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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은 발딱 일어나 주방으로 성큼 걸어갔다. 그러고는 절묘한 화투 패를 던지는 타짜처럼 식탁 위에 사진 두 장을 내려놓았다.

“지호, 니 선봐라.”

지호는 고개를 들어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엄마의 표정을 살펴보고 있는데, 어느새 주방으로 쪼르르 달려온 언니와 동생이 팔짱을 끼고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가요?”

“그래. 니. 여 니 말고 누가 있노?”

지호의 무심한 눈빛이 엄마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지수와 지유를 짧게 훑었다. 그러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지유가 도둑이 제 발 저린 얼굴로 나불나불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언니, 결혼 적령기는 서른부터야. 왜 그런 속담도 있잖아. 서른, 잔치는 끝났다. 여기서 잔치란 솔로 생활을 단칼에 청산해야 결혼할 수 있다는 뜻이야. 괜찮은 남자를 만나려면 눈에 불을 켜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시장을 돌아다녀야 해.”

“그 시장이 맞선 시장?”

“그렇지. 역시 언니는 문인이라 그런지 이해력이 정말 빨라.”

지호는 지유의 궤변에 실소를 흘렸다.

“언니는?”

지유는 둘째 언니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지유의 논리대로라면 지수는 결혼 적령기인 서른을 넘긴 상태였다. 큰언니를 물고 늘어지는 걸 보니 평소에 무신경하다고 소문난 둘째 언니가 아니었다.

“난 연하는 별로야.”

지수가 무 자르듯 말을 잘라 툭 지호 앞에 내던졌다. 더 이상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지지 말라는 경고였다.

“이름은 강유결, 나이는 서른. 한국대 의대 졸업했고 현재는 명성대 일반외과 레지던트 3년 차. 연봉은 엄마도 잘 모르는데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고. 닥터 강 엄마가 엄마 친구인데, 친구라서 이런 말 하는 거 아니니까 의심은 넣어 두고 들어래이. 닥터 강, 진짜 괜찮단다.”

엄마가 맞선남의 신상에 대해 줄줄 읊어 댔다.

“와우! 언니, 궁합도 안 보는 동갑인 데다 심지어 엄친아야. 전생에 나라를 구해야지만 맞선 상대로 영접할 수 있다는 그 유명한 엄마 친구 아들!”

지호는 지유의 호들갑에 가까운 아양을 가뿐히 무시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사진 속 남자의 첫인상은 미소가 해사한 남자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사진을 찍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는 듯, 책을 읽고 있는 옆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음 사진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제는 사진 찍는 것을 알아차린 듯 손으로 찍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햇빛 같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서한주 같다.

무심결에 든 생각에 호기심이 돋은 지호는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현실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해 본 적이 없었는데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게다가 직업도 의사였다.

태경을 향한 짝사랑을 접은 후 은우가 힘들어할 때 나타나 손을 잡아 주는 남자.

현재 연재하고 있는 <트라이앵글>은 서로의 등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청춘들의 아픈 사랑을 담은 이야기다. 은우의 가슴 아픈 짝사랑이 이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독자들은 태경이 하루빨리 은우의 마음을 깨닫고 후회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바람과는 달리 태경의 강력한 연적이 등장하는데 그 캐릭터가 바로 서한주다. 시놉시스를 짤 때부터 한주는 <트라이앵글>의 중요한 축이었다.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서한주가 등장했지만 막상 한주의 이미지와 특징이 머릿속에서 잘 그려지지 않아 지호는 애를 먹고 있었다.

은우의 짝사랑이 먹먹해 글을 쓰지 못하고 있는 데다 한주까지 베일에 싸인 것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글의 속도는 지지부진해졌다.

어쩌면…….

지호는 턱을 괴고 사진을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나갈게요. 맞선.”

“정말이가?”

“진짜지? 나중에 마음 바뀌면 작은언니는 지난번에 내가 찜한 명품 백 사 줘야 돼!”

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엄마와 지유에게 건조하게 말했다.

“알았어요. 엄마. 그래, 사 줄게. 백.”

“큰언니, 들었지?”

어느새 주방에는 지호와 지유뿐이었다. 박정숙 여사는 드디어 결정된 맞선 상대자를 친구에게 알려 주느라 부리나케 자리를 떴고, 지수는 낭비한 시간이 아까워 제 방으로 냉큼 올라갔기 때문이다.

생수병을 들고 자리를 뜨려던 지호는 생글생글하게 웃는 지유를 향해 입을 뗐다.

