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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승재는 매일 비슷한 옷만 입는 한정원이 지독하게 가난한 것이라 확신했다.

“정원이가 가지고 있는 돈이 우리 아빠가 여태 모은 돈보다 많을걸? 물론 너한테는 비교도 안 되겠지만.”

“그런데 왜 저러고 다녀?”

승재가 놀라서 하는 질문에 동석은 한숨을 쉬었다.

“뭐……. 이런저런 사정으로 정원이가 물려받은 게 좀 많아. 근데 자기 돈이 아니라고 안 쓰는 거야. 저 고집불통이 지가 번 돈만 쓰니까. 사촌 동생이지만 진짜 보통 애는 아니야.”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승재는 일부러 입을 다물었다. 호기심은 여기까지. 승재는 멀어지는 정원의 원룸을 쳐다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정원이가 사람 어렵게 만드는 면이 있는데 알고 보면 정도 많고 착한 애야. 언주 말고는 친한 애들도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다행이야. 아니, 너랑 친한 건 별로 좋은 게 아닌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속에 있는 이야기를 가감 없이 하는 걸 보면 동석이랑 정원이 한 핏줄이 맞는 것 같긴 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나랑 친한 게 왜 안 좋아?”

나도 정원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 따위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마음과는 반대로 입이 먼저 움직였다.

“비슷한 사람끼리 친하게 지내야 좋잖아. 너도 너랑 비슷한 애들이랑 매일 다니고. 지금 가는 부용출판사도 그 친구네 회사 아니야?”

도대체 학교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승재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과 또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스스로에게 놀라는 중이었다.



*



밤이 되자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우르릉 쾅!

쿠구구궁! 쾅!

승재는 천둥소리에 잠을 깨 번쩍이는 창밖을 무심히 쳐다봤다.

한정원은 동석이 집에 갔을까? 그런데 왜 천둥은 그렇게 무서워하는 걸까? 가난하지 않다면서 왜 그런 데 혼자 사는 거지?

승재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궁금증에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



*



새벽에 천둥소리에 잠을 깬 정원은 무릎을 가슴에 붙이고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이모 집에 있었지만 무서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쿠르르릉 쾅! 요란한 천둥소리가 들릴 때마다 화들짝 놀라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 뛰었다.

심호흡을 하며 진정이 되기를 기다리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정원은 얼른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방문 밖에는 베개를 든 이모가 푸근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이모가 재워 줄까?”

엄마를 꼭 닮은 이모가 팔을 벌리며 정원을 향해 다가왔다. 정원은 이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아이처럼 다가가 꼭 안겼다. 저보다 훨씬 작은 이모였지만 정원은 아이처럼 안겨 한참을 서 있었다.

“아직도 천둥 번개가 그렇게 무서워? 다 큰 처녀가 아직도 천둥이 무서우면 어째?”

이모가 놀리듯 말하자 나란히 누운 정원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과 함께 따라온 무서운 기억에 정원의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모는 정원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다 한숨을 깊게 쉬며 정원의 등을 토닥토닥 쓸어 주었다.

“어른들이 죄가 크다. 죄가 커…….”

이모의 말에 정원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통통하고 작은 손으로 정원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괜스레 미안하다, 미안하다……. 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이모의 말을 들으며 정원은 스르륵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든 깊은 잠이었다.

다음 날 오후까지 비가 쏟아질 거라던 일기예보와 달리 오전부터 해가 쨍 하고 떴다. 정원은 이제 같이 살자는 반복되는 이모의 잔소리에 대답 대신 미소로 얼버무리며 집을 나섰다.

“동석이한테 데려다주라 하면 되는데.”

이모가 자고 있는 동석을 들들 볶을까 봐 정원이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지하철 타면 금방인데 뭐. 오빠 더 자라 그래. 어제 나 때문에 편하게 자지도 못했을 텐데.”

“아니야. 저놈은 자갈밭에서도 꿀잠 잘 놈이야. 그런 거 걱정 안 해도 돼. 학교로 바로 갈 거야?”

이모가 정원의 옷에 묻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며 물었다.

“응. 할 것도 좀 있고. 조 모임도 있어서.”

