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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하녀와 견사지기 (1)





애들레이드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 바로 기회였다.

신통한 아르튀르는 나를 위해서 에테르를 사용해 옷 한 벌을 뚝딱 만들어 주었다. 그 옷은 한눈에 보기에도 하녀의 제복 같았다.

하지만 투박한 그 디자인은 황녀궁의 하녀들이 입는 제복과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이 제복은 헤쉬리언 대공국의 하녀들이 입는 옷이란다. 아치볼트가 제국으로 넘어오면서 거느리던 시종과 하녀도 여럿 대동해 왔지. 만약 누가 네 신분을 묻거든 아치볼트의 하녀라고 둘러대렴.”

“끙, 나한테 너무 잘해 주지 마.”

“어째서?”

너무 잘해 주면 단단하던 내 의심이 흐물흐물 부서질 것 같았다.

내 몸에 딱 맞는 제복으로 갈아입으면서도 나는 복잡한 심경을 어찌할 줄 몰랐다. 인간의 몸으로 변신하려면 나에게 아치볼트와 아르튀르가 꼭 필요했다. 그런데 그들을 완전히 신뢰해도 될까?

나는 태어나 줄곧 이곳에서 애들레이드와 함께 지냈다. 이따금 그녀가 나를 데리고 궁전을 누비기도 했어도 딱 거기까지였다. 나의 세계는 너무나 비좁고 가냘프다.

일종의 일탈을 원하는 욕구가 쌓이고 쌓여서 결국 나는 아르튀르의 간특한 혀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내가 없어진 걸 알면 애들레이드가 굉장히 걱정할 거야.”

“그건 걱정하지 마, 작은 아가씨.”

아르튀르가 아주 가볍게 공중으로 재주를 넘었다. 그랬더니 검은 고양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하얗고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가 바닥으로 착지했다.

“우와.”

“네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이곳은 내가 지키고 있으마. 대신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와야 해. 그쯤 되면 너의 에테르도 바닥이 날 테니.”

“알겠어.”

아르튀르가 빌려준 소량의 에테르를 가지고 나는 오늘 반나절 동안 인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씩 에테르를 공급받아서 인간의 몸을 유지하도록 훈련해야 한다는 게 아르튀르의 조언이었다.

그동안 나는 조촐한 일탈을 감행하기로 했다. 바로 실버르세트 제국의 웅장하고도 위대한 하얀 궁전을 탐방하기로 했다.

“날씨도 좋은데 이왕이면 궁전 뒤에 있는 사냥터를 산책해 보는 게 어떻겠니?”

“그게 어디 있는데?”

“황녀궁을 나가서 푸른 장미가 그려진 벽을 쭉 따라가기만 하면 돼. 찾아가기 쉬우니까 네가 길을 잃을 염려도 없지.”

“좋았어.”

나는 작고 귀여운 강아지로 분한 아르튀르를 그 자리에 남겨 두고 살금살금 그곳을 떠났다. 그러고 황녀궁을 나서자마자 나는 아르튀르가 일러 준 대로 푸른 장미가 그려진 벽을 찾았다.

하얗게 쌓아 올린 석조 벽과 연철제가 장식된 그곳에는 생생한 푸른 장미의 그림이 연연했다. 벽을 손으로 짚으며 길을 걷는데, 왼편으로 보이는 황궁의 정경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고 또 거대했다.

화창한 날씨를 올려다보면서 나는 황궁을 오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구경했다. 그러면서도 다리는 부지런히 황실 사냥터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아득하게 광활한 황궁의 규모에 내가 질릴 대로 질릴 때쯤에야 겨우 사냥터의 입구처럼 보이는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냥터에 가 보라고 했던 아르튀르를 시원하게 때리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 언저리까지 턱턱 치고 올라온다. 이게 무슨 산책이야?

