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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아가씨, 아벨하임 공작님이라면…….”

메리 또한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메리도 그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메리를 내 뒤에 숨기며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메리의 말이 흥미로운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 작가님도 귀족이야?”

그의 물음에 순간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내가 귀족이라는 것을 밝히면 아무리 그라도 그냥 얌전히 보내 주지 않을까?

꽤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긴장한 마음을 숨긴 채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 그래요. 저는 귀족이에요. 이 아이는 저를 곁에서 보필하는 제 전속 하녀고요. 지금 각하께서는 귀족을 납치하신 거라고요.”

그러니까 얼른 우리를 집으로 보내 달란 말이야!

빽 외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귀족을 납치하는 것은 꽤나 큰 문제였다. 그것이 도적이 되었든, 귀족이 되었든. 그러니 아무리 그가 그 유명한 아벨하임 공작이라고 해도 우리를 순순히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내 말에 담긴 협박을 눈치챘는지 공작은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왠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작가님, 아무래도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네? 그게 무슨…….”

“나는 작가님을 납치한 게 아니라 보살피려고 데려온 것뿐이야.”

그의 말이 망치가 되어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내가 ‘보살피다’의 정의를 잘못 알고 있는 건가?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공작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어느 귀족 가문이든 지도에서 사라지게 만들 수 있어. 사람들의 인식 또한 바꿀 수 있지. 하지만 그러지 않고 있잖아?”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의 말에 담긴 협박이 직설이 되어 내 귀에 꽂혔다.

반면 공작은 어린아이처럼 ‘나 잘했지?’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 일도 납치가 아니라 그저 데려온 것뿐이야.”

“……저를 데려와서 어쩌시려고요?”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공작은 이제야 말이 통한다는 얼굴로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글을 쓰게 할 거야.”

“……네?”

“지금 집필 중단 중인 그 작품, 다음 편을 보고 싶어.”

할 말을 잃어버렸다.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나를 납치했다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승낙을 할 수도, 그렇다고 거절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더 그랬다.

고민하고 있는 그때, 내 뒤에서 얌전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메리가 튀어나와 공작에게 외쳤다.

“그, 그건 불가능해요!”

“불가능하다고?”

공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식겁해서 메리의 팔을 붙잡았지만 그녀의 입이 더 빨랐다.

“지금 아가씨께서는 슬럼프시라고요!”

나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메리 딴에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보려고 한 것이겠지만 내가 볼 때는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방 안이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 오직 메리만이 긴장한 얼굴로 공작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공작은 곧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입을 열었다.

“잘됐네! 다음 편도 쓰고, 슬럼프도 극복하고 좋잖아?”

그의 말에 당황한 듯 메리의 동공이 흔들렸다. 나 또한 황당한 표정으로 공작을 보았다.

무슨 저런 미친놈이 다 있어?

이미 화려한 첫인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 안에서의 공작은 그저 또라이였다.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공작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작가는 마감이 닥쳐야 글을 쓴다지?”

“그, 그건…….”

“내가 마감이 되어 줄게.”

그 말에 나와 메리의 몸이 동시에 굳었다. 공작은 그저 천사처럼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마감이 코앞에 있으면 아무리 슬럼프라도 글이 써지지 않을까?”

할 말이 많았지만 그것이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메리 또한 말을 잊어버린 눈치였다.

공작은 그런 우리에게 쐐기를 박았다.

“다음 편을 내놓을 때까지 작가님은 내 저택에서 나가지 못할 거야. 단 한 발짝도.”



* * *



“죄송해요, 아가씨……. 제가 괜한 말을…….”

“네 잘못 아니야, 메리. 봤잖아. 공작이 얼마나 또라이인지.”

내 말에 메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염이 되기라도 했는지 내 입에서도 한숨이 작게 새어 나왔다.

공작은 막무가내로 통보한 이후 기사를 시켜 나와 메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기사는 방을 나서며 편히 쉬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헤어지기 전, 공작이 내게 했던 말 때문이었다.



“내일이면 작가님을 위한 서재가 완성될 거야. 작가님은 앞으로 그곳에서 글을 쓰게 될 거고. 기대해도 돼.”



기대는 개뿔.

나는 현실에서 하지 못했던 짓을 머릿속에서 마음껏 저질렀다. 공작의 잘생긴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말이 나를 위한 서재지, 나를 그곳에 감금해 글을 뽑아내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생각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는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분노에 떨며 공작을 폭행하는 상상을 하던 나는 곧 다 내던지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긴,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현실에서는 그에게 대들 수조차 없는데.

“아가씨, 괜찮으세요?”

한숨을 쉬는 모습을 보고 걱정이 되었는지 메리가 물었다. 그에 힘겹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아니, 괜찮아야지. 이곳에서 빠져나가려면.”

“아가씨…….”

“내가 메리 너만큼은 이곳에서 나갈 수 있도록 해 볼게. 그러면 너는 곧장 아버지와 어머니께 가서 내 상황을 알리고…….”

“자작님과 마님께 알린다고 해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메리의 확신 없는 물음에 입이 다물렸다. 나 또한 메리처럼 확신이 없었다.

나는 머릿속에서 공작에 대한 정보를 끄집어냈다. 그에 대해 모르고 싶어도 그동안 들려온 것들에 의해 생겨난 정보들이었다.

아벨하임 공작, 풀 네임은 ‘반 클라우드 아벨하임’. 황가 다음으로 제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아벨하임 공작가의 젊은 공작.

