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화





“애들이 안 놀아 주면 연락해. 알았지? 그럼 나 들어간다. 혼자 됐다고 울지 마라.”

“안 울어. 가.”

내 동갑내기 사촌, 박가온은 씩씩하게 손을 흔들어 주곤 제 교실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나는 오늘부터 ‘우리 반’이 될 교실 앞에서 한참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서성였다.

“……다른 반 애는 아닌 거 같은데.”

교실 뒷문가에서 들어갈까 말까 고민만 하던 중, 웬 깡마르고 키 큰 놈이 인기척도 없이 다가와서 낮게 중얼거렸다.

“너 전학생이야?”

말로 대답하지는 않고 고개만 설렁설렁 끄덕였더니 아, 탄식하곤 교실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다. 내 인상이 그렇게 후진가? 더 말 걸어도 괜찮을 타이밍에 가 버리네.

“쟤 전학생이래.”

키 큰 놈이 날 가리키며 교실에 있던 놈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주변의 두 놈이 내게 시선을 보냈다. 하나는 피부가 하얗고, 다른 하나는 가뭇하다.

“전학생이라 가져온 것도 없을 테니까 너랑 하면 되겠네. 그 또라이 짓.”

가뭇한 놈이 하얀 놈의 팔꿈치를 치며 말했다.

“그게 왜 또라이 짓이야? 오늘 4월 21일. 어? 과학의 날에 물 로켓 좀 날리겠다는데!”

“내가 언제 물 로켓 날리는 게 또라이 짓이라고 후려쳤냐? 네가 또라이니까 너 하는 짓은 전자동 또라이화 된다는 말이었지.”

“또라이 아니거든? 아무튼…… 야, 들어와. 전학생! 이따 나랑 물 로켓도 날리고.”

하얀 놈―나중에 명찰을 보니 이름이 하태준이었다―의 인도로 교실에 들어온 나는 놈을 통해 다른 놈들과도 통성명할 수 있었다. 내게 최초로 말 걸었던 멀대는 신대엽, 하태준을 또라이라고 놀렸던 놈은 조성훈.

하태준은 내 명찰에서 ‘박가람’ 세 글자를 보더니 옆 반의 박가온과 이름이 비슷하다고 했다.

“걔랑 사촌이라 그래.”

“헐, 실화? 하나도 안 닮았는데.”

박가온과 나는 피의 4분의 1을 공유하지만 겉으로든 속으로든 닮은 구석이 없다. 내가 하태준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반 놈들이 하나둘 자리에 착석했다.

그렇게 교실 안 빈자리가 채워질 무렵, 눈에 띄게 잘생긴 놈 하나가 우리 곁을 빠르게 지나쳤다.

“안녕, 진오!”

하태준은 진오라는 놈에게 반갑다는 듯 인사했지만, 그놈은 하태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태준 존나 신기하네. 매번 씹히면서도 인사하고 싶냐?”

조성훈이 하태준에게 눈을 흘기며 물었다.

“도전 정신이지. 언젠가는 반응할 거란 믿음…….”

“하태준도 하태준이지만 이진오도 개신기함. 인사하는데 쳐다보기라도 하든가.”

알 두꺼운 안경을 쓴 놈―명찰을 보니 이름은 김민성이다―이 조성훈과 하태준 사이에 냅다 끼어들어 한마디 거들었다.

문제의 이진오는 애들이 뭐라든 제 일만 묵묵히 했고, 나는 그놈을 슬쩍 곁눈질하곤 처음 보는 놈들과 그럭저럭 어울리며 시간을 보냈다.

조례 때 담임은 내 자리를 뒷문에서 가장 가까운, 하태준의 옆자리로 정해 주었다.



과학의 날을 맞은 학교는 오전 시간을 전부 할애해 기념행사를 진행했다. 박가온이 사전에 말해 준 바가 없어 행사 준비를 못 한 나는 하태준과 짝을 이뤄 물 로켓을 만들었다.

