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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마음이 급해졌다.

“잘하는 운동이 있습니까? 감명 있게 읽은 책은요? 좋아하는 가수와 노래는 어떤 종류들인가요? 좋아하는…….”

지호가 속사포같이 말을 쏟아 내자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그는 수상쩍게 바라보며 지호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젠 제가 지호 씨에게 묻고 싶은데요?”

“……네. 말씀하세요.”

지호는 고개를 끄떡이며 대답했다.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부모님과 형제로는 언니, 동생이 한 명씩 있습니다.”

“지호 씨는 어떤 일을 하시죠?”

지호는 맞선 상대가 자신에 대한 정보를 듣지 못하고 나왔다는 것을 인지했다.

“글을 씁니다.”

“작가입니까? 어떤 글을 쓰시는데요?”

“장르 소설이에요.”

“소설가?”

“네. 정확히는 BL 소설을 쓰는 작가입니다.”

지호는 담담하게 말했다. BL 소설 장르가 뭔지 알고 있다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간혹 BL 작가 중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자신의 장르를 스스로 밝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지호는 아니었다.

물론 스스럼없이 직업을 밝힌다고 해도, BL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장르적인 특성을 설명하거나 이해받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생각은 다양하고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다르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거나 고쳐야 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BL? 처음 들어 보는 장르군요.”

“여성들의 특정 취향을 만족시키는 장르가 있습니다.”

어떤 특정 취향이냐고 물으면 간략히 답할 용의는 있었지만 남자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맞선은 처음인가요?”

“네.”

남자는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물끄러미 지호를 응시했다. 왠지 남자의 분위기가 쌀쌀맞게 변한 것 같았다.

“처음인 것 같지 않으신데요.”

“제가요?”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는데 남자는 오만하게 고개를 끄떡해 보였다. 지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서한주에게도 이런 냉정한 모습이 있을까.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맞선을 어떻게 하면 빨리 끝낼 수 있을까 하는 사람처럼 보여서요. 맞선을 지겹도록 본 프로의 냄새가 나거든요.”

“프로라고요?”

지호는 난데없는 남자의 말에 얼떨떨해졌다. 잘 당황해 본 적 없는데 지금은 심장이 엇박자로 쿵쾅거리고 있다. 눈앞의 남자가 서한주의 모델이라고 확신했을 때와는 또 다른 박동이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빛은 사라지고 입가에 묻어 있던 웃음도 없어졌다. 얼굴은 무표정하다 못해 버석해 보일 정도로 건조했다. 지루하다는 눈빛으로 그가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왠지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무엇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서한주를 제대로 빚어 낼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저, 프로 아닙니다. 처음입니다.”

시간을 확인하던 남자의 눈이 다시 지호에게로 향했다.

“지호 씨는 스스로를 잘 숨기는 재능이 있으신 것 같군요.”

지호는 예상치 못한 말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끔뻑였다. 지유의 걱정이 모조리 쓸데없는 것들이 되었다. 스스로를 잘 숨긴다는 말은 내숭을 잘 떨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맞선의 칼은 지호가 가지게 된 셈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꺼끌꺼끌한지 모르겠다. 숨긴 것을 들켰다면 칼의 진짜 주인은 눈앞의 남자였다.

“아니면 제게 관심이 없다거나.”

속내를 들킨 지호는 불장난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뜨끔했다. 그의 말뜻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는 맞선 상대에게 관심이 없는 지호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결국 솔직하게 나온 맞선 상대가 칼을 쥐었고 그 칼끝은 지호를 향했다.

“참지 말고 드세요. 사이다. 시원할 겁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지호는 남자의 말에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연재하는 글의 댓글 창에 독자들이 자주 쓰는 말이었다. 고구마만 먹이지 마시고 시원하게 사이다를 달라고. 그런데 눈앞의 남자가 자신에게 시원한 사이다를 날리고 있었다.

은우에게 상처를 받으면 서한주도 이렇게 반응하지 않을까.

“미안합니다.”

왠지 사과해야 할 것 같았다.

지호의 말에 남자의 표정이 화난 사람처럼 굳었다. 지호는 순식간에 변하는 그의 표정에 머쓱해졌다. 진짜 말을 잘못한 느낌이 들었다.

“양지호 씨가 뭐가 미안합니까?”

“네?”

“제게 관심이 없는 게 미안해할 일입니까?”

“어? 그러니까 제 말은…….”

따지고 보면 미안해할 일은 아니지만, 상대방이 화가 났다는 건 자신이 뭔가를 잘못했다는 뜻이니까 사과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양지호 씨가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네.”

지호는 단번에 수긍하며 사이다를 마셨다. 남자의 눈에 언뜻 실망하는 기색이 스쳤다. 지호는 사이다를 원 샷 하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남자를 향해 씩 웃었다.

“시원하네요. 감사합니다. 마시고 싶었는데 선뜻 손이 가지 않았거든요. 이상하게 생각하실 것 같아서.”

“내가 지호 씨를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다고요?”

“네.”

“어째서요?”

“무난한 음료가 아니라서요. 커피 같은.”

