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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러나 남자의 악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개는 뒤로 물러서지 못한 채 남자를 노려보았다. 볼이 짓눌리자 무력하게 입이 벌어졌다. 남자의 긴 손가락이 개의 혀를 잡아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상처가 남아 있는데.”

“으우…….”

개는 옅게 신음했다. 남자의 손가락이 상처가 난 부위를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피가 멎었던 혀에서 다시 쇠 비린 맛이 느껴졌다.

“실패한 건가?”

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새까만 눈으로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남자는 이 개의 주인이었을 황제를 떠올리며 입술을 비틀었다.

“재갈은 잠시 보류하지.”

개의 볼을 눌렀던 단단한 손이 떨어져 나갔다. 개는 밖으로 끌어당겨졌던 혀를 서둘러 입 안에 넣으며 남자를 가만히 쏘아보았다.

“하지만 다시 죽으려 든다면 말의 자유까지 잃을 수도 있어.”

거둬지는 남자의 손은 책을 만지는 사람의 것처럼 길고 곧았다. 그러나 개는 저 손이 얼마나 억세고 포악해질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미 잃어버린 것 같지만.”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이 남자의 정체는 대체 뭘까.

그래서 이 남자는 황제의 적인가, 아군인가.

적이라면 아주 두려워해야 할 존재일 것이다. 남자는 암살자보다 더욱 은밀하게 움직일 줄 아는 인물이니까.

하지만 황제가 이 사실을 알까? 남자가 자신의 명을 어기고 죽음을 앞둔 개를 살렸다는 것을 과연 알고 있을까?

아니. 황제는 모를 것이다. 개는 황제가 말했던 마지막 적의 목을 비틀어 죽였고, 그 결과 황제에게 버림받게 되었다.

“…….”

개는 혼란스러운 듯 눈을 깜빡였다. 남자는 황제의 아군인가 적인가. 아군이라면 황제의 명을 어기고 개를 살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적이라면 황제의 편인 개를 어째서 살린 걸까. 살려 둔다면 개는 언젠가 남자의 가장 큰 적이 될 텐데.

아니. 의문은 사치였다. 이자가 황제의 적이라면 지금 죽여야 한다. 개는 남자의 목덜미를 사납게 노려보았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아직 남자를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황제의 명령 없이 개는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황제의 적을 죽이는 것은 개의 존재 이유…….

“욱.”

개는 구역질이 날 것 같은 입을 틀어막았다. 선과 악, 도덕의 경계, 죽여도 되는 사람과 죽여선 안 되는 이를 구분시켜 주던 황제가 없다는 것은 원초적인 공포를 일깨웠다.



‘판단하지 마. 생각하지 마. 명령에만 따라.’



명령이 없다는 건 개에게는 죽음과 같았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건가?”

머리 위로 목소리가 떨어진 건 그때였다. 개는 혼란과 혼돈으로 흐트러진 눈을 들어 올렸다. 하얀 정복을 입은 남자는 네발 동물처럼 선 개를 무감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네 주인처럼 가만히 앉아 명령이나 내리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남자는 개의 목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물에 빠진 생쥐처럼 떨고 있는 개를 침대에 내던지듯 눕혔다. 까만 동공에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생각하지 마.”

강압적인 어조였다. 개는 무정한 남자의 얼굴을 보며 기묘한 안도를 느꼈다.

“판단하려 들지 마.”

개는 흐릿하게 흐려지는 정신을 다잡지 않았다. 근본적인 공포를 맞닥뜨린 개의 머리는 휴식을 요구했다.

“지금은.”

그렇기에 이어지는 말을 듣지 못했다. 평온한 잠이 개를 찾아들었다.



***



개가 깨어난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커피 향과 함께 찻잔이 달칵거리는 소리가 났다. 개는 황급히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깼나?”

커피테이블 앞에 앉아 신문을 보던 남자가 눈을 휘어 웃었다. 개는 온화한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전면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등지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푸르스름한 빛을 띠었다.

“…….”

남자는 황제의 적인가 아군인가. 그것은 개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의 삶과 죽음은 이 나라의 주인인 황제가 명하는 대로 이뤄질 것이었다.

그러므로 개는 황제에게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자신을 버린 황제에게 돌아가 죽게 된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황제의 명령이 없다면 개는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어제 그것을 절실히 느꼈다.

“오늘은 죽지 않을 모양이지?”

남자는 픽 웃으며 신문으로 시선을 내렸다. 차분하게 정리된 검은 머리칼 아래로 긴 속눈썹이 내리깔렸다. 하얀 피부색은 남자를 일견 유약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래. 죽지 않는 게 네게도 좋을 거야.”