조성훈이 고작 물 로켓을 날린다는 이유로 하태준에게 또라이라고 했던 까닭은 행사가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드러났다.

일단 오늘 학교에서 진행하는 과학의 날 ‘정규’ 행사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달걀 착륙선 만들기

2. 과학 독후감 쓰기

3. 과학 상상화 그리기

4. 페이퍼 글라이더 날리기



전교생은 이 목록 가운데 못해도 하나의 종목에는 반드시 참여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물 로켓 날리기’는 없다.

“그래서 쌤한테 특별히 부탁드렸지.”

학교에 없는 로켓 발사대를 본인이 준비하는 조건으로 담임에게 허가를 얻어 냈단다. 물 로켓 발사대 평균가는 30만 원. 이러니 또라이 소리가 나올 수밖에.

“내가 아는 놈 중에 가장 신선하게 돈 낭비 하는 새끼야. 이 새끼가.”

미래 상상화를 그리던 조성훈이 못마땅해하는 얼굴로 하태준을 보며 말했다.

“이거 중고로 샀거든? 8만 원밖에 안 줬다.”

페트병에 절단선을 표시하던 하태준이 발끈하자, 조성훈은 자신이라면 발사대가 만 원이어도 안 샀을 거라며 반박했다. 옆에서 글라이더를 만들던 김민성은 두말하면 입 아프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신대엽은 애들이 떠들거나 말거나 달걀 착륙선을 열심히 만들다가, 형체를 도통 알아볼 수 없는 조성훈의 밑그림을 가리키며 다짜고짜 관념화냐고 물었다.

“미래인의 혼탁한 내면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건가.”

“미래 상상화가 주젠데 뭔 관념화를 그려?”

“그럼 이게 구상화라고?”

“그냥 그림을 발톱으로 그렸다고 욕해. 이 씨발 대엽아.”

한동안 그림의 정체를 두고 신대엽과 승강이를 벌이던 조성훈은, 그림이 관념화였다면 칭찬했을 거라는 신대엽의 코멘트에 완패하곤 조용히 찌그러졌다.

그림 때문에 쩔쩔매는 조성훈 옆에서 김민성은 보란 듯 빠르게 글라이더를 완성했다. 그러고는 내게 어쩌다 전학 왔냐, 게임 뭐 하는 거 있냐 등등의 질문을 건네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질문에 소상하게 답변하며 시간을 보낼 무렵, 하태준이 불쑥 취미가 뭐냐고 물어 왔다.

“……특별히 없는 것 같은데.”

사실 취미라기엔 정도가 지나친 게 하나 있지만.

“그래? 그럼 특별히 가입하고 싶은 동아리는?”

하태준은 학교에서 동아리 활동 하는 시간을 금요일에 따로 내주는 대신, 학생 모두가 적어도 하나의 동아리에서 반드시 활동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마침 내가 버킷 리스트 동아리 하나를 창설했는데, 너도 가입…….”

“참고로 이틀 전에 생긴 무허가 동아리임.”

하태준이 내게 동아리 가입을 권유하려 하자, 독후감 양식을 채우던 신대엽이 그 동아리의 정체를 누설했다. 조성훈은 그 동아리에 하태준 말고는 소속원이 없다는 이야기까지 더했다.

“야, ‘무허가’가 아니라 ‘비정규’ 동아리거든? 아직 승인 못 받아서 방만 없을 뿐이라고.”

“동방 영원히 안 생기니까 꿈 깨.”

회원이 없으니 정규 승인이 반려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김민성이 말하자, 하태준은 정규 동아리가 되는 데 필요한 최소 회원이 몇이냐고 물었다.

“전용 방까지 배정받으려면 다섯은 있어야 돼. 고문 쌤도 구해야 되고.”

