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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아가씨,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치장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치, 치장?”

하녀들의 입장에서는 화장을 하고 머리까지 잘 정돈해야 끝인 것을 알지만 나는 이미 피로감에 절어 있었다.

자작가에서도 치장이 귀찮아 기본적인 드레스만 입던 나였다. 하루아침에 성격이 바뀌지 않는 이상 지금 하는 것들은 내게 그저 귀찮고 피곤한 일일 뿐이었다.

‘이건 뭐 데뷔탕트도 아니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쩔 수 없이 화장대 앞에 앉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녀들이 내게 손을 뻗기 시작했다.

얼굴에 파우더를 바르고, 머리는 곱게 빗었다. 오랜만에 하는 치장이었기에 기분이 생소했다.

“다 됐습니다. 눈을 뜨셔도 돼요.”

마지막으로 입술에 무언가를 바르고 나서야 귓가에 하녀의 뿌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눈을 뜨자 거울 속에는 낯선 내가 비치고 있었다.

‘확실히 공작가의 하녀들은 다르네.’

처음 모시는 아가씨였을 텐데도 그들은 내게 어울리는 것들을 잘 캐치한 듯 보였다. 예쁘게 꾸며진 지금의 내 모습이 그 증거였다.

나는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손으로 배배 꼬았다. 오랜만에 꾸민 모습을 보니 무척 어색했다.

“마음에 드세요?”

하녀들은 하나같이 긴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거침없이 나를 이끌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긴장한 모습들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응. 무척 마음에 들어. 고마워, 다들.”

내 인사에 모두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 아벨하임 공작가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니 공작과 비슷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 편견이었던 모양이다.

다시 거울을 보며 내 모습을 감상하다가 메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에 내 꾸민 모습을 본 메리의 감상평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를 보는 메리의 표정이 이상했다. 메리는 미소를 잃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불안감이 읽혔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 찰나, 공작가의 하녀들이 급하게 나를 일으켜 세웠다.

“아가씨, 공작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어서 식당으로 가시지요.”

하녀들의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메리를 잊고 눈을 부릅떴다.

“그노……. 아니, 각하께서 기다리신다고? 나를?”

“네.”

이제야 하녀들이 급하게 나를 꾸민 이유를 눈치챘다. 공작이 기다리고 있으니 나를 그냥 보낼 수는 없었겠지.

갑자기 밀려오는 긴장감에 몸이 살짝 굳었다.

하녀들은 내가 움직이지 않자 조마조마해하며 눈치를 보았다. 결국 나는 한숨을 살짝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당으로 안내해 줘.”

“네, 아가씨.”

방을 나서기 전 메리를 흘끔 보았다. 메리는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걱정이 일었지만 갔다 와서 묻기로 하고, 일단 하녀의 안내에 따라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입니다, 아가씨.”

복도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문 앞에 섰다. 공작가라 그런지 식당 문도 쓸데없이 고풍스러웠다.

그래. 이 안에 공작이 있다고.

나는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래 봤자 나에게는 투시 같은 능력이 없기에 안에 있는 공작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눈에 보이지 않는데 이미 가슴은 그를 만난 것처럼 쿵쿵 뛰었다.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쓸어내리자 옆에 서 있는 하녀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마음을 조금 안정시킨 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다 메리의 얼굴이 떠올라 하녀에게 부탁했다.

“저기, 나와 같이 온 메리라는 하녀를 좀 챙겨 줄래? 아마 지금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을 거야. 식사를 챙겨 주면서 그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전해 줘.”

“알겠습니다.”

내 부탁을 받은 하녀는 곧장 어딘가로 걸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표정을 정돈하고 드디어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맛있는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테이블 위를 보니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아침 식사라고 하기에는 거창했다. 아침 식사로 주로 먹는 스튜부터 속 재료를 빵빵하게 넣어 구워 낸 파니니,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파티에서나 주로 볼 수 있는 칠면조 구이였다. 마치 손님을 대접하는 것 같은 상차림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때 상석에 앉아 있던 금발의 남자가 나를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왔어, 작가님?”

나 또한 음식에서 눈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반가운 사람이라도 보는 것처럼 환하게 웃는 모습에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 인간은 왜 쓸데없이 잘생기고 난리야.

내가 생각해도 황당한 투덜거림을 속으로 짓씹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여느 영애가 그러는 것처럼 그에게 인사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인사를 건넬 정도로 좋은 상황도 아니니까.

내가 멀뚱히 서 있자 공작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뭘 허수아비처럼 가만히 서 있어? 여기 와서 앉아.”

잠시 망설이다가 그가 가리킨 자리로 걸어갔다. 의자 위에 풀썩 앉자 공작이 빙긋 웃는 모습이 가까이에서 보였다.

“잠은 잘 잔 모양이네.”

“아뇨. 잘 못 잤습니다.”

속이 뜨끔했지만 일부러 새침하게 대답했다. 여기서 잘 잤다고 대답하는 것은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공작은 차를 홀짝 마시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눈을 곱게 휘며 말했다.

“그런 것치고는 얼굴이 빵빵한데?”

“풉……! 콜록, 콜록!”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 사레가 들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순간에도 차를 뿜지 않았다는 것이랄까. 공작은 기침하는 나를 보면서도 시종일관 미소를 유지했다.

