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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정원은 저가 비를 내리게 한 것도 아닌데 자꾸만 저에게서 비를 피할 방법을 찾는 듯한 승재가 조금씩 귀찮아졌다.

아니, 같이 다니던 패거리들은 어디에 두고 여기 와서 밍기적거리는 거야.

정원이 목을 쭉 빼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자 승재는 덩달아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누구 찾아?”

“네 친구들.”

정원에게서는 늘 예상을 빗나가는 대답이 나왔다.

“내 친구들은 왜?”

“너 가라고.”

승재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다시 한 번 눈치 없는 척 굴었다.

“친구 없어서 못 갈까 봐?”

입을 막아 버릴까? 정원의 생각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승재는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원의 까만 눈동자에 손끝이 저릿해졌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에서 똑똑 흐르는 물이 정원의 뽀얀 볼을 타고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정원의 얼굴을 닦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승재는 맥락 없는 자신의 사고에 실소를 머금다 쏟아지는 빗줄기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툭 던진 정원의 질문에 승재는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을 정리했다. 너 혼자 두고 가는 게 양심 없는 행동 같다고 하면 앞뒤가 맞지 않겠지?

하지만 이것 외에 승재는 정원의 옆에 버티고 서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찾아낸 말이

“너 심심할까 봐.”

였다. 승재는 저가 해 놓고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던지 고개를 숙이고 피식거렸다.



은영은 자신의 우산을 거절하고 다른 여학생 곁으로 뛰어가던 승재를 봤을 때부터 기분이 언짢았다. 승재가 친구라고 달려간 사람이 늘 같은 옷을 입고 다녀 여자 동기들 사이에서 ‘컴싸’라는 별명을 가진 정원이었다니.

그런 정원이 승재 선배의 친구라고? 그렇다면 나라고 친구 되지 말란 법이 있나?

은영은 두 사람이 가는 방향으로 함께 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강의동 입구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은영은 슬그머니 그들이 서 있는 곳 옆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빗소리 때문에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승재의 얼굴을 오랫동안, 그리고 가까이 볼 수 있었다.

비에 젖었지만 전혀 후줄근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이마와 뺨에 묻은 물기 때문에 섹시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승재를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은 은영만이 아니었다.

뜻하지 않게 좁은 간격으로 서 있는 여학생들의 시선이 잔근육을 보기 좋게 드러낸 승재의 젖은 옷으로 향했다. 곁에 서 있는 남학생의 우중충한 얼굴 속에서 승재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 그 이상이었다.

은영은 그들과 승재를 비교하다 남학생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정원은 은영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들릴 것 같은데…….

어떻게든 가까이 다가가려 애를 쓰는 은영의 눈에 정원을 보며 싱긋 웃는 승재의 미소가 들어왔다.

정확하게 말하면 정원을 본 후 땅을 보면서 미소를 짓는 모습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은영은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

계획대로라면 저 관심은 자신을 향한 것이어야 했다. 승재의 저 호기심 가득한 눈이 더 반짝이기 전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뭐?”

“너 심심할까 봐 그런다고.”

실없는 사람을 싫어하는 정원에게 승재의 말이 결코 곱게 들릴 리가 없었다.

승재가 뭐라고 하든 말든 빗속으로 뛰어가리라 생각하며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정원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원아!”

동석이 차 안에서 손을 흔들며 정원을 부르고 있었다.

“와! 오빠 정말 땡큐!”

정원은 얼른 달려가 차 문을 열었다. 하지만 앞좌석은 물론이고 뒷좌석까지 짐이 가득이어서 그것들을 한쪽으로 미느라 등이 비에 흠뻑 젖었다. 하지만 그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 승재 아니야? 승재야! 너도 얼른 타! 태워 줄게!”

정원이 뒤에 자리 없다고 말하려는데 동석이 먼저 선수를 쳐 버렸다.

