. 부인께서 이대로 포웰의 체면을 깎아 나간다면 장로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무리 저라도 괜한 일이 벌어져 ‘상심이 깊으신’ 부인께서 상처라도 받으실까 염려되더군요.”

“그렇군요, 제가 적적함에 눈이 멀어 거기까진 차마 고려하지 못하였어요. 적절한 조언 감사합니다, 경.”

리비아는 눈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가 먼저 눈길을 거둔 것만으로도 이겼다는 생각에 저열한 기쁨을 맛본 요한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도 없이 옷자락을 휘감고 사라졌다.

그녀는 조금도 분하지 않았다. 그저 우스웠다. 이런 식으로 치졸하게 아락바락 기어오르는 사내가 우스워 그의 히스테리는 그저 재롱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과연 장로들이 자신의 소식을 듣지 못하여 여즉 가만히 있었겠는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들은 늘상 받아먹는 청탁보다 큰 건수가 생겨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뇌물들을 허겁지겁 뒷주머니에 욱여넣느라 바빠 조용한 것일 테니까.

우습지 않은가, 스스로가 말했듯 요한 구르디예프는 그저 고문일 뿐이다. 명망 있는 마법사이자 그 무시무시한 힘을 경외하여 모두가 어른으로 대접하고 있을 뿐, 엄밀히 따지면 그는 어디까지나 외부인이었다. 자신이 그 힘을 포기하고 나가 달라고 한다면 이곳에 있을 그 어떤 정당성도 남지 않는 그저 타인. 그런 주제에 오만하고 악의에 무지하여 어떤 꼴이 날지도 제대로 셈하지 못하고 이래라저래라 턱을 치들고 다니는 가여운 것.

물론 그를 쳐 낼 이유는 없다. 지금도 공작 부인을 만나게 해 달라며 아우성치는 자들을 추잡하다며 죄 잘라 내고 있는 것도 요한일 테니까.

‘기는 한번 죽여 둬야겠지만.’

리비아는 곧추세웠던 몸뚱이를 느른하게 등받이에 기대며 눈을 내리깔았다.

― 부인.

“들어와요.”

인기척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 미슐레 호엔베르크가 잔뜩 굳은 얼굴로 묵례하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구르디예프 경께서는…….”

“이미 돌아가셨답니다, 워낙에 공사가 다망하신 분이니 오래 붙들지 아니하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