“지유야.”

“응. 언니.”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속담이 아니고 시야. 그리고 난 일천해서 문인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아주 많이 부족해.”

지호는 덤덤하게 말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속담이 아니었나? 아무렴 어때. 작은언니가 맞선을 본다는데. 근데 작은언니는 겸손이 지나쳐. 안 천한데 왜 일천하다고 그러는 거지?”

지유는 눈꺼풀을 순진무구하게 깜빡거렸다.



* * *



차가운 겨울바람이 파란 하늘의 얼굴을 매만지다 심술궂게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럴 때마다 두꺼운 코트를 입은 사람들은 옷깃을 여몄다. 나뭇가지에는 반짝이는 태양 빛이 걸려 있었지만 움츠린 어깨를 펴게 할 정도의 온기는 아니었다.

유결은 지하철에서 내려 발길을 서둘렀다. 강남에 위치한 메그레즈 호텔 앞에 도착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1시 55분. 아슬아슬하게 약속 시각인 2시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감기 몸살로 쓰러진 레지던트 2년 차를 대신해 토요 당직을 자청했는데 어제 어머니가 느닷없이 맞선을 통보해 왔다.



“당직이 있어서 이번 주는 도저히 시간을 뺄 수가 없어요.”

-엄마가 자주 하는 부탁도 아닌데, 정말 못 들어줘?

“네.”

-그럼, 오프 때마다 파주 올래? 네 얼굴 못 본 지 두 달은 넘은 것 같은데.



유결은 눈을 찡그렸다. 어머니는 대놓고 24시간 오프마다 파주에서 불가촉천민이 되라고 협박하고 있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동훈에게 욕을 얻어먹는 게 낫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갈게요. 몇 시라고요?”

-오후 2시. 장소는 메그레즈 호텔 스카이라운지 헤븐이다. 1초라도 늦지 마!



일방적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까매진 액정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파주 본가를 떠난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여전히 어머니의 손아귀에서 좌지우지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눈코 뜰 새도 없이 깨지고 바빴던 1, 2년 차 때가 나았다. 그래도 그때는 피곤함에 절은 그를 보고 어머니가 귀찮게 하지 않았으니까. 한데 슬슬 어머니가 결혼을 이유로 본래의 제 모습을 찾아 가자 유결은 살짝 짜증이 일었다.

동훈에게 토요일 당직을 부탁했을 때 친구는 대놓고 싫은 티를 팍팍 냈다.



“딱 한 시간이야. 메그레즈 호텔까지 왕복 20분, 맞선 40분. 1분이라도 늦었다간 1분마다 맥주 한 캔씩이다.”

“40분 만에 가능해?”

“맞선 처음 보냐?”

“응.”

“처음 만나는 여자랑 무슨 할 말이 있다고 40분 이상이나 대화를 해? 오늘 만나는 여자랑 무작정 잘해 볼 생각 아니라면 40분 안에 무조건 끊고 와. 1분이라도 늦을 시 넌 내게 맥주를 조공하면 그만이지만 난 예진이한테 죽을 수도 있다고.”



예진은 동훈의 연인으로 소아청소년과 1년 차였다. 지옥을 사는 전공의 1년 차에게 주말 24시간 오프는 천국을 방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희귀한 시간이었다. 연인과 종일 있을 수 있는 시간 중 한 시간을 빌리게 됐으니 유결도 미안하기는 했다.



“알았어.”

“어째 말투에 영혼이 없다?”

“언제는 트랜스포머 닥터라며?”

“뻣뻣하게 일만 하니까 그렇지. 하여튼 네가 연애 한번 못 해 본 게 불쌍해서 한 시간 당직 서 주는 거니까 30분 내로 정리하고 와. 아니면 내가 예진이에게 정리당해.”



유결은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연애를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는 동훈의 억측을 바로잡아 줄 이유는 없었다. 명성대 병원 레지던트 동기로 만난 동훈은 좋은 친구지만 오지랖이 넓고 말이 많아 간혹 피곤해지기도 했으니까.

맞선 장소 헤븐은 메그레즈 호텔에서 제일 핫한 곳이라고 동훈이가 알려 주었다. 카페, 레스토랑, 바, 때론 연회장까지 안 되는 것이 없는 무한 변신의 만남의 장소라고. 서울에서 제법 알아주는 상류층 사람들까지도 은밀하게 맞선을 보는 곳으로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하며 유결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사방이 매끈한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손목시계와 엘리베이터 숫자 표시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행히 지각은 면할 듯싶었다.

