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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못 잡니다. 여자와는





동훈은 휘파람을 불며 의국으로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샌드위치가 한가득했다. 퍼스트를 선 위암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병원 앞 수제 샌드위치 가게로 달려갔다. 잔뜩 사 들고 온 샌드위치를 소아과 병동에 넣어 주자 예진의 입이 귀에 걸렸다. 역시 원내 연애는 들킬수록 제맛이었다.

의국과 병동 식구들의 입맛도 다시게 할 샌드위치까지 완벽하게 챙겼는데, 지금 이 시각에 의국에 보여서는 안 될 얼굴이 보였다.

“너, 이 시간에 왜 여기 있어? 병동 안 가, 일 안 해?”

1년 차 장성민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성이다 동훈을 발견하고는 찌푸린 얼굴을 확 폈다.

“선생님!”

“이게 벌써 빠져 가지고. 2년 차 되려면 아직 몇 달 남았거든? 뺀질거리다 들키니까 지금 연기하는 거지? 목소리 톤 봐라. 불세출의 연기자 톤이네.”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게 아니면 뭔데?”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살려 달라니?”

덩치는 곰만 하고 얼굴은 산적 같은데 의외로 보드라운 심성의 성민은 안절부절못했다.

“설마 너 또 사고 쳤냐?”

얼마 전 성민은 비몽사몽으로 동명이인의 병실 환자의 투약 오더를 뒤바꿔 내는 실수를 저질렀다. 오더를 받은 간호사가 마침 신규 간호사라 아무런 의심 없이 1년 차의 오더대로 수행하려던 찰나, 다행히도 3년 차 유결이 실수를 알아채고 즉시 바로잡았다.

“아마도 그렇겠죠?”

“치면 친 거지, 그렇겠죠, 는 또 뭐냐?”

“제가 사고를 쳤으니까 강 선생님이 병동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의국에 처박혀 있으라고 하신 거겠죠?”

“강 선생이 얼씬도 하지 말랬다고?”

“네!”

“성민아, 아니 장 선생, 잘 생각해 봐요. 또 무슨 사달이 났기에 강 선생이 그런 오더를 내린 겁니까?”

“으으, 박 선생님까지 왜 이러세요? 제 간이 지금 쪼그라든 거 안 보이세요?”

“내 눈이 에코도 아닌데 그걸 어찌 보냐? 꼼꼼히 생각해 봐. 네가 뭔 죄를 저질렀는지.”

성민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으니까 그렇죠. 주말 오프 마치고 출근했는데, 선생님도 아시죠? 24시간 오프 다음 날이면 저 새로운 출발 다짐하면서 파이팅 하는 거.”

“그래. 너 파이팅 잘하지. 비록 입으로만 하지만 말이다.”

“선생님!”

“알았어. 미안해. 심각한 거 몰라줘서.”

“어쨌든 열심히 해 보려고 6시부터 병동에 나갔는데, 글쎄 강 선생님이 드레싱 하시면서 환자 라운딩 하시고요. 인턴 말로는 자기가 샘플링 할 때부터 나와 계셨더래요. 루틴 랩 결과도 다 확인하시고 추가 오더까지 내시는데, 알래스카도 그런 알래스카가 없었어요. 그러시곤 홀연히 수술방으로 사라지셔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첫 수술부터 온종일 수술에 퍼스트 서시더니, 어느 틈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쏟아지는 말에 홀랑 빠져 있던 동훈은 성민이 잠시 말을 멈추자 빨리 말하라는 손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성민이 속사포같이 말을 이었다.

“오늘 수술이 좀 빡셌습니까? 근데 제가 수술방 나와서 잠깐 커피 한잔 마시고 오더 내려고 보니까, 벌써 다 나와 있었어요. 스테이션에서 커피 마신 시간이 채 1분이 될까 말까였는데 그 시간에 모두 나와 있었다니까요!”

동훈은 ‘오호, 그러셔? 감히 1년 차가 포스트 오피 오더도 안 내놓고 커피를 마셔?’라는 표정으로 성민을 쳐다보았다.