“밥 잘 챙겨 먹고. 여기서 더 마르면 뼈밖에 없겠다. 응?”

다시 시작된 이모의 잔소리에 정원이 얼른 현관문을 열었다. 이모는 좋지만 잔소리는 사절이었다.

“저 가요!”



*



은영은 강의실로 들어가려다 저만치서 걸어오는 라희를 보며 반갑게 뛰어갔다. 늘 그렇듯 라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고 있었다.

“선배 안녕하세요? 오늘따라 더 예쁘시네요. 저 기억하시죠? 예전에도 몇 번 인사드렸었는데.”

“어, 안녕……. 네 이름이 은지였나?”

은영은 라희가 제 이름조차 기억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마음이 상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밝게 웃었다.

“안은영이요. 지난번에도 인사드렸는데……. 헤헤.”

은영이 라희의 팔짱을 끼고 짐짓 서운한 척하자 라희는 슬그머니 팔을 빼 가방을 고쳐 들었다.

라희의 반응에 은영은 얼굴이 굳어졌지만 빙긋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지금 수업 들어가시는 거예요?”

“어. 그런데 지혜 못 봤니?”

은영은 좀 전에 티격태격하며 강의실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봤지만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로 대답했다.

“아뇨. 못 봤어요. 만나기로 하셨어요?”

“아니. 그냥 수업이 같아서. 그런데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생전 친한 척하지 않던 애가 살갑게 인사를 하니 뭔가 꿍꿍이속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뇨. 그냥 저는…….”

말끝을 얼버무리는 게 할 말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결국 다 말하려고 왔으면서 망설이는 척하기는. 라희는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기로 한다.

“왜? 무슨 일인데?”

은영은 좀 더 망설이는 척하더니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눈에 힘을 주었다.

“승재 선배, 라희 선배랑 약혼할 사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게 왜?”

라희는 은영의 입에서 승재의 이름이 나온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랑 승재가 약혼하든 말든 제까짓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제가 선배 굉장히 좋아하는 건 알고 계시죠? 모르시려나?”

뜸을 들이는 꼴을 보아하니 결코 좋은 소리는 아닐 것 같아 라희는 더 언짢아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은영은 더 시간을 끌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기……. 제가 드릴 말씀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르겠으면 하지 말든가. 주제넘게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말고.”

라희는 더는 못 들어 주겠다는 듯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은영이 망설이듯 꺼낸 말에 그 자리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그게 아니라. 승재 선배가 한정원 선배랑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아서…….”

“뭐?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어제 승재 선배가 정원 선배랑 차도 같이 타고 가고, 우산도 같이 쓰고 가서요.”

은영은 이쯤 말하면 라희가 화나서 정원에게 달려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희는 은영이 생각한 것처럼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네 걱정이나 해.”

은영은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 라희 때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네?”

“네까짓 게 지금 누굴 걱정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이니?”

은영은 라희의 차가운 눈빛에 어쩔 줄을 몰라 입술만 달싹거렸다.

“승재 옆에 너 같은 애 수십 명이 있어도 나 신경도 안 써. 그러니까 네 앞가림이나 잘해. 험한 꼴 당하지 말고. 알겠니?”

라희의 표정이 얼마나 살벌하던지 은영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작전을 다시 짜야 할 것 같았다.

은영은 저를 아래위로 훑어본 후 같잖다는 듯 미소 짓고 돌아서는 라희를 보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안 그래도 요즘 기분이 별로인데 은영이 지껄인 말로 라희는 신경이 더 날카로워졌다. 은영이 아무리 간이 크다고 해도 없는 말을 지어내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아무래도 승재와의 약혼을 앞당겨 달라고 졸라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지혜는 어디 간 거야?”

하지만 지혜와 석주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승재는 수업이 없는 날이라 학교에서는 보기 힘들 것 같았다.

라희가 지혜를 찾아 강의실 쪽으로 걸어가는데 자판기 앞 정원이 보였다. 여전히 청바지에 흰 티셔츠. 그리고 모자를 푹 눌러쓴 모습이었다.