“정원아, 바닥에 있는 종이 가방을 앞으로 보내면 승재가 앉을 수 있을 거야. 승재야 얼른 타!”

정원이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승재가 차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금세 안은 짐과 사람으로 가득 찼고 조금 전보다 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차는 출발했다.

차 안에서는 이모 취향인 ‘아모르파티’가 신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좁게 앉은 두 사람의 사이가 더 가까워졌다. 정원은 승재에게서 되도록이면 떨어져 앉으려고 애를 썼지만 짐까지 가득 차 있는 차 안에서 적당한 공간을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 안에 뭔 짐이 이렇게 많아?”

“아! 교수님 심부름. 오늘 차 가지고 오는 거 어떻게 아시고 이렇게 찰떡같이 심부름을 시키신다.”

박스 뚜껑을 살짝 열자 설문지와 볼펜 수백 개가 빈틈없이 꽉 차 있는 것이 보였다.

“차에 탄 김에 설문지 하나 할래? 설문지 완성하면 볼펜을 드립니다!”

동석이 껄껄 웃으며 말하는데 차 앞으로 갑자기 고양이 한 마리가 휙 하고 지나갔다.

“앗! 조심해!”

깜짝 놀란 동석이 급하게 핸들을 꺾자 뒷좌석 중앙에 앉아 있던 정원의 몸이 승재 쪽으로 기우뚱 넘어졌다.

동시에 쌓여 있던 상자가 정원이 앉은 쪽으로 넘어와 승재는 급하게 팔을 뻗었다.

“어? 어!”

의도치 않게 승재에게 안겨 버린 정원과 마치 정원을 감싸 안듯 팔을 뻗은 승재를 백미러를 통해 보는 동석의 눈이 잠시 동그랗게 커졌다 작아졌다.

하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앞을 보며 아모르파티를 흥얼거렸다.

“미안! 고양이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놀랐지?”

정원은 몸을 일으키다 승재의 턱에 머리를 콩 박았다.

“엇! 미안!”

아픈지 얼굴을 찌푸리는 승재를 보며 정원이 얼른 사과했다. 하지만 어깨 너머로 팔을 뻗고 있는 승재 때문에 몸을 똑바로 세울 수가 없었다.

“팔 좀 치우지?”

하지만,

“네 손도 좀 치우지?”

승재가 제 허벅지를 야무지게 잡고 있는 정원을 보며 말했다.

정원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남의 허벅지 위에 태연히 자리 잡은 손을 얼른 떼어 냈다.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할 거라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정색을 하며 정중하게 사과하는 정원을 보며 승재는 그녀의 사고방식이 보통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이 붉어진 것은 오히려 승재였다.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귓불이 뜨거워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마까지 붉은 기가 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작 정원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쿨내 진동하는 사과를 한 후 뒷좌석 중앙에 버티고 앉아 정면을 응시했다.

“비 언제까지 온대? 일기예보 봤어?”

정원의 질문에 승재가 대답을 하려는데 동석의 입이 먼저 열렸다. 동석이 대답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승재는 질문이 자신이 아닌 동석을 향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설프게 대답을 했으면 또 얼마나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을까.

“내일 오전까지. 새벽에는 천둥 번개도 칠 거라더라. 밤에 무서우면 우리 집에 와서 자고.”

동석이 정원의 사촌 오빠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대화의 내용이 주는 묘한 어감에 승재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정원이 어디에서 자든 무슨 상관이라고.

승재는 대화 내용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뭔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것 같았다.

“그럴까…….”

토르처럼 천둥 번개를 휘두를 것 같은 사람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나오자 승재의 고개가 다시 정원이 앉은 쪽으로 급하게 돌아갔다.

“그래. 괜히 새벽에 깨서 울지 말고 그냥 집에 와. 오빠가 거실에서 잘게.”

“미안해서 그러지.”

“나 생각해 주는 척하지 말고.”

“알겠어.”

정원이 백미러로 보이는 동석의 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동석과 이야기할 땐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저게 본래 모습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승재는 괜히 가슴이 뛰었다.

