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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아펜첼 기차역이 공사 중이라는 모양이었다.

승무원은 아펜첼로 가는 버스는 저쪽에 있다고 친절하게 창문 너머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면 버스를 타고 아펜첼로 가야 했다는 블로그 후기를 얼핏 본 것도 같다. 1년 전쯤의 후기였다.

한숨을 쉬던 도윤은 군말 없이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기차에서 내렸다. 때는 어느덧 가을이었다. 바람이 제법 서늘했다. 경량 패딩을 잘 여미며 승무원이 일러 준 방향으로 향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정차한 버스 한 대가 보였다. 도윤은 따로 버스표를 사야 하나 고민하다가 무작정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기사는 웃는 낯으로 인사해 왔다.

[안녕하세요. 아펜첼에 가고 싶은데 버스표는 어디서 살 수 있죠?]

[기차표가 있으면 그냥 타시면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헛돈을 쓴 건 아닌 것 같았다. 도윤은 끙 무거운 캐리어를 버스 위로 끌어 올렸다. 내부를 살펴보니 예상했던 대로 버스 내부에 짐을 두는 공간은 없었다.

도윤은 그를 뻔히 쳐다보는 버스 기사에게 적당히 웃어 주고는 자리를 잡았다. 어떻게 되어 먹은 인상인지 만나는 외국인마다 그를 도와주려고 안달을 내곤 했으므로 이제 저런 시선쯤은 익숙했다. 어쩌면 도윤은 한국이 아니라 외국에서 일을 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한도윤은 스물아홉의 무명 배우였다. 스무 살부터 작은 극단에서 일을 시작해 주야장천 10년을 배우 일에 매달렸다. 그러나 무명 배우 생활만 10년이었다.

함께 일을 시작했던 동기의 9할이 미래가 보이지 않는 일을 포기하고 떠났는데, 도윤은 진작 자신이 그들 중 하나가 될 운명임을 알고 있었다. 다만 1년만, 1년만 하며 미련하게 쥐어 오던 것이 어느덧 10년이 되었을 뿐이다.

마음을 먹은 것은 지난달이었다. 도윤은 20대의 끝자락에서 20대를 통째로 바쳤던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이게 정말 자신의 길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우습게도 그때였다. 10년을 함께한 단장이 홀가분한 기색으로 그를 떠나보냈던 것이다. 그의 가벼운 어투와 얼굴을 떠올리던 도윤은 씁쓰레하게 미소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휴대폰을 들어 숙소의 체크인 시간을 확인하곤 습관적으로 폰뱅킹을 켰다. 잔고는 이제 고작 사백이 남아 있을 뿐이다. 문득 숨이 막혔다. 도윤은 화면을 끄고 느리게 눈을 감았다. 덜컹,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행을 가야겠다는 생각은 일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하고 있었다. 충동적인 결정은 아니었다. 한 번쯤은 모든 걸 내려놓고 그를 아는 사람이 없는 타지로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중 스위스를 선택한 것은 정말 사소한 이유에서였다. 도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연을 맡았던 극에 스위스가 나왔는데, 극의 첫머리에서 잘나가는 사업가인 주인공이 그런 말을 했다.



‘올해는 같이 스위스에 갈까요?’



그러나 주인공은 다음 신에서 사고를 당해 불구가 되고, 이후 사업과 인간관계가 파탄 나며 궁지에 몰린다. 마지막 신에서 그의 연인은 주인공을 껴안으며 말했다.



‘가요, 스위스. 당신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가요.’



결국 주인공은 스위스에 가지 못한 채 비극적인 결말을 맞지만, 도윤은 대본이 닳아 해질 때까지 읽으며 그들이 가고자 했던 스위스를 꿈꿨다. 그들의 스위스에는 낭만적인 사랑이 있었고 기약 없는 약속이 있었다.

아펜첼은 스위스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곳이었다. 관광객도 몇 없는 한적하고 조용한 동네라는 말에 길게 생각할 것 없이 첫 목적지로 정했다. 가는 길이 이렇게 힘들 줄 알았다면 재고했을 테지만……. 도윤은 암울한 낯으로 도르르 굴러 내려가려는 캐리어를 붙잡았다. 앉아서 커다란 캐리어를 잡고 있자니 자세가 제대로 안 잡혔다. 그렇다고 일어서면 분명 캐리어와 함께 굴러 내려갈 것이다.