“강 선생이 그럴 만한 잘못을 정말 조금도 안 했어?”

“전혀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하루였다고 자부합니다. 그래도 대라 하시면 오더 낼 시간에 커피 한잔 마신 죄밖에 없는데.”

“그런데?”

동훈의 되물음에 성민은 귀신을 본 사람처럼 멍하니 말을 덧붙였다.

“저더러 먼저 식당 가서 밥을 먹으라고 하셔서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어요.”

“강 선생은 같이 안 가고?”

뭔가를 눈치챈 듯 동훈의 눈썹이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네! 어떻게 아래 연차가 하늘 같은 3년 차 선생님을 앞에 두고 먼저 가느냐고 했더니, 눈꼬리를 이렇게 세우시면서 빨리 가라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가서 먹고 왔는데.”

성민은 우락부락한 얼굴에 박혀 있는 눈을 솥뚜껑만 한 손으로 날렵하게 위로 째 보였다.

“왔는데?”

“오후 회진 준비도 완벽하게 다 끝나 있었고, 교수님이 말씀하신 투약 오더까지 모조리 처방되어 있었어요. 거기다 내일 수술 환자 동의서까지 받겠다고 하시는데.”

“그러다 응급실 콜까지 받겠다고 나서지 않았니?”

“박 선생님!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당직까지 서시겠다고 해서 그때서야 전 깨달았죠. 분명 제가 사고를 쳤다는 것을요. 강 선생님, 깔끔하신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처럼 시작과 끝이 완전하게 깔끔하신 건 또 처음 봐서, 제가 뭘 잘못했는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봤는데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요.”

동훈은 입술을 앙다물고 심각한 표정을 연출하는 성민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내 보기엔 넌 네 죄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제가 알고 있다고요?”

동훈은 여유롭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떡거렸다. 그러자 성민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탄식했다.

“그게 뭡니까? 전 정말 모르겠단 말입니다.”

그 모습이 마치 석고대죄 하는 죄인처럼 보여서 동훈은 웃음을 겨우 삼켰다.

“아량 넓은 내가 가르쳐 주지. 네 죄는…….”

성민의 눈에 간절함이 어리었다.

“커피를 마신 죄야.”

“네?”

“네가 조금 전 네 입으로 그랬잖아. 커피 마신 죄밖에 없다고.”

“선생님! 정말 이러시기입니까? 후배 가슴에 시퍼런 멍이 드는 게 재미있으세요?”

“네 가슴보다 강유결 선생 마음에 더 시퍼런 멍이 든 것 같다.”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그렇게 잘못한 거예요?”

동훈은 눈에 힘을 주며 성민에게 위엄 있는 척 말했다.

“샌드위치 다 먹고 병동 나와서 일해. 수술 동의서는 네가 받아야지. 어디 새카만 1년 차가 하늘 같은 3년 차를 부려 먹어? 빠져 가지고.”

“그게 아니라…….”

“어허! 됐고. 네가 나올 즈음이면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을지니 염려 말아라, 중생아.”

동훈의 자신감 있는 얼굴에 성민은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떡였다. 그에게 있어 오늘은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지옥에서 노닐었던 상당히 불편한 하루였다.

“이거 먹어.”

유결은 치료 계획이 적힌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옆을 슬쩍 바라보았다. 책상 위에는 샌드위치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저녁 안 먹었다며? 심기가 또 왜 그렇게 불편하기에 자학하냐?”

“자학?”

“아니냐? 너 마음에 안 드는 일 있으면 스스로를 마구 학대하잖아. 굶고 잠도 안 자고 입에서 단내 날 만큼 일만 하고.”

“그런 적 없어.”

“까먹은 게 있네. 네 자학에는 자기 부인도 들어간다는 거. 안 힘든 척, 안 어려운 척, 안 괴로운 척.”

“꺼지시지.”

“와우! 평소 완전무결이라고 칭송받는 강유결 선생님 맞으신지요? 김유신 교수님에게 불태워졌을 때도 뒷담화 한번 안 해서 우러름을 받았던 분이 제일 친한 친구에게 ‘꺼져’라고 말씀하시다니, 이렇게 인간적이고 감격스러울 수가! 오늘의 이 역사적인 사건은 내 인스타에 반드시 차팅 해 두어야겠군.”