저런 표정으로 말을 걸어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정원을 향한 호기심은 일정한 방향 없이 거침없이 뻗어 나가고 있었다.

“천둥 번개를 무서워하나 봐?”

정원은 승재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다가 갑자기 훅 들어온 그의 질문에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제 질문에 딴청을 부리는 정원을 보며 승재는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적어도 투명 인간 취급은 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정원의 반응에 공기가 어색해지려는 순간 동석이 백미러를 흘끔 보며 대신 대답했다.

“응. 정원이가 귀신도 때려잡는데 천둥 번개는 무서워해.”

왜? 라고 묻고 싶었지만 대답을 안 해 줄 게 뻔했다.

“의외네.”

“그렇지? 나도 처음엔 정원이가 천둥만 치면 자다가도 많이 울어서 놀랐어. 전혀 안 그렇게 생겼잖아.”

정원은 당사자를 앞에 두고 아무렇지 않게 저를 대화의 주제로 삼는 둘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자꾸만 자신의 영역으로 발을 딛는 승재가 영 탐탁지 않았다.

“넌 어디서 내리면 돼?”

어서 사라지라는 뜻이겠지? 승재는 아까부터 저를 보내지 못해 안달 난 정원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어디서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어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Rrrrrrrr.

어떡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승재의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석주였다.

“여보세요? 너 어디야?”

나도 여기 계속 있고 싶지 않다고. 승재는 일부러 정원을 흘끔 쳐다보며 조금은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였다.

― 어, 미안. 책을 찾았는데 잠시 본다는 게 시간이 이렇게 됐네. 넌 어디냐?

승재가 예상한 대로였다.

“지금 학교 나가고 있어.”

“승재야, 내가 가는 길에 내려 줄게. 어디로 가면 돼?”

동석이 흘끔 쳐다보며 통화 중간에 끼어들었다. 승재는 괜찮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부용출판사 앞에 내려 줄 수 있어?”

동석은 생각보다 먼 거리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 비에 택시 타라 할 수도 없어 데려다주겠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정원은 염치없는 승재를 어이없게 쳐다봤지만 승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사람들의 배려가 그에게는 당연한 것일지도.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종자들이었다.

정원은 차가 덜컹이자 승재 쪽으로 넘어질까 봐 앞좌석 의자를 꼭 움켜쥐었다.

“오빠. 가는 길에 나는 좀 내려 줘.”

“왜? 그냥 바로 우리 집에 가지.”

“아니야. 옷도 다 젖어서……. 나중에 내가 알아서 갈게.”

“비가 계속 올 것 같은데? 그냥 부용출판사 갔다가 오는 길에 들를게. 원룸에 내려 주면 되지?”

“너무 귀찮잖아.”

정원이 일부러 더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하지만 승재는 휴대폰을 보느라 듣지도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뭘……. 지나가는 길인데.”

승재는 듣고 있지 않는 척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승재는 이렇게 눈치 없는 척 구는 것도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삼 일 전 카톡 내용까지 훑었다.

날씨에 비해 차는 그리 밀리지 않아 정원이 사는 곳까지는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빗방울의 굵기가 잠시 약해진 틈에 정원은 얼른 차에서 내려 원룸 건물로 뛰어갔다.

“이 근처 오면 전화할게. 나와!”

동석이 소리 지르자 정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승재는 낡고 치안도 취약할 것 같은 원룸 건물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곳에 혼자 사는 거야?”

“엄마는 같이 살고 싶어 하는데 정원이가 워낙 고집이 세서 말을 안 들어.”

“왜? 혼자 사는 게 좋대?”

“그냥. 다른 사람이랑 부대끼는 게 싫은가 봐. 하루 이틀은 괜찮은데 그 이상은 힘들어하더라고.”

“돈이 없어? 왜 이런 곳에 살아?”

승재의 말에 동석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정원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