라희는 정원의 흰 티를 보자 또다시 화가 치솟아 올랐다.

“오늘은 거지 같은 스마일이 몇 개인지 보자.”

라희는 이번엔 기필코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은영이가 한 말도 확인을 한번 할 필요가 있었다.

라희는 팔짱을 끼고 정원이 돌아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에이 씨팔, 동전을 먹고 지랄이야. 짜증 나게.”

정원이 자판기를 발로 툭툭 차며 살벌하게 중얼거리는 낮은 목소리에 라희는 꼬고 있는 팔을 풀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말을 거는 게 더 현명한 방법 같았다.



*



“오늘 스타를 만난다 주인공은 배우 한성우 씨입니다. 이제 한성우 교수님이라고 불러 드려야 하나요?”

화사한 레몬색 원피스를 입은 리포터가 특유의 통통 튀는 억양으로 오프닝 멘트를 한 후 성우를 향해 마이크를 내밀었다. 동그란 눈이 무척이나 매력적인 여자였다.

성우는 불혹을 훌쩍 지났지만 젊은 배우 못지않은 완벽한 외모를 자랑했다. 자기 관리도 철저해 오십 넘으면 흔히 생긴다는 불룩한 뱃살도, 두툼한 턱살도 전혀 없었다.

오늘은 밤샘 촬영 때문에 면도를 못 해 수염이 거뭇하게 돋았는데 그마저 묘하게 섹시했다.

성우는 자신을 교수님이라고 추켜세우는 어린 리포터를 보며 쑥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 호칭은 좀 쑥스럽네요. 아직 정식으로 임명을 받은 건 아니라서요.”

“그래도 벌써 기사가 다 났는걸요? 세운대학교 학생들이 얼마나 부러운지 몰라요. 몰래 청강하러 가도 될까요?”

“하하. 글쎄요. 제 강의가 청강을 할 만큼 훌륭하지 않을 텐데 걱정입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한성우 씨 같은 교수님이라면 일부러라도 찾아갈 텐데요. 그나저나 몇 년 동안 교수직을 거절하셨다던데 갑자기 수락하신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성우는 리포터의 질문에 미소를 거두고 이마를 긁적였다.

“글쎄요. 남을 가르칠 주제가 못 된다 생각해서 계속 거절을 했었는데. 저 같은 사람이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참 좋겠다로 생각이 바뀌었다고나 할까요?”

리포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이후 지금 출연하고 있는 드라마와 영화에 관한 질문이 이어졌고, 성우는 베테랑답게 질문에 성심성의껏, 위트 있게 인터뷰의 분위기를 이끌었다.

인터뷰는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질문 한 가지 드려도 될까요?”

성우는 긴장한 표정의 작가들과 피디를 보며 뭔가 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진행된 인터뷰를 망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된다고 하면 안 하실 건가요?”

리포터는 성우의 반격에 살짝 당황했지만 그녀 또한 이 바닥에서 닳을 대로 닳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대답해 주실 거라 믿어요. 세운대학교에는 한성우 씨의 따님이 다니는 학교로 알고 있는데요.”

정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성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리포터도 눈치챘지만 모른 척 인터뷰를 빠르게 진행시켜 나갔다.

“소문에 의하면 어마어마한 미인이라고, 혹시 아버지를 닮아 연기에도 재능이 있나요? 어릴 적 잠깐 공개된 적 있는 사진만으로도 국내의 수많은 에이전시 회사에서 연락이 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떠신가요? 따님의 연예계 데뷔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찬성하시나요?”

조금의 틈도 주지 않으려는 듯 리포터는 숨도 쉬지 않고 여러 개의 질문을 퍼부었다.

성우는 리포터를 몇 초간 응시한 후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고개를 들었다. 기분 나쁘지 않으면서도 이들이 만족할 만한 대답은 뭘까 곰곰이 생각했다.

“제 딸은 저와는 독립된 개체로 봐 주셨으면 합니다. 그 아이의 결정에 저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니까요. 미인이라는 소문은……. 글쎄요. 제 눈에는 예뻐 보입니다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세운대학교 교수로 가시는 것은 따님과는 무관하다는 말씀이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