“귀찮게 하지 말고 그만 가서 일해.”

유결은 냉담하게 툭 던지고 모니터로 다시 눈을 돌렸다. 그런데 시야 앞으로 두 개의 캔이 어른거렸다.

“뭐로 할래?”

붉은 캔과 초록의 캔. 콜라와 사이다.

“먹고 일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잖아. 내가 이만큼 아양 떨었으면 못 이기는 척하고 이제 좀 먹어 줘라.”

유결은 벌떡 일어나 스테이션을 벗어났다. 그러자 동훈이 샌드위치가 든 봉지를 들고 잽싸게 동기의 뒤를 따라나섰다.

“무슨 일이기에 성민이 쩔쩔매게 만들어? 그 녀석이 눈치 보는 게 불쌍하지도 않냐? 가뜩이나 지난주 일 때문에 기가 죽어 있구만.”

“그깟 걸로 기가 죽으면 의사 그만둬야지.”

“평소의 친절한 강유결 씨가 아닌 건 확실하네. 진짜 무슨 일이야? 혹시 나 때문에 그래? 30분 늦었다고 진짜 맥주 30캔 얻어먹은 거 때문에? 아니지. 네가 그렇게 조잔한 놈은 아닌 건 내가 확실히 보장한단 말이지.”

동훈이 귀찮게 하거나 말거나 유결은 앞을 향해 나아갔다.

“아니면 맞선이 그렇게 엉망이었냐? 나가 보니 얼굴과 몸매가 상당히 불친절한 여자가 앉아 있어서.”

뚝, 하고 유결의 걸음이 멈췄다. 레이저가 뿜어져 나오는 듯 유결의 눈은 매서웠다.

“맞구나! 맞선을 보니까 네 불쌍한 처지가 불현듯 떠오른 거야. 내가 왜 여기서 이런 불친절한 여자를 만나고 있나, 병원으로 눈을 돌리면 이 여자보다 얼굴과 몸매가 배나 더 착하고 친절한 전공의 후배들이 수두룩한데 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네 마음에 멍이 든 거지. 난 왜 여태껏 애인 하나 없이 일만 죽어라 하고 살았는지.”

“내놔.”

“뭘?”

“그거.”

유결은 동훈이 들고 있는 비닐봉지를 가리켰다. 동훈은 씩 웃으며 냉큼 건넸다.

“그래, 먹어라. 동기야. 배가 불러야 어떤 부정적인 상황도 이겨 낼 수 있는 법이지. 네가 못나서 맞선 본 거 아니니까 훌훌 털어 버려. 내가 우리 예진이에게 부탁해서 예쁘고 늘씬한 애들로만 소개팅시켜 줄 테니까 시간만 비워 놔.”

동훈의 잡설은 귀담아듣지 않고 유결은 샌드위치를 뜯어 휴게실로 들어갔다. 먹어야만 엉뚱한 잔소리가 끊어질 것이고 동기 역시 눈앞에서 사라질 것이다. 무식하게 우적우적 먹고 있는데 초록의 상큼한 캔을 동훈이 내밀었다.

“마시면서 먹어. 체할라.”

사이다.

유결은 동훈이 눈치채지 못하게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친구의 말마따나 체할 것 같다. 아니 체기는 주말 내내 있었다. 손으로 사이다를 밀어 내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콜라 줘.”

“그래, 그래. 마시고 풀어, 인마.”

동훈이 따 준 콜라를 마셨다.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세 입 만에 샌드위치를 몽땅 해치운 후 콜라까지 원 샷 하고 남은 쓰레기는 휴지통에 버렸다.

“됐지?”

동훈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더 이야기를 해 줬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제아무리 눈치가 빨라 심경을 잘 헤아려 주는 친구라고 할지라도 토요일 맞선은 입에 올리기가 껄끄러웠다. 잡념을 떨치기에는 일을 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바쁘면 딱지 맞은 찝찔한 순간을 잊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