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1부

1. 아펜첼의 배우들





밤새 히터를 틀어 둔 탓인지 목이 따가웠다. 별생각 없이 탁상의 물통을 집어 드는데 그 옆에 있던 메모지 뭉치가 눈에 띄었다. 그제야 전날 잡다한 물건들을 죄 탁상에 던져 놓았던 것이 생각났다. 그 안에 이것도 끼어 있었던 모양이다. 도윤은 구깃구깃한 종이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메모지 뒷면을 한 장 뗐다. 손안에서 구기고 주머니에 넣는데 절로 한숨이 났다.

방 안은 아직 어슴푸레했다. 습관적으로 거울 앞에 서니 얼굴의 반절이 희부연 새벽빛 아래서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빛의 방향은 왼쪽이다. 도윤은 손을 들어 그림자에 잠긴 나머지 반절의 윤곽을 쓸었다. 어디에도 번뜩이는 빛은 없었다.

번뜩이는 빛. 그건 찰나에 번뜩여 사람을 매료시키고 현혹한다. 그가 본 사람 중 가장 빛나는 이는 기태현이었다. 도윤은 그를 떠올리면서 거울 안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유약한 인상이었다. 기태현은 이렇지 않다.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조형에 눈부신 빛이 깃들어 있다.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눈이었다. 기태현도 도윤도 눈이 인상에서 가장 우둘투둘 거칠게 튀어나와 있었다.

기태현은 안와가 깊고 눈매가 날카로우며 눈빛이 강렬했다. 사람들은 그를 볼 때 그 우아한 눈을 가장 먼저 보게 된다. 도윤도 마찬가지였다. 도윤의 눈은 삼백안과 애굣살이 두드러져 얼굴을 맞댈 때면 시선을 단번에 잡아끌었다. 다만 그 감상의 맥락이 기태현과는 다소 차이가 날 뿐이었다.

막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올라오고 있었다. 도윤은 문득 이 모든 게 부질없어져 거울에서 눈을 뗐다. 문가에 걸려 있던 외투를 들고 방문을 열었다. 의식적으로 거울에서는 시선을 피한 채였다.

도윤은 이윽고 호텔에서 벗어나 아침 바람을 쐬었다.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 어둑한 새벽을 몰아내고 솟아오르는 아침 해가 보였다. 부드럽고도 거대한 빛이었다. 어둠은 속절없었다.

아침 해가 되고자 했다. 아침 해가 되지 못한다면, 아침 해를 닮은 사람을 사랑하고자 했다. 그러나 도윤은 아침 해가 되지 못했고 아침 해처럼 빛나는 사람을 사랑하지도 못했다. 새벽빛은커녕 평생 달빛이 물러가는 일도 없었다. 그의 인생은 일몰로부터 시작하여 한밤중에서 그쳤다.

찬찬히 올라오던 해는 이윽고 하늘 높이 걸려 세상을 환하게 비추었다. 도윤은 기찻길을 넘으며 생각했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닮는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니, 사랑할 수 없다면 곁에서 그 빛을 한 자락이라도 나눠 받고 싶다고…….

시가지로 들어갈수록 스위스 전통 목조풍의 건물들이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도윤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휴대폰의 동영상을 켰다. 도윤은 사진보다는 영상을 선호했다. 함축적인 사진에 비해 많은 것이 드러나는 까닭이었다. 소지금에 여유만 있었더라도 액션캠을 사 왔을 것인데, 이제 와서는 의미 없는 생각이었다.

아펜첼은 동화 같은 마을이었다. 알록달록한 건물도 고풍스러운 간판도, 하다못해 집집이 내건 꽃 덤불까지도 사랑스러웠다. 몇 번의 걸음에 마을의 모든 요소가 시선을 끌어갔다.

휴대폰을 이리저리 돌리며 몇 걸음을 더 걷자 이번에는 한적한 마을 분위기가 피부에 스몄다. 마음을 쥐고 흔드는 분위기였다. 아득하니 고요하여 꿈길을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가득 들이켠 공기도 청량했다. 스물아홉씩이나 먹어서 할 줄 아는 것이 연기뿐이지만, 어쩐지 미래를 잘 견딜 수 있으리란 용기가 들었다.

이윽고 외곽에 다다른 도윤은 구석에서 벤치 하나를 발견했다. 동영상을 종료하고 벤치에 앉으니 조용한 가운데 메모지가 생각났다. 도윤은 구겨진 메모지를 꺼내 펼쳤다. 메모지에 짧은 구절이나 대사를 적고 틈날 때마다 제 것으로 만들어 보는 건 도윤의 오랜 취미였다. 어쩌면 직업병일지도 몰랐다.



