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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손바닥에 닿는 느낌이 가슬가슬하고 부드러웠다. 승목은 만져지는 것이 호텔 침구라는 걸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었다. 집에 있는 이불의 감촉과 다른 서늘한 무언가가 있었다.

“끄응…….”

묵직한 두통과 기분 나쁜 갈증을 뒤로하고 억지로 눈을 뜨니 가구도 커튼도 낯설었다.

“여긴 또 어디야.”

처음 있는 일도 아니라 놀랍지도 않았다. 암막 커튼 사이로 뿌연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보니 아직 날이 밝지 않은 듯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승목은 일어나 앉아 목을 이리저리 돌리다 하얀 등을 드러낸 채 엎드려 자고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고르게 오르내리는 매끄러운 등과 침대 위에 물결처럼 어지럽게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을 보고 있으니 스위트룸을 보고 좋아하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손끝에 닿은 여자의 갈색 머리가 무척 부드러웠다.

‘누구더라? 아, 그래. 어제 갔던 바에서 처음 만난 여자였지. 이름이 수진이? 수정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여자 이름은 잘 기억하는 편인데 헛갈리는 것을 보니 어제 과음을 하긴 한 모양이었다. 부스럭대는 승목 때문에 잠이 깬 여자가 여전히 잠에 취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벌써 일어났어? 나는 더 자고 싶어…….”

술이 덜 깬 여자의 목소리는 허스키했다.

“그래. 더 자.”

승목이 훤하게 드러난 맨살에 이불을 덮어 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여자는 부스스한 모습으로 승목의 얼굴을 쳐다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많은 여자들 중 자신이 이 남자를 낚아챈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자기 어제 진짜……. 나 너무 졸려. 사람 잠도 못 자게…….”

여자가 웅얼웅얼거리자 승목의 입술에 미소가 씨익 번졌다.

“미안. 자기가 너무 매력적이라. 더 자. 룸서비스시켜 놓을게.”

그 말과 함께 승목은 어지럽게 흐트러진 여자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승목은 일대 클럽에서 꽤 유명 인사였다. 잘생긴 외모나 모델 같은 몸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나쁜 남자라는 것도, 여자관계가 복잡하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 모든 것을 무마시킬 만큼 승목은 매력적이었다.

그는 만나는 여자들을 항상 공주처럼 대접했고 명품 가방, 지갑, 화장품, 호텔 스위트룸은 옵션처럼 늘 따라가는 선물이었다. 실제로 그를 만나면서 받은 선물만 몇 천만 원어치가 된다는 걸 자랑하고 다니는 여자들도 꽤 있었다.

그러니 어젯밤 승목을 낚아챈 스스로가 대견할 수밖에. 여자는 까무룩 잠이 들면서도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약속대로 룸서비스를 시킨 후 승목은 미련 없이 침대를 빠져나왔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기분이 꽤 괜찮은 걸 보니 몇 번 더 만나도 될 것 같았다. 흥얼흥얼 저절로 노래가 흘러나왔다.

호텔을 나서는데 새벽이라 그런지 제법 선선했다.

“으으, 추워.”

추위를 잘 타는 승목은 어깨를 웅크리고 부르르 떨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하지만 어디를 뒤져도 지갑은 찾을 수가 없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호텔방에 두고 나온 게 분명했다.

“아, 짜증 나네.”

승목은 하는 수 없이 다시 호텔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거울처럼 반짝이는 엘리베이터 문에 자신의 모습이 환하게 비쳤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승목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몇 층에 있었더라……. 8층인가?’

기억을 더듬으며 8층 버튼을 누르려고 손가락을 뻗는데,

“잠깐만요!”

웬 여자가 숨을 헐떡이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었다. 얼결에 문을 잡아 준 승목에게 그 여자는 고개를 가볍게 까딱 숙였다. 승목은 습관처럼 엘리베이터에 탄 여자를 곁눈으로 훑었다.