어떻게 해야 캐리어를 고정할 수 있을지 궁리하는 사이 버스가 커브 길을 돌았다. 아차 하다가 캐리어를 놓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도윤은 그대로 버스의 후면으로 쭉 미끄러지는 캐리어를 보며 당황해서 일어났다.

“아!”

같이 당황하여 그를 쳐다보는 승객들 사이로 불쑥 커다란 손이 튀어나와 캐리어를 붙잡았다. 도윤은 버스가 일직선을 달리는 틈을 타 얼른 그쪽으로 달려갔다. 캐리어를 붙잡은 것은 선글라스와 모자로 얼굴을 꽁꽁 싸맨 남자였다. 얼핏 보니 동양인인 것도 같았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뭘요.]

근사한 중저음이었다. 도윤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뒤로 오후의 노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고즈넉한 정적을 분위기처럼 휘감은 남자였다. 도윤은 누진 노을빛에 잠겨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맥없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일순 남자의 얼굴이 허물어진 듯도 했다.

[감사합니다.]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으나 집요한 시선만은 돌아선 후에도 끊임없이 꽂혀 들었다. 그가 도윤이 짐작한 사람이 맞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곳이 제아무리 스위스일지라도 저 사람을 보기 위해 달려올 사람이 한 트럭인 까닭이었다.

‘기태현…….’

도윤은 자리에 앉아 의식적으로 그를 무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시아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도윤과는 다르게 20대 초반부터 명실상부한 톱 배우로 자리매김한 남자였다. 향후 10년은 그의 위치를 넘볼 배우가 없을 거라고 평가받는 배우. 그는 연기도 외모도, 심지어는 사생활까지도 흠이 없어 개인으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었다.

‘목소리도 그렇고 맞는 거 같긴 한데…….’

피차 저쪽도 휴가를 온 것 같으니 도윤은 최대한 그의 신경에 거슬리지 않게 다닐 생각이었다. 연일 떠들썩하게 보도한 덕에 기태현이 간만의 휴식기를 가진다는 건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더구나 행선지가 겹쳤더라도 애당초 도윤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 굳이 알은척을 할 만한 대상은 아니었다.

도윤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몇 개의 언덕과 평야를 지난 버스가 아펜첼에 도착했다. 도윤은 얼른 앞문으로 내려서 지도 앱을 켰다. 지도의 아랫부분에 아펜첼 기차역이 보였다. 영문으로 쓰인 기차역을 보자 새삼스럽게 정말 타지에 와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도윤은 느리게 화면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들었다. 숙소의 위치를 가늠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두고서도 숙소의 위치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휴대폰을 이리저리 돌려 봐도 지도 앱은 한참이나 느리게 그의 손길을 따라올 뿐이었다.

반대쪽인가? 뒤를 돌자 남자가 이쪽을 향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도윤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도윤이 놀라 휴대폰에 고개를 처박았다.

아무래도 저쪽은 아닌 것 같았다. 도윤은 달아나듯이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남자가 서 있던 쪽이 맞았다.

마을 한 바퀴를 거진 돌고 나서야 숙소에 들어온 도윤은 기진맥진 침대에 드러누웠다. 휴대폰을 켜 보니 한 시간은 족히 헤맨 모양이다. 도윤은 길게 숨을 내쉬곤 침대에서 내려가 캐리어를 펼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습관적으로 챙긴 대본 몇 묶음이었다. 도윤은 대본 하나를 들어 넘겨 보다가 다시 침대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정적이 이어졌다. 도윤은 문득 입을 떼었다.

“올해는 같이 스위스에 갈까요?”

조명도 관객도 없는 방에서 그의 음성만이 나직이 울렸다. 고독한 저녁이었다. 낯선 외국의 호텔 방에서 그는 지난 10년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는 볼 일 없을, 그가 사랑하던 무대의 조명과 관객들의 웃음에 대해 생각했다.

“갑자기…….”

다음 대사는 입 안에 가득 고여 있었다가 불식간 흩어졌다. 까닭 모를 쓸쓸함이 대사를 한숨으로, 한숨을 신음으로 고조시켰다. 도윤은 팔로 눈가를 가렸다. 입이 우그러지며 왈칵 서러움을 뱉어 냈다.

“…….”

스물아홉. 오직 잿더미뿐인 이별 여행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