“고문은 최 쌤한테 부탁하면 되고, 다섯이면 껌이네. 이미 일곱이나 확보했잖아. 김민셩이랑 나, 성훈이랑 대엽이, 여기 가람이랑…….”

나는 언제부터 이름도 모를 버킷 리스트 동아리의 예비 회원이 되어 있었던 걸까?

“가람이 가입하면 가온이도 가입할 거 아니야. 사촌이니까.”

“하태준 논리 오늘도 씹오지네. 사촌이 가입하면 따라서 가입하냐?”

조성훈은 내가 하태준에게 하고 싶던 질문을 대신 던져 주었다.

“가입하지, 그럼? 아무튼 내가 몇 명 말했더라? 조성훈 때문에 까먹었어. 민셩이랑 나랑…… 가온이까지 여섯이었나? 그럼 진오까지 일곱. 됐지?”

하태준이 물 로켓 선단부로 어깨를 쿡 찌르며 묻자, 눈을 야트막하게 뜬 이진오가 우리를 차례로 훑어보곤 독후감을 마저 작성했다.

“왜 개소리는 하태준 혼자 지껄였는데, 이진오의 능멸은 다 함께 받아야 돼?”

조성훈이 묻자 하태준은 우리가 버킷 리스트로 하나 되는 운명 공동체라 그렇다고 했다.

수다가 계속되는 와중에도 물 로켓은 순조롭게 완성되어 갔다. 로켓이 그럴싸한 모양을 갖추자 하태준을 욕하던 놈들도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선 우리 주변에 몰려들었다. 역시 과학의 날 행사의 꽃은 물 로켓 날리기다.

“어디서 날릴 거?”

“다른 애들 방해하면 안 되니까…… 페이퍼컷 프로젝트인가 날리는 거 끝나면 구석에서 날리려고.”

“페이퍼컷 프로젝트가 뭐야? 페이퍼 글라이더지.”

“뜻만 통하면 됐잖아.”

하태준은 신대엽에게 반박하곤 인디 밴드인 ‘페이퍼컷 프로젝트’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예쁘다 좋다 자꾸 하는 말…….”

하태준의 노래를 노동요 삼아 작업하다 보니 어느새 물 로켓이 뚝딱 완성되어 있었다. 조성훈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부랴부랴 로켓과 발사대를 챙겨 들더니 가장 먼저 운동장으로 뛰어 나갔다.

“저 새끼 신났다, 지금. 아까 나한테 또라이라고 욕할 때는 언제고.”

하태준이 떠나는 조성훈의 뒷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너 하는 짓이 그래. 처음에는 이게 뭐냐 싶은데, 같이 그 짓 하면 존나 즐거움.”

신대엽이 하태준의 어깨를 잡으며 지지를 보내자, 하태준은 이때다 싶었는지 놈에게 버킷 리스트 동아리에 가입할 테냐고 물었다.

“양식 같은 거 써서 내야 돼?”

“음…….”

잠시 고민하던 하태준은 번쩍 펜을 들더니 쭉 찢은 노트 한 장에 ‘소년 생활 가입자 리스트’라고 적었다.

“‘소년 생활’은 뭐임?”

김민성이 묻자 하태준은 잠정적으로 정해 놓은 동아리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이름 구린데.”

“이름에 불만 있으면 새로 지어서 내든가.”

하태준이 리스트에 신대엽과 내 이름을 적으며 김민성에게 말했다. 난 아직 가입한다는 말 안 했는데.

“아무튼 나도 특별히 가입해 줌.”

“감사.”

하태준은 김민성을 비롯해 조성훈의 이름까지 리스트에 적고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가온이랑 진오한테만 물어보면……. 야, 진오야!”

이진오는 하태준이 부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독후감이 적힌 종이를 들고 교탁 앞으로 나아갔다. 제출을 마치고 돌아온 놈은 귀에 이어폰을 꽂은 뒤 팔짱을 끼고 앉아 두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