여자치고는 지나치게 짧은 머리, 약간 마른 몸, 그리고 쌍꺼풀 없이 갸름한 눈매에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 코 근처에 난 주근깨. 게다가 공짜로 줘도 안 입을 것 같은 낡은 청 재킷. 백 점 만점에 사십 점?

승목은 늘 그랬던 것처럼 곁에 선 여자의 외모에 점수를 매기고 있었다. 그러다 흙이 잔뜩 묻어 있는 여자의 운동화를 보고는 저절로 눈을 찌푸렸다. 외모도 그닥인데 위생 개념도 꽝인 듯했다.

저런 여자는 트럭으로 갖다줘도 싫다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여자가 갑자기 승목의 팔을 뒤로 확 꺾고 수갑을 채웠다.

“이정구! 너를 마약 밀매 및 인신매매 혐의로 체포한다!”

찰카닥! 철커덕!

눈 깜짝할 사이 승목의 양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어찌나 힘이 센지 엘리베이터 한쪽 벽에 얼굴을 박은 승목은 옴짝달싹하지도 못한 채 속절없이 팔을 빼앗기고 말았다.

“너는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으며…….”

승목은 갑자기 당한 일에 기가 막혀 처음에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 여자가 미쳤나. 하지만 대놓고 욕을 하기에 여자는 힘이 너무 셌다.

“이봐요! 사람을 잘못 봤나 본데 나는 이정군가 이영군가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승목이 팔을 빼내려 몸을 비틀며 화를 내며 말했지만 짧은 머리의 여자는 승목을 다시 한 번 벽으로 밀쳐 내며 뒷목을 팔꿈치로 세게 눌러 버렸다.

“시끄러 새끼야. 입 닥치지 못해? 어디서 오리발이야? 죽고 싶어?”

1층에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에서 승목이 질질 끌려 나오자 호텔 로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둘에게로 쏠렸다.

“이봐요! 사람 잘못 봤다니까! 나는 강승목이라는 사람이라고!”

여자는 승목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팔을 아프게 잡아끌며 무섭게 노려보았다. 한마디 더 하면 이 여자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때,

“너, 누구야?”

여자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내가, 조금 전에, 분명히, 나는, 강승목이라고 했잖아요!”

갑자기 당한 일에 기가 막혀서 팔짝 뛰고 기절하기 직전인 사람에게 너 누구냐니. 이 여자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당신이 왜 그 옷을! 왜 그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어? 이정구는 어디 있어.”

백번 사죄해도 모자랄 판에 도리어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여자를 보며 승목은 마치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을 만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화를 낼 사람은 내가 아닌가?

“나는 이정구라는 사람을 모른다고요. 당신이 찾는 사람이 아니라고, 이제 알았으면 이 수갑 좀 풀어요. 다른 사람들이 다 보잖아요. 당신 내가 누군지 알아?”

처음에 슬쩍 겁이 났던 승목은 말을 하면 할수록 억울한 마음에 목소리가 커졌다.

“에이 씨팔…….”

여자의 입에서는 도리어 험한 욕이 흘러나왔다. 승목은 무례하게 행동하고도 사과 한마디 없는 여자에게 너무 화가 났다. 아무래도 따져야 할 것 같아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노려보는데, 여자의 눈빛이 돌연 날카롭게 빛났다.

“당신,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서 있어.”

불안이 엄습해 왔지만 왠지 거역하면 안 될 것 같아 승목은 전봇대처럼 딱딱하게 섰다. 여자의 날카로운 눈빛이 승목 너머 누군가를 향했다.

‘진짜 범인을 찾았나?’

궁금해하는 것도 잠시. 잠시 숨을 고르던 여자는 굶주린 맹수처럼 승목의 어깨를 도움닫기 삼아 훌쩍 날아올랐다.

쿵!

둔탁한 소리에 놀란 승목이 뒤돌아보니 자신과 똑같은 옷을 입은 남자가 그 여자에게 깔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여자는 넘어진 남자 위로 올라탄 후 놀라운 속도로 팔을 꺾고선 허리춤을 더듬었다.

“으어어억!”

“이 새끼가 죽을라고. 어딜 도망가? 넌 죽었어. 이정구! 너는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고, 또, 어? 수갑! 내 수갑!”