한참 기침을 내뱉던 나는 눈빛으로 그를 찌를 것처럼 눈을 치켜떴다.

“어, 얼굴이 빵빵하다니……. 누가……!”

“누구긴 누구겠어. 작가님이지.”

방심한 사이 두 번째 공격을 받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치명적이었다.

대체 어느 누가 레이디에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오늘은 공작가 하녀들의 도움으로 예쁘게 꾸민 날이었다. 그런 나를 보고도 저런 말을 하다니.

황당하고도 치욕스러운 기분에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의 얼굴에 거짓이라고는 보이지 않아서 더욱 그랬다.

한마디 하려던 나는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여기서 그에게 뭐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올 것이 빤히 보였다.

진정하자, 필리아. 저놈은 그 유명한 아벨하임 공작이잖아. 또라이라고. 저놈이 무슨 말을 하든 너는 괜찮…….

“작가님, 눈 감고 뭐 해? 자려고? 얼마나 더 빵빵해지려고?”

“…….”

이마에 핏줄이 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다행히 아직 이성은 붙들 수 있었다.

나는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내가 상상하는 미소는 아무렇지 않은 듯 우아하게 웃는 것이었지만 입꼬리의 경련으로 보아 아무래도 썩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미소라도 필요했다.

그렇게 미소 같은 썩소를 지으며 공작을 향해 말했다.

“그것 참 얼굴이 빵빵해서 죄송하네요.”

나도 모르게 빈정거리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공작을 보고 순간 아차 싶었지만 곧 태연하게 차를 마셨다. 이마저도 안 했으면 나는 화병으로 죽었을 테니까.

그때 옆에서 공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나는 이상한 사람 다 본다는 듯이 공작을 흘겨보았다. 그런 내 시선에도 공작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대체 어느 포인트가 웃겼던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일단 잠자코 있었다.

그사이 원하는 만큼 실컷 웃은 공작은 곧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역시 재밌어. 상상한 대로야.”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비웃는 거냐고 화를 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어느 쪽도 떨떠름했기에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닌 듯 공작이 몸을 움직였다. 집게로 음식을 집어 든 그는 그것을 자신의 접시가 아닌, 내 접시로 옮겨 주었다.

놀란 눈으로 접시 위에 가지런히 놓인 음식을 보고 있는데 때마침 공작이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먹어. 작가님을 위한 특식이야.”

“특식……이요?”

“응. 이거 먹고 열심히 글을 써야 할 테니까.”

그 말을 들으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차라리 안 먹고 글을 안 쓰고 싶어졌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작은 그저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좀 있으면 작가님의 서재가 완성될 거야. 지금쯤이면 거의 정리가 끝났을 테니 원한다면 가 보아도 좋아.”

“서재…….”

저를 감금해서 글을 쓰게 할 그 감옥 말이죠?

그 말이 입 안에서 굴러다녔지만 침착하게 다시 삼켜 냈다. 대신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말하자.

말해야 한다, 필리아. 아무리 이 남자가 그 아벨하임 공작이라도 말해야 해.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공작은 안 먹고 뭐 하냐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이내 입을 열었다.

“각하, 한 마디만 해도 될까요?”

“말해.”

“저를 집에 보내 주세요.”

내 말에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미소는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눈짓 하나만으로도 몸이 움찔했다.

하지만 당당하게 보이려고 애쓰며 뒷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출간일이 미뤄진 건 작가로서 죄송하게 생각해요. 그래도 감금은 아니잖아요. 다음 권은 제가 어떻게든 서둘러서 내 볼 테니까, 그때까지만 참고 기다리시면…….”

“언제?”

그의 물음에 말을 술술 내뱉던 내 입이 텁 다물렸다. 공작은 위험한 느낌이 드는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음 권을 언제 낼 건데?”

“그건……. 최대한 빨리…….”

“나는 참을성이 그렇게 많지 않아. 지금도 충분히 오래 기다린 상태야.”

공작은 잔을 흔들더니, 그 안에서 출렁이는 물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작가님은 지금 슬럼프지. 언제 책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얌전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 독자 된 입장에서, 절대 그럴 수는 없지.”

“각하…….”

“그리고 말했잖아.”

잔을 테이블 위에 턱 올려놓은 그는 갑자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숨을 삼켰다.

긴장한 내 모습이 마음에 든다는 듯 그가 싱긋 웃으며 옆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나는 작가님을 납치한 게 아니야.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보살피기 위해 데려온 것뿐이지.”

머리를 빗어 내리는 그의 손길이 위험하게 느껴졌다.

몸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는 사이, 그의 속삭임이 귓가에 머물렀다.

“그러니 또 한번 납치, 감금이라는 단어를 썼다가는…….”

공작의 붉은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그는 손가락 하나로 내 뺨을 스윽 쓸어내렸다.

“나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딸꾹…….”

너무 놀란 나머지 입에서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공작은 방금까지 내뿜던 위험한 기운을 집어넣고 싱긋 웃었다.

“음식이 식겠어. 어서 먹어, 작가님. 그리고 나를 위해 글을 써 줘.”

그 말을 끝으로 공작은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얌전히 식사하는 그를 가만히 보다가 결국 따라서 포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