슬슬 허벅지가 땅기는데, 이대로 돌아가기가 아까워서 나는 꿋꿋이 사냥터의 입구를 서성거렸다. 그런데 하필이면 입구에는 근엄하게 생긴 경비병들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이런, 저걸 어떻게 뚫고 가지?

“저, 저기 실례합니다…….”

“무슨 일이지?”

“저는 아치볼트 대공님의 하녀입니다. 대공님께서 다음 사냥 때 쓰실 사냥개를 골라 오라 하셔서 그러는데 이곳을 지나가도 될까요?”

그러자 두 경비병은 눈짓으로 나를 훑어보더니 선선하게 사냥터의 입구를 열어 주었다. 이거 의외로 순조로운데?

사냥터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사냥터라고 해서 황량한 들판을 상상했는데 그곳은 녹음이 무성한 산언저리였다.

새가 지저귀고, 푸르른 이파리에서는 싱그러운 냄새가 난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서 내 속에 아르튀르를 때리고 싶다는 충동을 금세 사그라뜨렸다.

한참 녹녹하게 젖은 수풀 사이를 걷던 나는 어디선가 풍겨 오는 찝찌레한 냄새를 맡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강아지의 본능이 내게 말했다. 바로 이 앞에 견사가 있다고.

퀴퀴한 동족의 냄새에 나는 코를 한 손으로 싸쥐었다. 사람의 몸이 되어도 강아지의 특성은 여전히 남아 있구나.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견사 정도는 구경해도 되겠지.

수풀을 지나자 거목이 없는 너른 들판이 나왔다. 그리고 저편으로 견사처럼 생긴 건물과 한 채의 오두막이 보였다.

그곳으로 다가가니 냄새가 한층 더 심해졌다. 언뜻 보면 마구간처럼 생긴 그곳의 철창 울타리를 기웃거리자, 우리에 갇힌 개들이 나를 발견하고 신나게 컹컹 짓기 시작한다.

“조, 조용히 해!”

나는 그냥 구경 왔거든?

몸집이 커다란 사냥개를 보니까 엄청나게 위축된다.

“끄응, 왕! 앙앙!”

질 수 없다.

기죽지 마, 엘리자베스. 너는 무려 고귀한 애들레이드 황녀의 애완견이잖아!

나는 큰 개들에게 당장이라도 덤빌 기세로 우렁차게 왕왕 짖어 댔다.

“거기 누구시죠?”

아뿔싸, 사람이 있었어.

하기야 견사에 돌보는 사람이 없으면 말이 안 되지. 나도 모르게 개들이랑 기 싸움 하느라 잊고 있었다.

목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자, 견사 근처에 있던 오두막에서 어떤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리고 머쓱해지려던 차에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귀한 신분이 입을 수 있는 비단옷을 걸친 것도 아닌데, 그 남자는 서 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세상 누구보다 존귀해 보였다.

스무 살 언저리쯤으로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소년 같은 애티가 잔뜩 묻어 있었다. 조물주가 아주 섬세하게 빚어 만든 희대의 예술품처럼 이목구비가 무척이나 또렷했고, 밀랍 인형을 닮은 창백한 피부는 이질적이었다.

단호할 정도로 새카만 머리카락이 그가 앞으로 걸어 나올 때마다 은은한 향을 풍기면서 찰랑거렸다. 황금빛 눈동자 또한 너무나 맑고 영롱해서, 그 빛은 마주한 사람의 마음을 순식간에 앗아 가기 충분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내 앞에 돌연 나타난 그 남자의 아찔한 미모는 단번에 아치볼트 대공을 오징어로 전락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리저리 훑어보아도 도무지 사람 같지가 않다.

그런데 나는 그의 미모를 보고 감탄사가 아닌 새된 비명을 질렀다.

“피, 피, 피!”

그의 두 손은 시뻘겋게 물들어 있는 것도 모자라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당황해서 발을 동동 구르자, 그가 침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다친 게 아니야. 방금 사냥개 한 마리가 새끼를 낳았거든.”

