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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높이 떠오른 달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어둠에 휩싸인 밤이었다.
석후는 여느 때처럼 늦은 시간까지 서책을 읽다 뒤늦게 잠에 들었다.
그래서인지 아스라이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도 깨어나지 못했다.
이윽고 다급함이 느껴지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날랜 움직임으로 침소에 들이닥쳤다.
그는 석후의 담당 시동인 율려였다.
얼마나 급히 달려왔는지, 봄동이 나기 전의 추운 새벽임에도 율려의 온몸에서는 뜨거운 김이 흘러나왔다.
그는 몸의 열기를 식히지도 못한 채 급히 석후를 흔들어 깨웠다.
“소공자님, 어서 일어나십시오!”
가쁜 숨 때문에 율려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으음… 대체 무슨 일이야, 율려?”
잠에서 덜 깬 탓에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석후였다.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러니 지금은 우선 저를 따라 몸을 피하셔야 해요!”
다급한 재촉에 석후는 문득 고개를 돌려 침소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끔찍한 비명 소리가 연신 들려오는 것이, 무언가 큰 사단이 난 듯했다.
놀란 마음에 잠이 달아난 석후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걸음을 옮겨 막 침소를 나서려는 순간, 문이 부서지며 파편이 율려와 석후를 덮쳤다.
엉겁결에 눈을 깜빡인 석후는 웬 복면인이 달려드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위험해!”
그와 동시에 석후는 우두커니 서 있는 율려의 팔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런 석후의 노력이 부질없게도 율려의 머리는 너무도 간단히 몸에서 떨어졌다.
“율려!”
머리를 잃은 목에서는 선홍빛 선혈이 마치 분수처럼 뿌려졌다.
믿을 수 없는 참극에 석후는 넋을 잃은 채 멍하니 쏟아지는 피를 뒤집어썼다.
온몸이 굳어 버린 듯 석후가 느린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려 복면인을 바라보는 순간, 복부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커흑…….”
쓰러지듯 주저앉는 석후를 걷어 차 검을 빼낸 복면인은 마치 아무 일도 없던 듯 유유히 침소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이대로 죽게 되는 것인가. 도대체 왜…….’
석후는 점점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의문을 풀 수가 없었다.
그때, 석후의 귓가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장건, 모두 처리했는가?”
“네. 전부 마무리되었습니다, 대주님.”
‘장건… 대주…….’
낯선 이름을 가만히 되뇌며 석후는 정신을 잃었다.
힘겹게 눈을 뜬 석후가 몸을 일으키려 힘을 주는 순간,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온몸을 덮쳤다.
“끄으…….”
이를 악물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석후는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는 복부를 보며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율려의 잘린 머리와 뿜어져 나온 피로 인해 빨갛게 물든 바닥이 보였다.
“율려…….”
그 참혹한 광경과 온몸을 타고 흐르는 고통이 자신이 겪은 일이 꿈이 아님을 여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석후는 더 이상 쾌활한 율려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그와 동시에 감정이 복받치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동안 고마웠어, 율려.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해…….’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율려의 죽음을 애도한 석후는 비로소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일단 밖으로 나가기 전에 지혈을 해야겠다 판단한 석후는 방 한구석에 놓인 옷장으로 향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옷가지를 꺼내 든 석후는 거침없이 천을 찢어 복부를 세게 압박하며 칭칭 둘러 감았다.
상처에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고통은 석후에게 의문이 들게 했다.
‘이걸로 괜찮을까……?’
타는 듯한 고통은 여전했지만, 자신처럼 목숨을 건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행동을 서둘렀다
침소를 나서며 석후는 율려의 모습을 눈에 다시 한 번 담았고, 이내 걸음을 옮겼다.
가족과 더불어 식솔들 중 자신처럼 생존자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석후의 기대는 침소를 나서자마자 산산이 부서졌다.
장내에는 식솔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그들이 흘린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물씬 풍겨 오는 피비린내가 석후의 머리를 한층 더 어지럽게 하였다.
“우욱…….”
끔직한 참상에 절로 욕지기가 치밀었지만, 석후는 가족들 생각에 다시 몸을 가눴다.
고통을 참아 내며 멍하니 걸음을 옮기던 석후의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춘막 형…….”
석후는 부들부들 떨며 춘막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언제나 표행 중 겪은 일을 재미난 입담으로 이야기해 주던 그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사지가 잘려 나간 채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부릅뜬 그의 눈을 감겨 준 석후는 힘겹게 다시 몸을 일으켜 부모님의 침소로 걸음을 옮겼다.
“장씨 아저씨… 총관 아저씨까지…….”
지난날, 행복한 기억을 공유하던 이들은 모두 싸늘한 주검이 되어 석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힘겹게 버티던 석후는 부모님의 침소에 들어가자마자 결국 무너져 버렸다.
“아버지!”
온몸을 괴롭히던 고통도 잊은 채 달려간 석후는 아버지, 석가장주 석운의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했다.
“아아, 아버지… 아버지…….”
석운의 몸은 격렬한 저항의 흔적을 보여 주듯 크고 작은 상처들로 가득했다.