‘만약 네가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행복해지겠지.’



오늘 메모지에 적혀 있던 건 어린 왕자의 구절이었다. 도윤은 눈으로 몇 번인가 구절을 더듬다가 입 속에 옮겨 담았다. 음미하며 음절 단위로 잘게 으깨고 곱씹었다.

연기는 도윤의 식사였으며 도윤은 탐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미식가였다. 마침내 혀끝에 그의 것으로 재구성된 대사가 고였다. 도윤이 조그맣게 첫머리를 내뱉었다.

“……만약 네가 네 시에 온다면.”

시야는 흐리게 올라가고 발성은 점차로 또렷해졌다.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행복해지겠지.”

도윤이 흠칫 놀라 메모지를 떨어트렸다.

“어린 왕자의 구절이죠. 많이 좋아하시나 봅니다.”

바람에 쓸려 가는 메모지를 주운 것은 낯익은 남자였다. 도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남자가 메모지를 내밀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어제 버스에서 뵀던 것 같은데.”

“아…… 네.”

기태현이었다. 전날과는 달리 마스크 하나뿐인 간소한 차림새를 해서 도윤은 한눈에 그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를 알아보니 아닌 척하려 해도 옅게 뺨이 달아올랐다. 연기로 정평 난 이 남자 앞에서 그의 연기 아닌 연기를 들키고 만 것이다. 도윤은 기태현 몰래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기태현입니다.”

“한도윤입니다.”

도윤은 어정쩡하게 손가락을 펴며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한 번 짧게 손을 흔들고 놓은 기태현이 웃으며 입을 뗐다.

“갑자기 말을 걸어서 당황하신 것 같네요.”

“조금…… 아니에요.”

친절하게 웃곤 있지만 미디어가 떠드는 대로 마냥 친절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도윤이 부정하자 기태현은 느리게 웃음을 덧그렸다.

“아시는진 모르겠지만 배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알고 있어요.”

“그럼 어제 버스에서도 알아보셨겠네요.”

“네, 어렴풋이요.”

그러자 기태현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긴가민가했습니다. 알아보신 게 맞다면, 감사하다는 인사드리려고 말 걸었습니다. 오랜만의 휴식기거든요.”

에둘러 말하지만 결국 앞으로도 입 다물고 있으란 소리다. 굳이 떠들 이유도 의사도 없어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없어요. 피차 쉬러 온 입장이고요.”

“감사합니다.”

기태현의 어조가 한결 친절해졌다. 그는 기이한 호감이 엿보이는 얼굴로 메모지를 가리켰다.

“조금 전에 보니 어린 왕자를 많이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요.”

“딱히 좋아한다기보다는 취미예요.”

“취미요?”

“작은 극단에서 배우 일을 했거든요. 십 년 정도……. 지금은 그만뒀어요.”

그 기태현 앞에서 이런 말을 하려니 기분이 공연히 이상했다. 다행히도 기태현은 그가 일을 그만둔 사유에 관해서는 묻지 않고 그렇게 일축했다.

“그래도 좋은 취미네요.”

“네.”

차라리 어린 왕자의 열성 팬으로 남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도윤은 휴대폰을 꺼내며 양해를 구했다.

“죄송해요, 잠시만요.”

“괜찮습니다.”

도윤은 화면을 켰다. 온 것은 짤막한 메시지였다.



[김이주: 일 그만뒀다며. 아깝다. 그래도 다른 데 가서도 잘 지내^^]



발신인을 보는 순간 신경이 쭈뼛 곤두섰다. 김이주는 옛 극단 동기였다. 성공하여 더 넓은 무대로 떠난 1할 중 하나로, 진작 스크린에 데뷔해 간간이 조연으로 얼굴을 비치고 있었다. 이렇게 메시지를 받은 것은 몇 년 만이었다.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도윤은 끄트머리에 붙은 이모티콘을 덧그렸다. 손가락은 이모티콘을 따라 웃고 있는데 숨은 점차로 가빠졌다. 해묵은 감정이 머리를 거세게 짓찔렀다. 도윤은 숨을 멈추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한도윤 씨?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두통이 생겨서요……. 죄송합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니었다. 감정이 찌른 곳에서 과거가 비져 나오고, 10년에 걸쳐 삭은 과거가 정신을 좀먹고 있었다. 두통이 점점 심해졌다. 병원에서도 고치지 못하는 도윤의 고질병이었다. 이럴 땐 따뜻한 물을 충분히 마시고 잠을 푹 자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다.