바스락. 남자는 신문을 접어 커피테이블 위에 올렸다. 검푸른 색을 띠는 눈동자가 개를 향해 돌아섰다. 자신을 직시하는 선명한 눈동자에 개는 움찔 몸을 떨었다.

“너와 황궁에 갈 생각이거든.”

개는 눈을 크게 떴다.

황궁.

남자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어쩐지 낯설게 들렸다. 개는 입을 달싹였다. 남자가 왜 이런 말을 한 건지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개의 존재를 숨겨야 할 남자가 황궁에 개를 데리고 들어간다니. 누군가 듣는다면 멍청하다며 비웃을 일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겁을 먹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신만만해 보였다.

“…….”

왜, 라는 질문이 목 끝까지 치달았다. 그러나 개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물음은 개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대신 개는 손끝을 적시는 기쁨을 느꼈다. 황궁으로 돌아간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몰랐다. 지금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목줄과 수갑만 풀린다면, 황궁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황제는 개가 살아 있음을 알아챌 것이다.

황제의 눈은 황궁의 모든 곳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개는 침대에 걸터앉아 두 발을 바닥에 디뎠다. 목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챙, 하는 쇳소리가 났지만 굴하지 않았다. 언제든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의사를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나 일어나려는 순간, 개는 허리도 펴지 못하고 침대 위로 털썩 쓰러졌다. 볼품없이 꼬꾸라진 개는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목줄이 움직임을 제한해 넘어진 게 아니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물론―”

남자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다리가 다 나았을 때 말이야.”

개는 침대에 엎어졌던 몸을 황급히 일으켜 세웠다. 여전히 두 발로는 설 수 없었고, 네발 동물처럼 무릎을 세워 기어가는 게 최선이었다.

개는 저벅저벅 가까워지는 남자를 흉흉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남자는 일부러 기척을 내어 다가오고 있었다.

개는 무릎걸음으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러나 성큼 뻗어지는 남자의 걸음보다 빠르게 움직일 순 없었다.

남자는 금세 침대 위에 한쪽 무릎을 올리고 허리를 숙였다. 남자의 얼굴이 개의 얼굴과 가깝게 붙었다. 웃음기 어린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를 향했다.

“해독은 빨라도 발목이 꿰뚫린 건 금방 낫지 않더군.”

발목이 꿰뚫려?

개는 기시감이 느껴지는 단어에 눈을 깜빡였다. 발목이 꿰뚫려, 발목이…….

“아.”

개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남자의 손이 발목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희고 단단한 손이 붕대로 감싸인 발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눌리며 고통이 피어올랐다.



‘어차피 죽을 테지만, 같은 이의 아래서 일했던 정을 보아 충고해 주지.’



개는 그제야 숲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암살자가 쏘았던 비수가 발목을 관통했던 것 또한.

“이제야 기억이 나나 보지?”

남자는 픽 웃으며 개의 발목을 놓았다.

개는 무방비하게 등을 보이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자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더 이상 하진 않지만, 그래도 저렇게까지 무방비하게 등을 보일 수 있는 걸까.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건지 아니면…….

개는 꼬리를 물고 이어진 생각을 퍼뜩 끊어 냈다. 남자를 판단하거나 궁금해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게 직전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를 관찰하고 그에 대해 생각하려 들고 있었다.

……위험해.

개는 남자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리고 침대 가장자리로 물러섰다. 그러나 시선을 피했다고 해서 남자의 기척까지 듣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야가 제한되자 다른 감각들이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를 짚어 가기 시작했다. 암살자로서 벼려진 능력은 개의 통제를 벗어난, 말하자면 생존 본능과 같은 것이었다.

남자는 부러 기척을 숨기지 않고 움직였다. 옷자락이 다리를 스치는 소리와 커피테이블 근처로 걸어가 신문을 챙기는 소리, 식어 가는 커피의 떫은 냄새 같은 것들이 오감을 자극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고아한 어투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든 것은 그때였다. 개는 귓속이 간지러워진 것을 느꼈지만, 인형처럼 반응 없는 얼굴로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

“…….”

붕대가 감긴 솜씨로 보아 상처가 말끔하게 치료됐을 거란 짐작이 갔다. 그렇다면 일주일 뒤에는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엉망으로 치료됐다 하더라도 발을 질질 끌어 걸으면 될 문제였다.

일주일.

개는 혼자만의 기한을 정하며 눈을 깜빡였다. 순간 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개는 놀라 눈을 들어 올렸다.

“돌아왔을 때 시체를 치울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지.”

문 앞에 선 남자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으나, 검푸른 눈만은 진지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건 무언의 표식이었다. 다시 한번 자살을 시도한다면 가만히 있기 않겠다는.

개는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랜만에 듣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개는 자신의 대답을 듣지 않고 문을 나서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툭 떨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