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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대공과 고양이 (4)





산책 시간이 끝나자 애들레이드는 사라를 데리고 사교댄스를 배우러 본궁으로 외출을 나갔다.

커다란 제국의 황녀로 태어난 그녀의 일정은 굉장히 빠듯했다. 매일같이 유능한 학자들에게 둘러싸여 고등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이때까지 바쁜 애들레이드를 따라 제대로 황녀궁 밖으로 나서 본 적이 없었다. 겨우 몇 번, 애들레이드가 쓸쓸하다며 나를 안고 황궁을 산책 나간 게 고작이었다.

그 탓에 내가 이 세계에 대해 아는 지식은 무척이나 한정적이고 비좁았다. 아휴, 이 뽀송뽀송하고 깜찍한 앞발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애들레이드의 침소에 다시 홀로 남겨진 내가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는데, 뒤편에서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 아가야.”

아르튀르였다.

그 고양이는 어젯밤처럼 발코니를 통해 몰래 애들레이드의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컹.”

“표정이 복잡해 보이네. 하기는 우리 이야기가 너에게 크게 충격적이겠지.”

몰랐다면 그냥 맘 편하게 애들레이드의 애완견으로 살다 갔겠지요. 왜 애꿎은 강아지 속을 들쑤셔 놓는 거요?

“컹컹, 멍멍, 왕왕!”

따져 보았지만 내 주둥이에서 나오는 것은 강아지가 유별나게 짖는 소리였다.

아이고, 내가 내 입을 가지고도 제대로 사람 말을 못 하다니 이리도 통탄스러울 데가!

“진정하렴, 얘야. 말을 못 해서 답답한 모양이구나.”

아르튀르는 내 갑갑한 속을 읽었는지 살랑살랑 다가와서는 어제처럼 내 주둥이에 자신의 입을 가져왔다.

악, 안 돼! 내 두 번째 뽀뽀까지 네가 강탈해 가면 어떻게 해!

그러나 내가 맹렬하게 짖으며 항의하기도 전에 익숙한 빛깔이 또다시 내 눈앞에서 점멸했다. 번쩍거리는 빛 망울에 휘말린 나는 다시금 어제저녁의 일을 떠올렸다.

나는 재빨리 나의 앞발 하나를 들었다. 그러고 앞발이 쭉쭉 길어지는 듯한 변화를 느끼면서 손가락으로 내 목 뒤에 묶인 리본의 끄트머리를 잡아챘다.

“세이프!”

하마터면 또 리본에 목이 졸려서 허우적거릴 뻔했다.

다행히도 오늘 애들레이드가 내 목에 걸어 준 리본은 여밈쇠로 거는 게 아니라, 단순히 나비 모양으로 매듭짓는 평범한 종류였다. 여밈쇠라도 걸려 있었다면 나는 정말 리본에게 교살되었을 거다.

“오호, 아주 민첩하구나.”

“나도 살아야겠거든.”

“역시 인간의 몸이 움직이기 편하지?”

“말이라고 해? 손가락을 움직일 수도 없는 데다, 말도 안 통하지. 여름에는 털 때문에 아주 미쳐 버리겠다고.”

“그렇다면 어서 빨리 영기와 생기를 조화롭게 사용해서 에테르의 활용 방법을 익혀야겠구나.”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툭 터놓고 가르쳐 줘. 어떻게 하면 그 조잡한 것들을 잘 사용할 수 있는지.”

그러자 아르튀르의 금색 눈동자가 날카로운 빛을 냈다. 살짝 찌푸린 듯한 그 두 눈은 어떻게 보면 사특한 영물을 닮기도 했다.

“정말 알고 싶니?”

“당연하지. 그만 빼고 속 시원하게 가르쳐 달라니까?”

“나도 너에게 가르쳐 줘서 손해 보는 것은 없어. 다만 너에게 달렸단다. 무슨 일이 있어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니?”

“목숨이라도 내놓으라고 하려고?”

“에이, 우리가 아무리 영족이라고 해도 그렇게 악한 존재는 아니란다.”

“아무 대가 없이 가르쳐 준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잖아.”

“보기보다 똘똘한 아이네.”

아르튀르는 마치 나보다 훨씬 오래 산 사람처럼 말했다.

이 고양이도 알고 보면 만화에서나 나오는 것처럼 몇백 년을 산 마법사가 변신한 모습이라거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

“너는 어떻게 고양이의 입으로도 말할 수 있는 거지?”