“한도윤 씨?”

“죄송한데, 먼저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역시 갑작스러웠는지 기태현의 낯에 당황한 빛이 여실했다. 그러나 그는 도윤을 유심히 살피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들어가서 푹 쉬세요.”

도윤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등을 돌렸다. 기태현의 시선은 그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까지 진득하게 따라왔다.



하늘거리는 커튼 너머로 불그스름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도윤은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어 냈다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긴 한숨이 나왔다. 인제 와서 메시지 하나에 스트레스를 받는 게 우스웠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그럴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기태현은 코웃음 치며 넘길지도 모르지……. 입으로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자꾸 그와 비교하게 되는 것이 싫었다.

도윤은 얼굴을 내리 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이 저조한 와중에도 허기가 지는 까닭이었다. 캐리어에 라면 봉지가 두어 개 있긴 했으나 온종일 먹은 게 없었다. 늦게나마 식사를 제대로 챙겨야 했다.

아펜첼의 노을은 분홍에 가까운 주홍빛이었다. 기차역 너머로 짙게 물든 하늘은 금방이라도 땅으로 쏟아질 것처럼 몸을 들이밀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도윤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휴대폰 카메라를 켰다. 한 무리의 새가 하늘을 가로지르고 화면 안의 빨간 녹화 버튼은 깜박거리며 시간을 기록했다. 도윤은 어지럽게 늘어진 전선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기찻길은 한적했다. 그는 긴 철도를 따라 미리 찾아 뒀던 음식점의 근방에 도달했다. 지도에 평점이 많이 찍혀 있어 사람이 어느 정도 있을 줄 알았는데, 근처에 있는 건 남자 둘이 전부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하늘을 한 번 더 담으며 식당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식당에 가까워질수록 다투는 듯한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걸음을 늦추기에 부족함이 없는 소리였다.

“아니, 형도 좋았잖아!”

“…….”

“내가 뭐 큰 걸 바란 것도 아니고……. 하던 대로 가끔 원나잇만 하자니까?”

“볼 일 없다고 했어.”

“진짜 이러기야?”

익숙한 목소리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던 도윤은 불현듯 목소리의 주인을 눈치채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팔에 절로 힘이 풀렸다.

“이제 형은 휴식기니까 아쉬운 거 없다 이거지.”

“하…….”

눈앞에 있는 것은 두 남자였다. 두 명 다 도윤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 명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자주 보이는 유명 모델이고, 다른 한 명은 뒤태밖엔 안 보이지만…….

“난 또 어디 가서 파트너를 찾으라고!”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나 진짜 기태현 얄미워서 미치겠다.”

도윤은 휴대폰 화면에 박혀 있던 시선을 천천히 프레임 밖으로 옮겼다. 기태현. 기태현이었다.

그제야 모델이 기태현 어깨 너머의 도윤을 눈치채곤 눈을 크게 떴다. 기태현도 모델의 반응에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도윤은 여전히 그들을 향해 세워진 휴대폰을 반사적으로 확인했다. 화면에 둘의 얼굴이 또렷하게 담기고 있었다.

“아…….”

“…….”

기태현의 시선이 도윤의 시선을 따라 휴대폰으로 내려왔다가 싸늘하게 도윤에게 내리꽂혔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새 떼의 날갯짓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등 뒤부터 목까지 소름이 쭉 뻗쳤다. 다음 순간 화들짝 정신을 차린 도윤은 불길한 것이라도 되는 양 휴대폰을 내던졌다.

“저,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못 봤습니다.”

“…….”

“미친, 한국인이야……?”

기태현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도윤은 다급하게 뒷걸음질을 쳤다.

“제가…제가 들으려고 한 게 아니고요. 못 봤습니다. 못 보고 못 들었어요. 정말 아무것도요.”

울렁거리는 시야 안으로 그가 원래 가려던 식당이 들어왔다. 문은 굳게 닫힌 채였다. 정말 쓸데없이 무덤을 팠구나 싶어 정신이 혼미해졌다.

“휴, 휴대폰은 가지세요.”

기태현이 휴대폰을 주워 들자 도윤은 일그러진 얼굴로 손을 내젓다가 급히 몸을 돌렸다.

“저기! 잠시만요!”

“잠금이잖아.”

멀어지는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잡히면 기태현이 그대로 그를 파묻어 죽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런 눈빛이었다. 도윤은 죽을힘을 다해 그들로부터 달아났다.

아펜첼에서의 둘째 날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