한참을 목 놓아 울던 석후는 문득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소 곳곳을 살펴보았지만, 어디에도 어머니의 흔적은 없었다.
석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침소 뒤편으로 난 쪽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
불길하게 닥쳐드는 예감을 애써 부정하며 다가간 석후는 기어코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고야 말았다.
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차갑게 굳어 있는 그 시신은 석후의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등에는 두 개의 검상이 흉측하게 새겨져 있었다.
“하아, 하아…….”
석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엉금엉금 어머니를 향해 기어갔다.
다가가 살펴보니 어머니는 무엇이 그리도 원통한지 두 손을 꼭 움켜쥔 채 굳어 있었다.
그 순간, 가뜩이나 위태롭게 유지되던 석후의 정신은 갈가리 찢어져 버렸다.
“어머니! 어머니! 으아!!”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석후는 온갖 소리를 지르더니, 광인처럼 바닥을 향해 연거푸 주먹을 내리쳤다.
소리를 지를 때마다 복부의 통증은 더욱더 심해졌고, 동여맨 옷 사이로 피가 새어 나왔다. 주먹이 찢어져 피가 튀었으나, 석후는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였다.
한참이 지나 더 이상 소리를 지를 힘도, 주먹을 내리칠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석후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깊은 어둠이 옅어지고 해가 떠오를 즈음, 석후는 비로소 이성을 되찾았다.
예를 갖춰 모든 이들의 장례를 치러 주고 싶지만, 현재 석후의 몸으로는 어림도 없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화장을 택했다.
석후는 힘든 몸을 억지로 가누며 장원 곳곳에 널브러진 식솔들의 시신을 전각으로 모았다.
그 와중에 몇 번이나 혼절할 뻔했지만,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덜어 내기라도 하려는 듯 그의 노력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윽고 모든 작업을 마친 석후는 기억에 새기듯 식솔들의 모습을 눈에 담은 후,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불을 놓았다.
초봄의 차디찬 바람 탓에 수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전각은 순식간에 타들어 가기 시작하였다.
거대한 불기둥은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맹렬히 타올랐지만, 석후는 그 속에서 여전히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식솔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석후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윽고 모든 것이 타 버리고 난 뒤, 주위는 적막에 빠져들었다.
거센 바람 소리도 멈추고, 이따금씩 들려오던 짐승의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제야 석후는 눈을 천천히 떴다.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검게 타 버린 재만이 바람에 휘날릴 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슬픔으로 오열을 거듭하던 석후의 두 눈은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재가 되어 버린 석가장을 뒤로한 채 석후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높이 떠오른 달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어둠에 휩싸인 밤이었다.
석후는 여느 때처럼 늦은 시간까지 서책을 읽다 뒤늦게 잠에 들었다.
그래서인지 아스라이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도 깨어나지 못했다.
이윽고 다급함이 느껴지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날랜 움직임으로 침소에 들이닥쳤다.
그는 석후의 담당 시동인 율려였다.
얼마나 급히 달려왔는지, 봄동이 나기 전의 추운 새벽임에도 율려의 온몸에서는 뜨거운 김이 흘러나왔다.
그는 몸의 열기를 식히지도 못한 채 급히 석후를 흔들어 깨웠다.
“소공자님, 어서 일어나십시오!”
가쁜 숨 때문에 율려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으음… 대체 무슨 일이야, 율려?”
잠에서 덜 깬 탓에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석후였다.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러니 지금은 우선 저를 따라 몸을 피하셔야 해요!”
다급한 재촉에 석후는 문득 고개를 돌려 침소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끔찍한 비명 소리가 연신 들려오는 것이, 무언가 큰 사단이 난 듯했다.
놀란 마음에 잠이 달아난 석후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걸음을 옮겨 막 침소를 나서려는 순간, 문이 부서지며 파편이 율려와 석후를 덮쳤다.
엉겁결에 눈을 깜빡인 석후는 웬 복면인이 달려드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위험해!”
그와 동시에 석후는 우두커니 서 있는 율려의 팔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런 석후의 노력이 부질없게도 율려의 머리는 너무도 간단히 몸에서 떨어졌다.
“율려!”
머리를 잃은 목에서는 선홍빛 선혈이 마치 분수처럼 뿌려졌다.
믿을 수 없는 참극에 석후는 넋을 잃은 채 멍하니 쏟아지는 피를 뒤집어썼다.
온몸이 굳어 버린 듯 석후가 느린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려 복면인을 바라보는 순간, 복부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커흑…….”
쓰러지듯 주저앉는 석후를 걷어 차 검을 빼낸 복면인은 마치 아무 일도 없던 듯 유유히 침소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이대로 죽게 되는 것인가. 도대체 왜…….’
석후는 점점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의문을 풀 수가 없었다.
그때, 석후의 귓가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장건, 모두 처리했는가?”
“네. 전부 마무리되었습니다, 대주님.”
‘장건… 대주…….’
낯선 이름을 가만히 되뇌며 석후는 정신을 잃었다.
힘겹게 눈을 뜬 석후가 몸을 일으키려 힘을 주는 순간,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온몸을 덮쳤다.