승목은 드라마 같은 상황에 놀라 저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러다 여자가 수갑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춤주춤 가까이 다가갔다.

“저기…… 수갑은 저한테 있는데요…….”

승목은 자신이 존댓말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몸을 돌려 등 뒤로 채워진 수갑을 보여 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에이씨, 되는 일이 없네. 잠깐만 이리 와 주시겠어요?”

“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서 있는 승목을 답답하다는 듯이 보던 여자가 깔고 앉은 남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지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이쪽으로 오셔야 제가 수갑을 풀어 드릴 수가 있습니다.”

“아……. 네.”

승목은 여자의 말에 얼른 뒤로 돌아서 수갑을 풀 수 있도록 자세를 낮췄다.

짤까닥 짤까닥.

손목을 죄었던 수갑이 풀어지자 잔뜩 주눅이 들었던 마음까지도 탁 하고 풀어졌다.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여자가 바닥에 껌처럼 붙어 있는 사내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 후 바지를 탈탈 털고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헉!’

남자의 얼굴을 본 승목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막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바닥에서 얼굴을 뗀 남자는 코피를 질질 흘리고 있었다.

“중간에서 정보 전달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범인을 일으켜 세운 여자는 승목을 향해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갑자기 공손해진 여자를 어색하게 바라보던 승목이 느닷없이 솟아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안하다면 다야? 사람을 이렇게 망신을 주고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마음이 급해서 미처 확인을 못 하고 선생님께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지르는 승목을 향해 민주는 다시 한 번 사과를 했다.

여자가 사과하는 와중에도 무전기에서 쉴 새 없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거야. 소속이 어디야?”

마지막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승목은 순식간에 얼굴에서 미안한 표정을 지워 버린 여자의 표정에 본능적으로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실수를 인정하기엔 보는 눈이 많았고 자존심이 상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사죄드립니다.”

말과는 달리 여자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기분이 나쁘다 이거겠지.

“그냥 가면 어떡해! 소속이 어디냐니까? 전화 한 통이면 바로 알아낼 수 있어. 내가 가만…….”

사과하고 돌아서던 여자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승목의 막말에 결국 가던 길을 되돌아왔다. 질질 끌려가던 남자도 덩달아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승목은 성큼성큼 다가오는 여자를 보며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수갑을 찬 채 질질 끌려오는 남자를 보니 덜컥 겁이 난 까닭이다.

혹시나 일어날지도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승목이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여자가 안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왜! 왜? 뭐 꺼내려고 그래?”

승목이 움찔하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여자가 그에게 작고 네모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승목은 귀퉁이가 꾸깃해진 종이를 손끝으로 받아 들었다.

“이, 이거 뭐?”

“명함입니다. 혹시 다친 곳이 있으면 이리로 연락 주세요.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한 손으로 범인의 멱살을 움켜쥔 여자가 승목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인 후 다가왔던 것처럼 빠르게 멀어져 갔다.

“이렇게 간다고? 내가 당신 명예훼손으로 꼭 고소할거야! ”

승목이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여자는 들리지 않는지, 아니면 정말 바쁜 건지 금세 호텔을 빠져나갔다. 승목은 여자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눈썹을 찡그린 채 명함을 읽어 나갔다.

“서울 중부 경찰서…… 강력계 형사 이민주.”



* * *



반질거리는 구두가 천장에 달린 미등 때문에 반짝반짝 빛났다. 몸에 걸치는 건 그 어떤 것이라도 최고가 아니면 견디지 못하는 승목은 발에서 빛을 내는 구두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다 문득 엘리베이터에서 본 흙 묻은 지저분한 운동화가 떠올랐다.

‘그렇게 더러운 신발을 신고 다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승목의 기준으로는 용납이 되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 일로 아끼던 슈트에 주름까지 생겼다.

“이거 한정판인데.”

술김에도 구겨질까 벗어 놓았던 슈트였다. 이대로 넘어가기엔 스크래치 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과하는 꼴도 영 마음에 들지 않고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