그는 제국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을뿐더러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공작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제국에는 꽤 큰 조직이 있었다. 극악무도한 짓만 골라서 하는 통에 당시 황가는 그놈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어찌나 교활한 놈들인지 자신들이 저지른 짓의 증거란 증거는 모두 인멸해 버린 탓이었다. 아무리 황가라도 심증만 갖고는 놈들을 잡아넣을 수 없었다.

모두가 그 조직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던 무렵, 어느 날 아벨하임 공작이 자신의 기사단과 함께 조직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갔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은 조직 우두머리의 머리채를 붙잡고 밖으로 나왔다. 그의 뒤로 조직원들이 피를 흘리며 기절해 있었다고 했다.

조직을 무너뜨린 것은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나 여전히 증거가 없었다. 그에 모두 그가 징계를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 그가 잡아온 조직의 우두머리가 자백을 했다. 지금까지 저질렀던 일들을 남김없이 발설한 덕에 공작은 징계 대신 상을 하사받았다.

여기까지만 들어서는 그가 대단한 사람처럼 들리지만 사실 공작이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그 또라이 같은 인성 때문이었다.

귀족들은 아벨하임 공작과 가까이 지내고 싶어 하면서도 기피했다. 언제 어떻게 그에게 찍혀 무너질지 알 수 없었던 탓이었다.

오죽하면 공작이 조직의 근거지로 쳐들어간 이유가 따로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애초에 그는 조직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나, 그가 아끼는 물건을 놈들의 우두머리가 망가뜨리는 바람에 그의 화를 불러일으켰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공작이 놈에게 무슨 짓을 했고, 때문에 놈들의 우두머리가 공포에 떨며 자백했다는 소문도 자자했다.

‘진실이야 어찌 됐든, 가까이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인간이야.’

자작가에서 그 소문들을 들었을 때만 해도 설마 그렇게까지 미친놈일까 싶었는데 실제로 보니 소문보다 더한 놈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곳에서 생활하며 빠져나갈 기회를 엿보는 것.

“아가씨, 밤이 늦었어요. 일단 주무시는 게 어떨까요?”

메리의 말에 시계를 보니 어느새 새벽이 되어 있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런 낯선 곳에서 잠이 오려나 모르겠네…….”



* * *



하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잠이 안 오긴 무슨. 생전 느껴 보지 못한 침대의 폭신함에 나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아무래도 다사다난한 하루에 몸이 지쳐 버린 듯했다.

“눈치 없는 몸 같으니. 납치된 주제에 푹 자 버리다니.”

민망한 마음에 얼굴을 붉히자 메리가 난감하게 웃었다. 얼굴을 보니 메리도 나처럼 푹 잔 듯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노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부터 누가 찾아온 건가 싶어 의아한 눈으로 메리를 보았지만 그녀 또한 모르는 눈치였다.

당황한 마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문밖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일어나셨습니까? 준비를 도와드리려고 하는데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아무래도 공작가의 하녀가 온 모양이었다. 나는 일단 상대가 공작이 아니라는 것에 안심하며 문밖의 하녀에게 말했다.

“아, 들어와도 돼.”

“실례하겠습니다.”

내가 들어오라고 하기는 했지만 곧 당황했다. 끽해야 두세 명 정도 들어올 거라 생각했는데 하녀들이 우루루 들어온 탓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손에는 무언가가 잔뜩 들려 있었다. 김이 폴폴 나는 따뜻한 물부터 화려한 드레스가 잔뜩 걸린 이동식 행거, 그리고 종류가 다양한 화장품까지.

내가 당황하든 말든 그들은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각자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중 한 그룹이 내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목욕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욕실로 가시지요.”

“아, 그, 그래.”

나는 그들을 따라가며 뒤에 멍하니 서 있는 메리에게 눈짓을 했다. 내 시선을 받은 메리는 그제야 핫 하며 정신을 차리고 나를 졸졸 쫓아왔다.

침실에 이어져 있는 욕실로 들어가자 하녀들이 욕조의 물에 입욕제를 풀고 있었다. 달콤한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들의 도움으로 탈의를 마치고 천천히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딱 좋은 온도가 몸을 살살 녹였다.

“향은 어떠세요?”

“너무 좋아. 마음에 쏙 들어.”

한 하녀의 물음에 진심을 담아 대답하자 모두 빙긋 웃었다.

이대로 물에 녹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뜨거운 물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안 좋다는 하녀들의 말에 결국 아쉬운 마음을 내려놓고 물에서 나왔다.

가운을 몸에 걸친 뒤 다시 침실로 들어가자 드레스 그룹의 시선이 쏟아졌다. 갑작스럽게 시선이 몰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그들은 내가 놀라거나 말거나 태연하게 다가왔다. 아니, 어쩐지 급해 보이기도 했다.

어리둥절해하며 드레스 행거 앞에 서자 하녀들이 양쪽에서 드레스를 동시에 내밀었다.

“이거 어때?”

“예쁘긴 한데 아가씨께는 안 어울리는 것 같아.”

“그럼 이건?”

“너무 평범해.”

그렇게 행거에 있는 거의 모든 드레스를 몸에 대 보고 나서야 겨우 모두의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찾아냈다. 결정이 나자 나는 가운을 벗고 하녀들의 도움으로 드레스를 입기 시작했다.

요즘 같은 봄에 어울리는 화사한 노란빛의 드레스였다. 목 부근이 쇄골까지 둥글게 파여 있었지만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가슴 쪽에 흰색 프릴이 달린 덕이었다.

등 뒤로 진한 노란색의 리본까지 묶고 나서야 드레스 착의가 끝났다. 드디어 끝이구나 싶어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하지만 내게는 아직 화장이라는 관문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