“아…….”

“여기는 어쩐 일이니?”

“저, 그게, 저는…… 아치볼트 대공님의 하녀로…….”

말소리가 어쩐지 목에 걸려서 나오지를 않는다.

이제까지 이 궁전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라면 애들레이드의 시녀 사라라고 생각했는데, 이 남자는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치명적인 미학의 영역을 보란 듯이 넘어서고 있었다.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경외감이 차올라서 숨이 막힌다.

그런데 왜 이런 예쁜이가 견사나 지키고 있는 거야?

“혹시 길을 잃었니?”

“어, 그러니까…….”

내가 멍청하게 더듬거리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가만히 내가 말하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좀처럼 목소리가 나오지를 않자, 얌전히 기다리던 그가 먼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길을 잃은 거라면 입구까지 안내해 줄게. 우선 뒤처리할 때까지 기다려 줄래?”

“아, 알겠어요.”

“강아지들이 건강하게 태어났어. 너도 보고 싶니?”

내가 끄덕거리자, 그가 웃었다. 그는 웃는 얼굴도 아찔하게 예뻤다.

그가 돌아서서 나를 오두막으로 안내했다. 오두막 안쪽에서는 비릿한 피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끙끙 앓는 강아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와, 예뻐.”

꼬물거리는 분홍색 살덩어리들이 담요 위에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나도 태어날 때 이렇게 생겼었겠지.

“방금 탯줄을 정리했어. 씻겨야 하는데 좀 도와줄래?”

“뭐부터 하면 돼요?”

“우선 손을 씻고, 젖은 수건으로 강아지들을 닦아 줘.”

남자는 턱짓으로 탁자 위에 있는 커다란 대야를 가리켰다.

따듯한 김이 피어오르는 대야에 깨끗하게 손을 씻은 나는 수건을 적셔서 핏물이 묻어 있는 강아지 한 마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왠지 신기하다.”

“모두 아무 탈 없이 무사히 태어나 줬어. 아주 대견해.”

그가 피 묻은 손을 헝겊으로 닦아 내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그러게요.”

“너도 대견해.”

“제, 제가요?”

뜬금없는 이야기에 나는 강아지의 몸을 닦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린 나이에도 대공님을 모시고 있잖아.”

“헤헤, 뭘요.”

아아, 거짓말 때문에 양심이 따끔거린다. 사실 바로 아까까지만 해도 신나게 사료를 먹으면서 쿠션 위를 굴러다녔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강아지들의 몸을 살살 닦아 냈다.

젖은 수건으로 야무지게 강아지를 닦아 내면서 나는 문득 그가 궁금해졌다. 그는 강아지들의 어미로 보이는 개를 쓰다듬으면서 물을 먹여 주고 있었다.

몰래 그의 옆모습을 훔쳐보는데 별안간 시선이 마주쳤다. 아이고, 심장 쪼여!

“무슨 일 있니?”

“아니, 이, 이름…….”

“이름? 내 이름?”

“네.”

내가 생각해도 방금 내 목소리 너무 얼간이 같았어.

내 입술은 그의 형형한 존재감에 압도되어서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나를 부드럽게 녹여 주는 것처럼 차분히 대답해 주었다.

“유진.”

“유진…….”

나도 모르게 소리 내서 그의 이름을 따라 불렀다.

황궁의 사냥터 어귀를 지키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견사지기 청년, 유진. 그것이 그가 가진 이름이었다.

“그러는 너는 이름이 뭐니?”

“엘…….”

유진이 나의 이름을 묻는데 쉽사리 대답하기 어려웠다. 직접 엘리자베스라고 말하기가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

왜 하필 내 이름은 엘리자베스인 걸까? 간단하고 부르기 쉬운 이름이 더 좋았잖아!

나는 처음으로 애들레이드가 지어 준 이 이름을 원망했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지? 무슨 이름이 좋을까?

“엘?”

“저는 엘…… 엘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