“나로 말하자면 영계의 조각가, 캐티아 백작 부인께서 만든 별 볼 일 없는 크리터였단다.”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아르튀르는 엉뚱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원래 영족은 산 것들과 달리 생기가 없어서 스스로 아이를 낳지 못하지. 새로운 생명을 낳을 수 있는 특권은 오로지 살아 있는 생명에게만 부여된단다. 하지만 그들은 생명을 낳는 특권을 가진 대신 수명이라는 제한된 그릇에서만 살 수 있어.”

“흐응.”

아르튀르의 이야기가 어느새 흥미로운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강아지로 태어나 버려서 이 세계의 갖가지 지식과 학문을 긁어모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아르튀르는 마치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나에게 차근차근 이 세계의 신비로운 메커니즘에 관해 설명했다.

“영족은 어제 이야기했던 것처럼 영계에서 생겨나는 자아 개체란다. 이승에서 죽음이 흘러들어 오면, 자연적으로 영계는 그 죽음을 삼켜서 또 다른 개체를 뱉어 내지.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탄생이야. 아니면 이따금 방대한 에테르를 가진 자가 나 같은 존재를 인위적으로 만들기도 해.”

“신기하네. 에테르는 뭐지?”

“성체의 주인이 가진 전지전능하고도 유일한 원소, 즉 일종의 에너지라고 생각하면 편하단다. 그릇이 클수록 에테르의 용량도 커지지. 하지만 인간은 수명이 있기 때문에 에테르를 담을 용기가 작아서, 성체의 주인이 내려 주는 권능을 반의반도 사용하지 못해. 기껏해야 조잡한 주술이나 연금술을 다루는 정도야.”

“이 세계에는 주술과 연금술도 존재하는구나.”

“후후후, 너는 탐구심이 아주 많구나.”

“내가 배우는 자세만큼은 아주 반듯하지.”

내가 으쓱거리면서 말하자, 아르튀르가 까르르 웃으면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우리 영족은 수명이 없는 만큼, 에테르를 충분히 축적해서 인간이 상상하지 못하는 마법까지도 사용할 수 있어. 내가 이렇게 자유롭게 말을 하는 것도, 더그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체를 가진 것도 전부 에테르 덕분이야.”

“그럼 그 성체의 주인이란 대체 누구야?”

“이 세계를 창조하고 돌보는 분이시란다.”

“이를테면 신이라는 소리네.”

세계를 돌봐야 하는 바쁜 신께서 왜 나 같은 것을 이 세계로 집어 던졌는가, 의문이 쌓이기 시작한다.

“너는 아주 드물게도 영기와 생기를 동시에 가지고 있단다. 그런 생물은 거의 존재하지 않아. 에테르도 금세 축적해서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너를 옭아매는 그 비좁은 감옥에서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지.”

“확실히 구미가 당기네. 하지만 너희가 과연 나에게 순순히 에테르인지 뭐인지 축척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까?”

“우리는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과 같은 선의도 가지고 있단다. 의심하지 말아 다오.”

대가 없이 얻어먹는 밥만큼이나 무서운 게 없지. 삭막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씩씩하게 살아남은 나의 감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요망한 고양이는 그저 살살 웃으면서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정말 아무 탈 없는 거 맞아?”

“모두 네가 하기 나름이지. 너는 영리한 아이니까 금방 스스로 에테르를 사용할 수 있게 될 거야.”

“왜 이렇게 나에게 친절해?”

“아치볼트는 원래 인정이 많은 남자란다. 이런 곳에 홀로 떨어진 네가 가여운 모양이야. 앞으로도 어려운 일이 있거든 아치볼트와 나에게 도움을 청하렴. 꼭 도와주마.”

“그게 수상하다는 거야. 인정만으로 나에게 이렇게 잘해 줄 리 없어.”

“두려워할 것 없어. 우리는 결코 너를 해치지 않아. 나를 창조하신 캐티아 백작 부인의 이름을 걸 수도 있어. 우리가 아니면 누가 너에게 부족한 에테르를 충분히 공급해 줄 수 있겠니?”

나는 아직도 이 고양이와 아치볼트에게서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순순히 나를 도와준다는데, 그 앞에 어떤 덫이 도사리고 있을지 누가 아는가?

내가 눈을 흘기자 아르튀르는 내 허리에 머리를 부대끼며 애교를 부렸다.

그러고 보니 줄곧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너 암컷이니, 아니면 수컷이니?”

“암컷이란다.”

“아이고!”

나는 엎드려서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다.

암컷이랑 두 번이나 뽀뽀했어! 전생에도 남자랑 뽀뽀한 적 없는 순결한 입술인데, 환생해서는 암컷 고양이한테 빼앗겼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