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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개무시 오져 버렸다.”

“네 근성도 오짐의 리미트 무한대를 찍었으니까 슬슬 그만해. 이진오가 불쌍할 지경이다, 이젠.”

“난 너무 오져서 포기라는 걸 모른다는 말임.”

김민성의 만류에도 굳세게 촐랑거리던 하태준은 ‘때가 됐다’며 옆 반으로 가 박가온을 찾았다. 페이퍼 글라이더를 날리러 가던 박가온은 하태준의 물 로켓을 보더니 박장대소했다.

“나와 가람이가 나눈 우정의 상징임. 이제 가람이 얘는…… 빼박 내 베프여.”

하태준이 나를 가리키며 박가온에게 말했다.

“베프……. 단어 한번 맛깔난 걸로 골라 왔네.”

하태준은 박가온에게도 동아리 가입을 권유했다. 박가온은 의외로 순순히 예비 회원 리스트에 제 이름도 적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진오만 꼬드기면……. 맞다! 너 진오랑 친하잖아.”

“이진오? 야, 걔 들일 생각이면 얼른 포기해. 동아리 활동 같이하기 좋은 놈 진짜 아니다.”

“왜? 아무튼 물 로켓이나 날리러 가자. 성훈이 존나 빡쳤겠다. 우리 안 와서.”

다 같이 운동장으로 가려던 그때, 문득 뒤에서 날아오는 시선을 느낀 나는 살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몇몇 애들이 달걀 착륙선을 만들러 나와 있는 복도 한가운데, 옆구리에 책을 낀 애가 날 보고 서 있다. 신대엽만큼은 아니지만 키가 꽤 크고, 머리는 옅은 갈색.

쟤…… 이진오 아닌가?



운동장에 먼저 나와 있던 조성훈은 하태준이 예언한 대로 빡쳐 있었다.

놈을 달래던 박가온은 저와 김민성이 페이퍼 글라이더를 날리고 오는 동안 로켓 발사를 미뤄 달라고 부탁했고, 하태준은 친히 그러겠다며 선심을 베풀었다.

“근데 성훈아, 동아리 정식으로 신청하려면 어디로 가? 최 쌤한테 말씀드리면 되나?”

“뭐야, 그 동아리 진짜 하려고?”

조성훈이 하태준에게 물었다. 쟤는 아직 자기 이름이 동아리 예비 회원 리스트에 올라와 있다는 걸 모르고 있다.

“내가 성적이 후달려서 학생회장은 못 하고, 졸업하기 전에 감투 스펙 갖추려면 동아리라도 운영해 봐야지.”

“소년 생활.”

신대엽이 동아리의 예비 이름을 읊조리자, 하태준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괜찮지 않냐? 민성이는 구리다고 했어도 내가 보기엔 괜찮은데. 아무튼 내가 동아리장이고 가람이가 부장이야. 넘버 투.”

“부장 한다고 한 적 없는…….”

“에헤이, 그냥 해. 부장은 별로 할 일도 없어. 그리고 네가 내 베프잖아.”

베프는 얼어 죽을.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우리 버킷 리스트는 나중에 동아리 출범하면 상의해서 정할 거임. 한 학기나 1년 잡고……. 이렇게 말씀드리면 쌤도 오케이 하시겠지?”

하태준의 동아리 운영 계획을 들으며 페이퍼 글라이더 팀이 오길 기다렸건만, 애들은 도통 오지 않았다.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조성훈이 묵묵히 발사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는 사이 옆에 김민성을 낀 박가온이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내가 바로 페이퍼 글라이더의 신이다.”

페이퍼 글라이더 날리기에서 우승을 차지한 박가온이 누구도 보지 않는 세리머니 포즈를 취할 무렵, 조성훈이 허락도 없이 로켓 발사대 에어 펌프를 신나게 밟아 댔다.

“야, 왜 네가 이걸 해? 나랑 가람이가 만든 건데! 새끼가 꼭 저 같은 그림 그려 놓고선 남의 손맛 가로채려 드네?”

하태준이 조성훈을 멀찍이 밀어 내며 놈에게 항의했다.

“존나, 내 그림 모욕하지 말라고! 미래인의 혼탁한 내면을 표현한…… 추상 회화라고.”

“구상화라고 우길 땐 언제고 말을 바꿔?”

하태준은 조성훈을 욕하며 에어 펌프를 밟았고, 잠시 후 커다란 로켓이 물을 쏟아 내며 하늘을 뚝심 있게 가로질렀다.

물 로켓 발사가 끝나고 교실로 돌아왔을 때 어쩐지 시선이 이진오의 자리를 향해 갔지만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난 아까 그놈과 마주친 게 기분 탓이었다고 단정하곤 자리에 앉았다.

점심시간을 기점으로 과학의 날 행사가 끝났다. 학교는 정상적으로 오후 수업을 진행했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 비해 새 학교의 교과 진도가 느려서 수업을 듣는 건 순조로웠다.







“일단 가람이는 오늘 처음이니까 빼 주고. 눈치 게임, 1!”

수업이 모두 끝나고, 애들을 보며 바람을 잡던 하태준이 눈치 게임의 장을 열었다.

놈이 1을 외치기 무섭게 조성훈도 같은 숫자를 외치며 일어났다. 김민성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박수갈채를 보냈다.

“라면 먹자, 라면.”

그렇게 라면을 먹으러 편의점까지 와서야 안 건데, 얘들은 학교가 끝나면 언제나 게임을 해서 걸리는 놈이 간식 쏘는 내기를 한단다. 재밌게 사네들.