유결은 맞선 상대의 이름이 적힌 문자를 찾아보았다. 어머니는 맞선을 통보한 후 아주 기본적인 정보만 알려 주었다.

양지호. 나이 서른.

그 외는 아무것도 모른다. 무엇을 하는 여자인지 어머니가 어떻게 아는 여자인지. 알고 싶지도 않아 물어보지도 않았다. 정보 획득을 위해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귀찮아질 바엔 한 시간 정도 모르는 여자 앞에서 벌서는 기분을 느끼는 편이 더 나으리라.

그렇다고 불편한 마음을 수면 아래로 완전히 밀어 넣지는 못했다. 어렵게 시간을 빼 어울리지 않는 곳에 앉아 요식적인 행동을 하는 것만큼 피곤한 일은 없었다.

불청객처럼 찾아온 맞선은 처음이라 유결은 퍽 난감했다. 어떤 응급 상황에도 잃어 보지 못한 침착함인데, 어머니가 만들어 내는 조화 앞에서는 저절로 그 침착함이 사라지는 것 같다. 일을 하듯 감정을 배제하고 적당히 예의만 차리다가 시간이 되면 정중히 일어서자고 다짐하며 애써 불편함을 외면했다.

엘리베이터 표시등이 빨간색에서 도착했음을 알리는 녹색으로 변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스르르 열리고 안이 드러났다.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후방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강남의 전경이 훤히 내다보이는 구조였다.

안에는 세 명의 사람이 먼저 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여자였다. 둘은 일행인 듯 서로를 보고 웃고 있었고 한 여자는…….

유결은 저도 모르게 그 여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시공간에 있는 것 같은 모습이 신선했다. 엘리베이터 한쪽 구석 통유리 창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선 모습. 한 손은 두툼한 모직 코트 안에 집어넣고 두 발은 교차시킨 채 서서 눈을 감고 있었다. 아이보리색 코트 밑으로 쭉 뻗은 늘씬한 다리와, 그 아래로는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는 하얀 운동화가 보였다. 사람들의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기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듯한 여자.

특이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안 타세요?”

한 사람이 유결을 향해 물었다.

“미안합니다.”

유결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가 몇 층 오르다 다시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유결은 점점 뒤로 밀렸고 곧 통유리 창 쪽에 바짝 붙어 서 있게 되었다.

어느새 코너에 기대어 있던 여자와 가까워졌다. 유결은 그녀에게 몸이 닿지 않으려고 오른팔을 반대편으로 잡아당겼다. 슬쩍 쳐다본 여자는 유결이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있건 말건 엘리베이터 안이 좁아지건 말건 눈을 감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깨끗한 얼굴이었다. 속눈썹도 제법 길었다. 짧은 머리카락은 구불구불 웨이브가 졌는데 그 모양이 귀여웠다. 그녀의 키는 상당히 컸다. 키가 큰 유결이 고개를 많이 숙이지 않아도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는 얼굴에 호기심이 일었다. 눈을 뜬다면 눈동자는 과연 어떤 느낌일까. 그녀 주위를 아우르는 분위기처럼 잔잔하고 평화로울까.

-thriller, thriller night.

귓가에 들려오는 나지막한 멜로디.

유결은 여자의 귀를 쳐다보았다. 코트 색과 같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이어폰이 얌전히 귀에 끼워져 있었다. 왜 그렇게 혼자만의 세상에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고요한 얼굴을 하고서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라니. 반전 있는 선곡에 흥미가 돋아났다.

갑자기 그녀가 눈을 떴다. 몰래 훔쳐보고 있던 유결은 서둘러 눈을 정면으로 돌렸다. 여전히 엘리베이터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갑갑했다. 사람들의 뒤통수와 등만 보고 있었는데 문득 여자가 똑바로 서는 게 느껴졌다. 제대로 서니 키가 170cm는 훌쩍 넘을 듯했다.

“실례합니다. 저, 내려요.”

허스키한 목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에 울리자 앞을 막았던 사람들이 좌우로 비켜섰다. 막 도착한 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여자는 바깥으로 사라졌다. 엘리베이터가 다시 움직이자 유결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어이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저, 내려요’가 어렸을 때 본 어느 광고의 ‘저, 이번에 내려요’처럼 들린 건 순전히 유결의 엉뚱한 상상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에 불편했던 마음이 일순 유쾌해졌다.

오랜만에 일이 아닌 여자를 두고 한 상상이었으니까.