“끄으…….”
이를 악물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석후는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는 복부를 보며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율려의 잘린 머리와 뿜어져 나온 피로 인해 빨갛게 물든 바닥이 보였다.
“율려…….”
그 참혹한 광경과 온몸을 타고 흐르는 고통이 자신이 겪은 일이 꿈이 아님을 여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석후는 더 이상 쾌활한 율려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그와 동시에 감정이 복받치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동안 고마웠어, 율려.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해…….’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율려의 죽음을 애도한 석후는 비로소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일단 밖으로 나가기 전에 지혈을 해야겠다 판단한 석후는 방 한구석에 놓인 옷장으로 향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옷가지를 꺼내 든 석후는 거침없이 천을 찢어 복부를 세게 압박하며 칭칭 둘러 감았다.
상처에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고통은 석후에게 의문이 들게 했다.
‘이걸로 괜찮을까……?’
타는 듯한 고통은 여전했지만, 자신처럼 목숨을 건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행동을 서둘렀다
침소를 나서며 석후는 율려의 모습을 눈에 다시 한 번 담았고, 이내 걸음을 옮겼다.
가족과 더불어 식솔들 중 자신처럼 생존자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석후의 기대는 침소를 나서자마자 산산이 부서졌다.
장내에는 식솔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그들이 흘린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물씬 풍겨 오는 피비린내가 석후의 머리를 한층 더 어지럽게 하였다.
“우욱…….”
끔직한 참상에 절로 욕지기가 치밀었지만, 석후는 가족들 생각에 다시 몸을 가눴다.
고통을 참아 내며 멍하니 걸음을 옮기던 석후의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춘막 형…….”
석후는 부들부들 떨며 춘막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언제나 표행 중 겪은 일을 재미난 입담으로 이야기해 주던 그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사지가 잘려 나간 채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부릅뜬 그의 눈을 감겨 준 석후는 힘겹게 다시 몸을 일으켜 부모님의 침소로 걸음을 옮겼다.
“장씨 아저씨… 총관 아저씨까지…….”
지난날, 행복한 기억을 공유하던 이들은 모두 싸늘한 주검이 되어 석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힘겹게 버티던 석후는 부모님의 침소에 들어가자마자 결국 무너져 버렸다.
“아버지!”
온몸을 괴롭히던 고통도 잊은 채 달려간 석후는 아버지, 석가장주 석운의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했다.
“아아, 아버지… 아버지…….”
석운의 몸은 격렬한 저항의 흔적을 보여 주듯 크고 작은 상처들로 가득했다.
한참을 목 놓아 울던 석후는 문득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소 곳곳을 살펴보았지만, 어디에도 어머니의 흔적은 없었다.
석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침소 뒤편으로 난 쪽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
불길하게 닥쳐드는 예감을 애써 부정하며 다가간 석후는 기어코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고야 말았다.
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차갑게 굳어 있는 그 시신은 석후의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등에는 두 개의 검상이 흉측하게 새겨져 있었다.
“하아, 하아…….”
석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엉금엉금 어머니를 향해 기어갔다.
다가가 살펴보니 어머니는 무엇이 그리도 원통한지 두 손을 꼭 움켜쥔 채 굳어 있었다.
그 순간, 가뜩이나 위태롭게 유지되던 석후의 정신은 갈가리 찢어져 버렸다.
“어머니! 어머니! 으아!!”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석후는 온갖 소리를 지르더니, 광인처럼 바닥을 향해 연거푸 주먹을 내리쳤다.
소리를 지를 때마다 복부의 통증은 더욱더 심해졌고, 동여맨 옷 사이로 피가 새어 나왔다. 주먹이 찢어져 피가 튀었으나, 석후는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였다.
한참이 지나 더 이상 소리를 지를 힘도, 주먹을 내리칠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석후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깊은 어둠이 옅어지고 해가 떠오를 즈음, 석후는 비로소 이성을 되찾았다.
예를 갖춰 모든 이들의 장례를 치러 주고 싶지만, 현재 석후의 몸으로는 어림도 없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화장을 택했다.
석후는 힘든 몸을 억지로 가누며 장원 곳곳에 널브러진 식솔들의 시신을 전각으로 모았다.
그 와중에 몇 번이나 혼절할 뻔했지만,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덜어 내기라도 하려는 듯 그의 노력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윽고 모든 작업을 마친 석후는 기억에 새기듯 식솔들의 모습을 눈에 담은 후,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불을 놓았다.
초봄의 차디찬 바람 탓에 수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전각은 순식간에 타들어 가기 시작하였다.
거대한 불기둥은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맹렬히 타올랐지만, 석후는 그 속에서 여전히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식솔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석후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윽고 모든 것이 타 버리고 난 뒤, 주위는 적막에 빠져들었다.
거센 바람 소리도 멈추고, 이따금씩 들려오던 짐승의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제야 석후는 눈을 천천히 떴다.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검게 타 버린 재만이 바람에 휘날릴 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슬픔으로 오열을 거듭하던 석후의 두 눈은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재가 되어 버린 석가장을 뒤로한 채 석후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