“얘는 이제 전학생도 아닌 것 같은데 나만 그래? 존나 어제도 같이 앉아서 뭐 먹은 느낌인데. 근데 얘 이름 기억 안 나. 잠깐 명찰 좀 보자. 박가람? 맞다. 박가온 사촌이랬지?”

조성훈이 제 몫의 짜장 라면을 먹다 말고 내게 말했다.

“난 얘 처음 봤을 때부터 내적 친밀감 쩔었음. 너 키 몇이야?”

김민성이 날 보더니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172cm.”

“너도 인생 쉽지 않았지?”

하태준은 나와 김민성에게 꼬꼬마들이라며 비웃음을 흘렸다. 작다는 얘기를 하루 이틀 듣는 것도 아니라 무시하고 다른 이야기로 떠들다 보니 집으로 가는 시각이 예정보다 늦어지고 말았다.

집.

그래, 이제 박가온네 집이 곧 내 집이지.

나는 본디 바닷가 섬마을에서 할머니와 단둘이서만 살았었다. 그런데 올해부터 작은아빠네가 할머니를 모시기로 하면서 나까지 떠맡게 되었다.

작은아빠네 식구들은 언짢은 기색 하나 없이 나를 반겨 주었다. 솔직히 불편할 만도 한데.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와 보니 박가온이 아침에 신고 나간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학원으로 빠졌나? 박가온의 것이라기엔 큰 운동화가 한 켤레 있기는 한데……. 작은아빠 건가?

하지만 작은 아빠가 퇴근해서 돌아왔다고 보기엔 시간이 너무 이르다. 할머니는 작은엄마랑 고모네 간다고 했고. 그렇다면 지금 이 공간엔 나뿐이다.

나는 굳게 닫힌 박가온의 방문을 보며 서성대다가 거실 소파에 주저앉아 책가방을 발 근처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허공에 대고 목을 푼 뒤 노래를 흥얼거렸다.

“예쁘다 좋다 자꾸 하는 말…….”

내 방과 후 시간 대부분을 차지하는 취미는 바로 노래다.

“어……?”

거실에 앉아 곡 하나를 다 뽑고 일어났을 때 근처에 와 있던 누군가와 시선을 마주쳤다.

우리 집 식구는 아닌데, 공교롭게도 구면이다.

“이진오?”

왜 여기 있지? 박가온이랑 친하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럼 현관에 있던 운동화가 쟤 건가?

“너지?”

그러고 보니 목소리는 처음 들어 보는데, 엄청난 저음이다.

“내, 내가 뭐?”

“네가 램이잖아.”

‘1인 미디어 시대’라고도 불리는 요즘, 개인 방송 채널을 운영하는 민간인이 늘고 있다. 노래하는 걸 좋아하는 민간인 ‘RAM’ 또한 개인 채널을 운영하며 근근이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놈이 바로 나다.

그나저나 ‘램’이 아니라 ‘람’이라고 읽는 건데.

“램이 뭔데? 어쨌거나 왜 여기 있어? 박가온도 없는데.”

일단 몽따자. 계속 아니라고 잡아떼면 추궁을 관둘지도 모르니까.

“너 램 맞잖아.”

결국 내 질문에는 대답을 안 할 작정인가?

“그게 뭔지 모르겠다니까?”

“사람을 속이려면 목소리라도 다르게 내든가. 네가 램이잖아.”

숨이 탁탁 막힌다. 아무리 봐도 물러날 기색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하지?

“왜 박가온도 없는데 네가 여기 있어?”

“그거 대답하면 램이라고 인정할 거냐?”

이진오는 오늘 박가온이 엄청나게 재밌는 걸 보여 주겠다며 호언하는 통에 이곳까지 왔다고 했다. 나는 그놈한테 현재 박가온 새끼가 손님만 들여놓고 어디로 내뺐는지 물었다.

“그건 알 바 아니고, 너 램 맞지?”

아, 진짜 독하네.

“그럴……지도.”

나는 먼 곳을 본 채 한숨을 깊이 내쉬며 답했다.

“아무튼 난 나간다.”

쪽팔려서 뒤지고 싶으니까.

나는 이진오를 지나쳐 현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놈이 돌연 팔을 붙드는 통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뭐야? 차라리 말을 걸든가.

“야.”

이진오가 무언가 더 말하려 한 순간 놈의 교복 마이에 든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그런데 이 벨 소리…….

내 목소린데?

언젠가 우리 방송 매니저인 ‘단델리온’이 듣고 싶다고 해서 불렀던 곡이다.

이게 뭐야? 이 새끼는 왜 내가 노래한 파일 가지고 있는 것도 모자라서 폰 벨로까지 해 놨지?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얘는 사람을 이렇게 수치스럽게 하는 거지? 창피해서 얼굴 폭발할 것 같다. 쟤가 어째서……?

“여보세요.”

난 죽을 것 같은데, 이진오는 태평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전화를 받았다.

―너 가람이 만났냐? 아직 누군지 못 알아본 거 아니지? 걔가 램이야. 네 고막 남친.

이진오의 휴대폰 너머로 박가온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린다. 저 망할 새끼.

“어떻게 몰라. 목소리가 같은데. 아무튼 네 집에 오면 보여 준다는 게 이거였냐?”

난 ‘이거’가 아니라 사람인데.

―어. 금방 갈 테니까 기다려.

“오지 마.”

이진오는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전화를 끊더니 내 얼굴을 보았다.

“일단 놓고 말할래?”

아직 팔이 잡혀 있던 터라 잡힌 팔을 슬슬 흔들며 최대한 점잖게 부탁했다.

“신기하네.”

내 부탁은 안중에도 없는지. 이진오는 고개를 숙이더니 내가 무슨 전시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흥미롭게 관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