남자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 남자는 영문을 모르겠으면 미간을 찌푸리는구나. 서한주에게 부여할 특징 한 가지가 지호의 기억 창고에 저장되었다. 그가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아 덧붙였다.

“맞선 볼 때 얼음 넣은 사이다를 시키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요. 더구나 지금은 겨울인데.”

지호는 창밖 너머 그려져 있는 파란 하늘을 쳐다보았다. 넉넉한 하늘에 따사로운 햇볕이 걸려 있다고 해도 외투를 움켜쥔 사람들의 손은 쉽게 풀어지지 않을 것이다.

“안 이상합니다.”

단호한 대답에 지호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감사합니다. 지유가 그랬거든요. 아, 지유는 제 여동생입니다.”

“동생이 뭐라고 했는데요?”

“저는 맞선을 볼 때도 제 스타일로 할 거라고.”

“지호 씨 스타일이 어떤데요?”

“제 스타일은…….”

지호는 지유가 맞선에서도 같을까 봐 염려하던 자신의 스타일을 생각했다.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여과 없이 솔직하게 드러낸다고 했었다. 그건 다른 사람에게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반응이라고 했다. 비록 꾸미지 않은 본래의 모습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서는 상처를 받을 수 있다고.

지유의 말을 고대로 옮길 수는 없어 에둘러 표현할 말을 찾았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이유는…….

“전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보는 편입니다.”

지호는 남자의 까만 눈이 뚫어지게 쳐다보자 얼굴에 뭐가 묻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색한 정적이 잠시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지호 씨의 뜻, 잘 알겠습니다. 부모님께는 좋은 분이지만 서로가 인연이 아닌 것 같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잠시만이요.”

남자가 울리는 휴대폰을 받으며 자리에서 떴다. 지호는 눈을 찡그렸다. 스스로가 김빠진 사이다가 된 기분이었다. 테이블 위 빈 컵을 보고 있자니 탄산 가득한 사이다가 간절했다.

칼 같네. 서한주에 대한 영감을 준 남자가 단칼에 선을 긋자 아쉬움이 몰려들었다. 오늘 맞선이 끝나면 더 볼 사이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오늘이 아니면 서한주에게 또 어떠한 모습이 숨어 있을지도 알지 못하게 된다.

이 남자와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그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바쁘신 모양입니다.”

“병원입니다. 늦지 말라고 독촉을 하는군요.”

“토요일에도 일을 하시는군요.”

“오늘 당직이거든요.”

당직이라면 다시 병원으로 들어가 봐야 한다는 뜻일까. 물어볼까 하고 입을 떼려는데 남자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지호는 질문을 삼키고 입술을 매만졌다. 그의 눈길이 잠시 지호의 입술에 쏠리다 그녀의 눈으로 향했다.

“이만 일어날까요? 실은 10분이나 늦었습니다.”

“네.”

남자가 계산서를 들고 일어나 등을 보이자 지호는 마음이 급해졌다.

오늘이 마지막이겠지. 상냥하긴 하지만 때론 빙하처럼 쌀쌀맞은 서한주를 보는 건. 그는 왜 은우에게 한눈에 반해 버린 것일까. 은우의 마음이 다른 누구를 향해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 서른셋을 살아오면서 형성된 가치관과 질서는 물론, 그의 세계마저 무너뜨리면서까지.

대체 왜? 정말 그 답을 듣고 싶었다. 욕심이 뇌를 거치지 않고 육성으로 터져 나왔다.

“관심, 있습니다.”

뒤돌아선 남자의 눈은 커져 있었다. 놀란 빛이 검은 동공에서 뿜어져 나온다.

“뭐라고 했습니까?”

서한주도 은우를 처음 봤을 때 이런 눈을 했을 것이다. 또 다른 세계를 만났을 때의 충격, 아마도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 아닐까.

꽉 막힌 머릿속에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한주의 심리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렘이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와 심장을 건드렸다.

“알고 싶습니다. 대답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호는 비장하게 말했다. 설사 나중에 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느냐고 경멸 어린 눈으로 쳐다본다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었다. 캐릭터의 감정선이 유독 한주의 것만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은우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해도 은우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한 번도 이성애를 의심해 본 적이 없는 한주가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지 않고, 은우에게 빠져든다는 설정이 작위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유독 한주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스스로도 납득되지 않아. 지호는 이 기회를 빌어서라도 한주를 알고 싶었다.

처음으로 성급한 충동질에 져 버리고 말았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뜸을 들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할 수 있으세요?”

“뭘 말입니까?”

“그거요.”

“그게 뭐죠?”

남자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지호는 잠시 망설였다. 이성이 열망 아래서 발버둥 쳤지만 남자의 눈을 보는 순간 그것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섹스요.”

남자와…….

주사위는 던져졌다. 도저히 남자의 눈과 마주할 수 없어 시선을 비껴 내렸다. 충격을 받은 것인지 상대방은 잠잠했다. 숨 막히는 정적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즈음 지호는 그를 쳐다보았다. 서한주의 눈은 가늘어져 있었다.

“양지호 씨.”

남자의 목소리는 서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